결과와 상관없이 그날의 함성, 숨결, 바람은 생생하게 내기억과 몸에 남아 있었다.
"학교 대표까지 했어? 대단하다! 나는 인라인스케이트랑 스키밖에 안 타 봤는데."
나는 또 그레타 툰베리의 활동에 감명받아 환경 동아리를 만들고 국회의사당 앞에 가서 시위했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김나지움에서는 연극 동아리 활동했던 것도 신나서 얘기하다 나혼자만 떠드는 것 같아 민망해졌다.
"내 이야기만 했네. 오빠는 고등학교 다닐 땐 어땠어?"
"음..... 난 공부밖에 한 게 없어서 해 줄 말이 없네. 이런저런활동도 다 생기부 때문에 한 거라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그냥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면 인생이 다 풀릴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마리오네트 같았던 거지. 마리오네트도 실은 저렇게 생김새가 다 다른데………."
오빠는 한숨을 쉬며 벽에 걸린 마리오네트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뒤흔들어 놓았던 봄이만 떠나면 교실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까? 
우리 반 아이들이 봄이에게 보인 적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은 아이에 대한 부러움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혹시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불안함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봄이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옥죄는 숨통을 터 주었으리라. 봄이의 이야기를 더는 듣지 못하게 된 아이들의 상실감은 봄이의 상처 못지않게 검고 깊은 아가리를 벌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될 거다. 더 많이 깨닫는 아이일수록 검고 깊은 아가리가 더 큰 공포로 다가오겠지. 그걸 지켜볼 일도 두려웠다. 아이들보다 20년이나 세상을 더 살았는데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내 몸인 양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은지의 번호였다. 영준, 소연, 약혼, 배신, 파혼, 그들의 결혼……. 은지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온갖 것들이 머릿속에 순서대로 떠올랐다. 불과 한두 시간 전만 해도 내 인생이 송두리째 갉아먹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지금은 남의 일처럼멀게 느껴졌다.

나는 원주토지문화관에 머무는 동안 그 이야기를 장편으로 새롭게 쓰기 시작했다. 
다시 쓰는 동안 봄이를 괴롭히는 무리로 상정했던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들에게 봄이와 같은 비중의 애정과 연민이 느껴지면서 나는 비로소 이야기가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생각도 관계도 쿨(cool)한 것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은 요즘, ‘진실‘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어찌 보면 진부하고 칙칙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진실이 어떤 사실 속에 감추어진 핵(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찾지 않거나 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실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가리는 것은 편견과 고정관념이다. 
개인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오랜 시간에 걸쳐축적되어 사회적 통념으로 굳어졌을 때 희생당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봄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써 가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차츰 모호해져 갔던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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