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문단속이 허술한성격이라 현관문은 안 잠그고 대문만 잠갔는데 대문 또한 허술하여 밖에서 팔을 안으로 넣어 열 수 있게 되어있어 집에 들어오는 데 지장은 없었다. 그래도 시간 걸리는 외출을 하려면 문단속을 안 할 수가 없겠기에 오던길을 되짚어가서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못 찾았다. 그 후며칠은 산에 갈 때마다 발밑만 보고 걸었지만 어디 꼭꼭숨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자식들한테 준 스페어 열쇠를 회수해서 문단속을 제대로 하게 된 후 비로소 발밑을살피는 일에서 해방이 되었다. 다시 한눈을 팔 수 있게 되었을 때 내 열쇠가 바로 길가 내 눈높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가 주워서 그렇게 눈에 잘 띄게 걸어 놓았을 것이다. 그 산책 길은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길
은 내가 낸 길도 아니었다. 본디부터 있던 오솔길이었으니 누군가가 낸 길이고 누군가가 현재도 다니고 있어서그 길이 막히지 않고 온전한 것이다.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만용이었으리라. 그날 밤일이 지금 생각해도 유쾌한 건 이런 광범위한 믿음의 교감의 추억 때문인 것 같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올겨울은 눈이 많을뿐더러 추위 역시 대단했다. 우리집처럼 방이 여럿이고 방마다 연탄을 때는 집에선 매일매일 배출해내는 연탄재만 해도 엄청나다. 만일 하루 걸러 오는 청소부가 사흘이나 닷새쯤을 오지 않는다면 우리 동네는 연탄재에 묻히리라. 그러나 청소부 아저씨는어김없이 온다. 아침 기온이 영하 15도가 넘는다는 관상대(기상청 소속 기관인 ‘기상대‘의 옛 이름 - 편집자 주) 발표를듣고 나서 아저씨의 손수레 바퀴가 언 땅을 덜커덕덜커덕 구르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고맙고 안심스러울 때는없다.
현장 사무소 같았다. 일자형의 흰 건물에 함석지붕이 질고독한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아아, 하고 나는 다시한번 신음했다. 나는 평생 그렇게 독하고 추악한 주황색을 본 일이 없다. 더군다나 그 주황색은 비에 젖어번들대고 있었다. 그 주황색이 내 뇌를 갈고 지나가는 듯한 충격을 나는 내 뇌수에 느끼고 진저리를 쳤다. 나는 그런 충격은청각의 자극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독한 쇳소리의 마찰음을 들었을 때 뇌속에 일어나는 미칠 듯한 경련과도 흡사한 쇼크가 시각을 통해 내 뇌 속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주황색지붕 너머로 미래의 아파트 단지의 투시도가 선명하게보였다. 비로소 문리대가 헐리고 속악하고 호사스러운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는 현실감이 나에게 왔다. 그 현실감은 고약하고 고통스럽게 왔다. 나는 지금도 그 빗속에 번들대던 주황색 지붕을 생각하면 혐오감으로 진저리가 쳐진다. 그 혐오감은 유서 깊고 자랑스럽던 대학 자리에 호화
웬일인지 이 결혼사진도 구걸 행각의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약고 똑똑한 생각은 안 했다. 나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베풀기에는 좀 많은 돈을 꺼내서 얼른 그사람의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남편이 알까 봐, 또 딴 승객들이 눈치챌까 봐, 나쁜 짓이라도 하듯이 몰래 재빠르게 그 짓을 하고, 하고 나서도 얼굴을 붉혔다. 아마 그날이 내 결혼기념일이어서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의문이 안 풀리는건 그가 왜 하필 결혼사진을 꺼내 보이며 구걸할 생각을했을까 하는 거다. 내가 보기엔 그게 조금도 구걸에 도움을 주는 것 같지가 않았는데 말이다. 어쩌면 결혼의 의미를 남보다 더 잘, 더 많이 알고 있었음이 아닐까.
비 오는 날 있었던 사건이랄 것도 없는 몇 가지 얘기를 적어 놓고 보니 문득 서글프다. 빗속에서 같이 받은우산이 인연으로 싹튼 로맨스가 한 컷쯤 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없는 걸 어찌하랴. 이래저래 40대의 비 오는 날의 사건은 재미없을 수밖에 없나보다.
