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선물
지금은 훨씬 덜해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해도 외국에 유학을 갔다 오거나 연수를 갔다 온 지식인들이 우리의 후진성을 개탄할 때마다 쓰는 상투어로 선진 외국에선 어쩌구저쩌구……… 하는 게 있었다. 물론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 넓은 세상의 이모저모에 우리들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건 중요한 일이고, 그렇게 비춰본 우리들 모습의 초라함에 충격을 받는 것도 발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할과정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그런 말투에서 자신만은 우리 모두의 후진성이나 초라
함과 무관하다는 교만한 착각 같은 게 느껴져서 아니꼽게 들릴 때가 많다. 그래서 그랬던지 내가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속으로 벼른 것도 많이 봐두리라는 생각보다는아무리 좋은 걸 봐도 쇼크 안 받기와 돌아와서 밖에서본 거 풍기지 않기였다. 내가 한 친구에게 나의 이런 유치한 결심을 얘기했더니 그건 외국 문화에 맹목으로 심취하는 것보다 더 나쁜열등감이라는 핀잔을 들었다. 막상 밖에 나간 나는 그들의 잘사는 모습에 정말 놀라지 않았다. 정말 놀랄 만한 건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문화유산이었지만 우리가 그 방면에 있어서 그들과 비교가 안 된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던 거고, 적어도 현재의사는 모습에 있어서만은 우리도 세계 수준이었기 때문에 놀랄 게 없었다. 그땐 벌써 겉으로 나타난 우리의 생활수준은 어느 선진국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었다. 그 무렵 한창 유행하던 ‘잘살아보자‘는 구호를 마침내 현실로움켜쥔 감격을 만끽하려는 듯 우리 모두가 외면치레에급급할 때였다.
그 후 다시 몇 년 후 일본 구경을 갔을 때는 열등감은커녕 그들의 사는 겉모습이 우리보다 훨씬 궁상맞음을 딱하게 여겼다. GNP 인가 뭔가 하는 게 우리의 몇 배라면서 왜 이렇게 못살까가 수상하기도 하고 우리처럼화끈하게 잘살지 못하는 그들이 딱해 보이기도 했던것이다. 재작년에 다시 일본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의 어떤 재단의 초청이어서 보고 싶은 걸 미리 신청하면 가능한 한 다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때도 철없이여기저기 명승지만 열거하고 맨 나중에 심신장애자를위한 특수학교를 보고 싶다고 신청했다. 내 가장 친한친구가 뇌성마비 아들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고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 지켜보면서 같이 분통도 터뜨리고우리 사회를 원망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나라에선 그런장애자를 어떻게 돌보고 있나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쪽에선 나를 그런 특수학교에 안내하기 전에 내가신청서에 써낸 시설이 중 정도라는 단서가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나는 재단이 너무 풍부하여 호화롭게 운영하거나 너무 영세하여 궁핍하게 운영하는 시설 말고 중
간 정도의 시설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동경도내의 구마다 하나씩 있는 심신장애자 시설은 다 도립이기 때문에 각기 특성은 있지만 빈부나 우열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했다. 나는 좀 머쓱해져서 그럼 변두리의 어려운 동네에 위치한 학교를 보여 달라고 했다. 학년으로는 중고교의 과정에 해당하는 장애자 교육기관인 어느 도립 양호학교에서 나는 비로소 이게 정말잘사는 거로구나! 충격을 받았고, 감동했고, 그리고 열등감을 느꼈다. 우리의 부유층이 그들의 부유층보다 몇배 잘살고 또 스포츠로 자주 국위를 선양하고 곧 올림픽의 개최국까지 된다는 걸 아무리 상기해도 열등감은 덜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풍족하게 쓰고 있는 건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거였기 때문이다. 그 학교는 넓고밝고 세심하고, 어떤 종류의 장애자도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완벽하게 친절한데도 개선의 노력은 그치지 않고있었고, 1인 1기를 가르칠 전문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장애자를 고용함으로써 세제 혜택을 받고자 하는 기업체와 연결돼 있어서 졸업생의 장래까지도 책임지고
지고 그늘진 ‘병신‘다움이 떠올라 가슴이 저렸다. 우리의 정박아가 천사 같지 못한 게 어찌 그 부모 탓만이랴. 우리 모두의, 정말 관심 있어야 할 곳에 대한 무관심, 인간다움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내면보다는 외양에대한 열광이 남은 능히 천사 같은 인간으로 가꿀 수 있는 장애자를 ‘병신‘으로 방기한 게 아닐까. 나는 그때 선물 받은 걸 지금도 간직하고 있고, 천사의 주머니라고 부르면서 미사포 주머니로 쓰고 있다.