딸애들이 한창 혼기에 있을 땐 어떤 사위를 얻고 싶으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들끼리 모여도 화제는주로 시집보낼 걱정이었다. 큰 욕심은 처음부터 안 부렸다. 보통 사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 쉬워 보통 사람이지 보통 사람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대라면 그때부터 차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우선 생활 정도는 우리 정도로 잡았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도 많고 못사는 사람도 많은데 내 어림짐작으로는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수효가 비등비등한 것 같으니 우리가 중간, 즉 보통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본 보통 사람은대략 이러했다. 살기는 너무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을것, 식구끼리는 화목하되 가끔 의견 충돌쯤 있어도 무방함, 부모가 생존해 계시되 인품이 보통 정도로 무던하여자식에게 보통 정도의 예절과 공중도덕을 가르쳤을 것, 학력은 내 자식이 대학을 나왔으니 대학은 나와야겠지만 일류냐 이류냐까지는 안 따지기로 하고 그 대신 적성에 안 맞는 엉뚱한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오나마나이
면 절대로 안 되고, 용모나 키도 보통 정도만 되면 되지만 건강할 것, 돈 귀한 줄 알고 인색하지 않을 것, 등등이었다. 나는 그만하면 욕심도 너무 안 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사윗감은 쌔고 썼으려니 했다. 그러나웬걸, 막상 나서는 혼처는 하나같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보통 사람을 넘지 않으면 처졌다. 보통 사람이 그렇게귀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장 보통이라고 생각하고 내세운 조건은 어쩌면 가장 까다로운 조건인지도 몰랐다. 나는 우선 사돈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보통가정을 내 둘레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역시 귀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내 집은 남이 보기에 보통일까? 거기 생각이 미치자 그것조차 자신이 없는 게 아닌가. 우선 주부가 글을 쓴다고 툭하면 이름 석 자가 내걸리고, 살림은 건성건성 엉터리로 하는 가정이 어디 보통 가정인가. 나는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보통 사람은 나에게만 어려운 게 아닌 모양이다. <보통 사람들>이란 TV 연속극이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을때 나도 그걸 꽤 열심히 보았지만 그 사람들이 보통 사
람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란 제목은 가장 광범위한 사람에게 동류의식을 일으켰음직하다. 전형적인 보통 사람을 찾긴 힘들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고 또 그렇게 생각할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한 것 같다. 그것은 아마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서를 써 오라고 할 때 생활 정도란에 거의 다 ‘중‘을 쓰는 심리와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어떤 일간지에서 평균치의 한국 사람을 계산해서 거기 꼭 들어맞는 사람을 찾아내서 ‘한국의 보통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보도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크게 웃고 있는 낙천적이고 건강한 얼굴을 보고 내가오랫동안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과 친숙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갖춘 보통 사람의 조건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사람의 조건하곤 얼토당토않은것이었다. 그의 생활 정도나 학벌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사람을 훨씬 밑돌았지만 그는 보통 이상 날카로운 사회적 안목과 비판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통 사람다운 점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큰 욕심 안 부리고 열
심히 노력해서 지금보다 좀더 잘살고 자식은 자기보다더 많이 가르치고 싶다는 건전하고 소박한 꿈이었다. 그러나 한편 냉정히 생각해보면 큰 욕심 안 부리고노력한 것만큼만 잘살아보겠다는 게 과연 보통 사람의경지일까? 보통 사람이란 좌절한 욕망을 한 장의 올림픽복권에 걸고 일주일 동안 행복하고 허황된 꿈을 꾸는사람이 아닐까? 보통 사람의 숨은 허욕이 없다면 주택복권이나 올림픽복권이 그렇게 큰 이익을 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풍진세상에서 노력한 만큼만 잘살기를 바라고 딴 욕심이 없다면 그건 보통 사람을 훨씬넘은 성인의 경지이다. 그럼 진짜 보통 사람은 어디 있는 것일까?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 보통 사람이란 평균 점수처럼 어떤 집단을 대표하고 싶어 하는 가공의 숫자일 뿐, 실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크게는 안 바라요. 그저 보통 사람이면 돼요." 가장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얼마나 큰 욕심을 부렸었는지 모른다. 욕심 안 부린다는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는 것도 내 경험으로 알 것
같다. 아마 나의 가장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까다로운 조건만 내세워 자식들의 배우자를 골랐더라면 생전 시집 장가 못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제 마음에드는 짝을 제각기 찾아내서 부모의 승낙을 받고 슬하를떠났으니 큰 효도한 셈이다. 아직도 보내야 할 자식이남아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을 찾는 일은 그만두기로 한지 오래다. 서른둘이 되도록 시집을 안 가고 있는 딸을 둔 내 친구는 보는 사람마다 붙들고중매서라고 조르는 버릇이있다. "바지만 입었으면 돼." 그게 내 친구의 사윗감에대한 간단명료한 조건이다. 그러나 서른두 살 먹은 그처녀는 치마 입은 총각이나 나타나면 시집을 갈까, 바지입은 총각들한테는 흥미 없다는 낙천주의자다. 나는 그렇게 초조해하는 친구보다 그의 딸의 느긋한 여유가 한결 보기 좋아서 친구한테, 그 애는 결혼 안 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애니 제발 좀 내버려두라고 충고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친구는 벌컥 화를 내면서 보통사람들이 다 하는 사람 노릇도 못 하고 나서 행복 불행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담 내 친구는 행불행
이전의 최소한 사람 노릇을 보통 사람의 전형으로 삼고있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사람과도, 신문사에서 뽑은보통 사람과도 다른 또 하나의 보통 사람이었다. 내가좋아하는 보통 사람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러다가는 내가 보통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정말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모르겠다. 지금 누가 나에게 보통 사람이 누구냐고묻는다면 이마에 뿔만 안 달리면 다 보통 사람이라고 대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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