나는 이런 보답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외손자 사랑이 좋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느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불태운 것만큼의 정열, 내가 잠 못 이룬 밤만큼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갚아지길 바란 이성과의 사랑, 너무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본능적인 사랑또한 억제해야 했던 자식 사랑………. 이런 고달픈 사랑의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없는 허심한 사랑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
그때 그 친구의 모멸의 시선이 지금 생각해도 따갑다. 아닌게 아니라 내 애들 중 예능 방면의 천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부모를 알량하게 만나 묻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두려움이 간혹 들긴 하지만 이다음에 ‘큰소리‘ 치기 위해 지나친 극성을 떨 생각은 아예 없다. 아이들의 책가방은 무겁다. 그러나 단순히 책가방의무게만으로 한창 나이의 아이들의 어깨가 그렇게 축 처진 것일까? 부모들의 지나친 사랑, 지나친 극성이 책가방의 몇 배의 무게로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나 아닐지. "내가 너한테 어떤 정성을 들였다구. 아마 들인 돈만도 네 몸무게의 몇 배는 될 거다. 그런데 학교를 떨어져엄마의 평생소원을 저버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애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제일 예쁜 건 아이들다운 애다. 그다음은 공부 잘하는 애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길 바란다. 활발한 건 좋지만 되바라진 애 또한 싫다. 특히 교육은 따로 못 시켰지만 애들이 자라면서 자연히 음악·미술·문학 같은 걸 이해하고 거기 깊은 애정을가져주었으면 한다.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되기를.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 대강 이런 것들이 내가 내 아이들에게 바라는 사람됨됨이다. 그렇지만 이런 까다로운 주문을 아이들에게 말로 한
아마 세 살 때쯤일 것이다. 마주 엎드려 그림책을 보고 있는 할머니와 손녀가 있는 사진은 당연히 아름답고 평화롭다. 그런데 왜 아름다움에는 비애가 뒤따르는 걸까. 나는 그 사진을 보면서넋을 잃고 생각에 잠겼다. 그 애는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다. 훌쩍 커서 아름다운 소녀가 되었다. 지금도 예쁘지만 어릴 적 그 아이의 귀여움엔 비길 데 없는 광채 갈은 게 있다. 그 아이는 내가 아들을 잃고 난 후 1년 안에태어난 외손녀다. 아들을 잃었을 때, 내 여생에 다시는근심도 기쁨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장대 같은 아들을 잃은 지옥 같은 고통에 지쳤을 때 겨우 콩꼬투리만한 새 생명이 기적처럼 나에게 왔다. 그 새 생명을 처음대면했을 때 나는 온몸이 떨리는 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나에게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다행히 그 애를 낳은 딸네가 가까이 살고 있어서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애가 자라는 걸 지켜볼 수 있었다. 비로소 마음 붙일 곳이 생긴것이다. 근심도 기쁨도 없이 목석처럼 살아낼 수 있으리라고
입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살고 싶었으면 그 작은 생명에게 마음을 붙이고 울고 웃고 하였을까. 그 애의 생명력이 눈부시다면 내 생명력은 또 얼마나 징그러운가. 나는 딴 손자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 애를 얼마나 편애했던가. 그건 손자 사랑이라기보다는 마음 붙일 수 있는 걸찾아내어 놓치고 싶지 않은 자기애가 아니었을까. 그 한장의 사진은 잊고 지내던 당시의 태산 같은 고통과 함께온갖 자질구레한 기쁨과 슬픔을 불러내어 나를 부끄럽게도, 하염없게도 한다. 내 기억의 창고도 정리 안 한 사진 더미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뒤죽박죽이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고 나라는 촉수가 닿지 않으면 영원히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중에는 나 자신도 판독 불가능한 것이 있지만 나라는 촉수가 닿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또한 행복의 절정처럼 빛나는 순간도 그걸 예비한 건 불길한 운명이었다는 게 빤히 보여서 소스라치게 되는 것도 묵은 사진첩을 이르집기 두려
운 까닭이다. 당시에는 안 보이던 사물의 이중성과 명암, 비의가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묵은 사진첩을 뒤지다가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공포이자 전율이다. 나라는 촉수는 바로 현실이라는 시점이 아닐까. 이미 지나간 영상을 불러내서 상상력의 입김을 불어넣고 남의 관심까지 끌고 싶은 기억에의 애착이야말로 나의 글쓰기의 원동력이자 한계 같은 것이 아닐까, 요즈음 문득문득생각한다.
습작을 시작했다. 지독하게 열심히 했다. 밤잠을 설치고, 입맛을 놓치고, 남의 좋은 글을 읽고 샘을 내고, 발표의 가망도 없는 글을 썼다. 차차 글 쓰는 어려움에 눈 떴다. 자연히 쉽게 쓴 글이 쉽게 당선된 데서 비롯된 내심의 은밀한 오만도 숨이 죽었다. 당선작을 쓰고 나서 습작을 썼으니 순서가 거꾸로 됐지만 그 시기는 당선작을 쓴 시기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시기였다. 글 쓰는 어려움에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으면서도 속에선 뭔가 조금씩 조금씩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 곧 『여성동아』에서 연재의 기회를 주었고 그 후 여러 지면의 비교적 고른 혜택을 받고 보니어름어름 작가인 척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작가가 될까 말까 하던 4년 전의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다.
에세이 제목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유쾌한 오해수많은 믿음의 교감사실대의 비오는날집 없는 아이보통 사람인덕밤은내방이멜다의 구두천사의 선물넉넉하다는 말의 소중함나는 나쁜 사람일까? 좋은 사람일까? 다 지나간다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나는 누구일까생각을 바꾸니행복하게 사는 법민들레꽃을 선물받은 날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할머니와 베보자기달구경사랑의 입김내 기억의 창고새해 소망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중년 여인의 허기증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나의 문학과 고향의 의미잃어버린 여행가방시간은 신이었을까내 식의 귀향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 마음 붙일곳그때가 가을이었으면「노란집 열림원, 2013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문학동네,2015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세계사, 2000나의 만년필, 문학동네, 2015나를 닮은 목소리로 문학동네, 2018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 문학동네, 2015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 문학동네,2015「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세계사, 2002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예수 문학동네,2015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문학동네,2015살아 있는 날의 소망, 문학동네,2015나를 닮은 목소리로, 문학동네, 2018[호미, 열림원, 2007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세계사,2000 ‘세상에 예쁜 것, 마음산책, 2012나를 닮은 목소리로, 문학동네, 2018[노란집』, 열림원, 2013살아 있는 날의 소망, 문학동네, 2015「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세계사, 2002살아 있는 날의 소망, 문학동네, 2015「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문학동네, 2015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세계사, 2000[세상에 예쁜 것, 마음산책, 2012「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문학동네, 2015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매수, 문학동네, 2015「살아 있는 날의 소망」, 문학동네, 2015[나의 만년필 문학동네, 2015「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세계사, 2002나를 닮은 목소리로, 문학동네, 2018『잃어버린 여행가방」, 실천문학사, 2005[세상에 예쁜 것, 마음산책, 2012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현대문학, 2010[아직 펴보지 않은 책 죽음, 신앙과 지성사, 2016[두부, 창작과비평사,2002『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세계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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