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나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두 분이 황홀하게 행복해하는 모습 또한 본 적이 없었다. 우리 가족은 돈 문제를 입에올린 적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재무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데 종이 하나가 팔랑 떡어졌다. 허리를 굽혀 주워보니 열기구 광고 사진을 오려놓은 것이었다. 나중에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다가 또 하나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냉장고 자석에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책장에서도 하나를 더 발견했다. 임시방편으로 열기구 광고 용지를 접어서 책갈피로 썼던 것이다. 엄마한테 내가 발견한 광고 용지에대해 물어보았다. 엄마는 아버지가 항상 열기구를 타고 싶어했지만, 한 번도 타지 못했다고 말했다. 힘이 빠졌다. 약간 놀랍기도했다. 정말로 아버지가 열기구를 타고 싶어했다고? 그 엄청난 모험을 하고 싶어했다고? 믿기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부모님을 제대로 알고 있던 것일까? 보통의 다른 자식들처럼 나도 우리 부모님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두 분은 멀리 살았지만 예측이 가능한 분이었다. 라미와 나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부모님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알아맞힐 수 있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두분은 매일 정오에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와 감자튀김, 피클로점심 식사를 했다. 1시에는 그날 온 우편물을 살펴본 다음 거실의자에 앉아 각자 낮잠을 잤고, 5시 30분이면 저녁 식사를 했다. 그52
아것1리고 10시 뉴스가 끝나면 잠자리에 들었다. 두 분은 70년 가까이 부부로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사람들을이끄는 진행자 스타일이라 늘 웃으면서 실없는 농담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분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금방 친구가 되는재미있고 사교적인 분이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옆에 있는 한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늘 미소를 띤 얼굴에 아버지가 농담을 하면 소리 내어 웃는 게 전부였다. 아버지가 실없는 소리를 할때는 이를 보완해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는 남들과 엮이지않고 조용히 그림자처럼 살아온 분이었다. 나는 그게 나름 엄마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원래 잘 웃고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분이라 생각했다. 한데 지금의 엄마는 내가 알던 엄마와는 사뭇 달랐다. 수줍어하지만 할 말은 다하는 엄마, 자동차 딜러에게 농담을 하는 엄마. 그리고 내가 모르던 엄마와 아버지의 낭만적인 꿈까지 발견했다. 맞다. 나는 엄마와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더 많았다. 엄마와 아버지는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한 길이 있었을까? 엄마는 스테이시가 떠난 뒤 딸의 어떤 점을 가장그리워했을까? 아버지는? 나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다. 지금까지 부모님을 일정이나 욕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부모님의 이면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싶었다. 라미는 엄마가 짐 싸는 것을 도왔다. 나는 이동 주택에 꼭 필
요한 물건들을 준비했다. 엄마는 자신에게 할당된 두 칸의 서랍을 채울 물건들을 골랐다. 그중에는 파이어사이드라는 시골 리조트에서 구입한, 낡고 바랜 빨간색 스웨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걸 왜 가져가려고 한대? 공간이 별로 넉넉하지 않을 텐데." 라미에게 물었다. "어머니의 과거를 보여주는 상징 같은 물건이래. 그리고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과정이기도 할 거야." 라미가 답했다. 라미의 말이 맞았다. 우리 둘이 여행을 할 때는 계획을 세우지않고 항상 가볍게 다녔지만, 이번 여행은 많이 다를 거란 사실을예감할 수 있었다. 짐을 싸고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엄마의 상실감은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 두분에게 의미 있고 중요한 물건으로 가득한 이 집에서 더 이상 살수 없게 되었다. 67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익숙해진 일상생활도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터였다. 엄마는 아버지의 체취가 배어 있는 베개와 아버지의 몸무게를 기억하는 침대에서 더 이상 잠들지 못할 것이었다. 엄마는 울지 않았다. 강단이 있는 분이었고, 엄격하며 감정을잘 드러내지 않는 독일 가정에서 자란 분다웠다. 대공황도 견뎌낸 엄마였다. 하지만 슬픔은 엄마의 몸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었다. 원래도 많이 드시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식욕을 잃고 체중이
줄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앙상했던 엄마는 눈에 띄게 살이 빠졌고, 전보다 더 말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지?" 가끔은 혼란스러운 듯 이렇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슬픔과병마가 엄마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울지않았다. 우리와 함께 나서기로 한 것은 엄마 나름대로의 낙관적인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아직 안 끝났어. 아직도 인생에는 재미있는 게 많아. 아직 하고 싶은 일도, 알고 싶은것도 많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엄마는 옷장에 좋은 옷들이 많았지만 여전히 여행하면서 입을 새 옷을 사며 즐거워했다. 그런 모습에 라미와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우리는 엄마에게마지막으로 꼭 챙겨가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었다. "하나만 더 챙기면 돼. 소파에 있는 쿠션." 아마도 향수보다는 실용성이 있는 쿠션을 챙기는 것 같았다. "아버지랑 스테이시 사진 좀 챙길까요?" "아니." 우리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라미와 나의 결혼식 때 찍은 가족사진을 챙겼다. 엄마는 옛 기억을 불러일으킬 품목 대신에 길위에서 시간을 보낼 때 유용한 책과 퍼즐을 챙겼다. 사실 엄마의짐 가방에 가장 먼저 들어간 건 망원경이었다. 그리고 자연 세계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동식물 도감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우
3. 다. 이 블로그는 2011년 여름부터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난 몇년 동안 내 블로그를 구독하는 사람은 1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나는 그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아마 그 사람들은 관심을 가져줄 거야! 자연과 여행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보살피며 하는 여행으로 주제가 바뀐다해도 말이야. 사진과 더불어 글을 같이 공유한다면 그렇게 외롭지 않을 거야. 나는 블로그에 ‘위도가 변한다. 태도도 변한다.Changes in Latitudes, Changes in Atitudes‘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지미 버핏inny Buffett의 노랫말에서 따온 것이었다. 어머니가 책을읽는 데 열중하는 동안 팀과 나는 링고를 데리고 호수 강변을 산책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돌멩이 몇 개를 주워서 지질학에관심이 많은 어머니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우리가 이동 주택으로돌아왔을 때, 블로그에 댓글이 몇 개 달려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우편물로 배달된 편지를 읽을 때처럼 즐거워하기를 바라며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190대라고 모험을 즐기지 말라는 법 있나요?" ‘그냥 물 흘러가듯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세요." "세상에는 정말 멋진 일이 많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전부계획 없이 찾아와요. 즐거운 시간이 되실 거예요." 어머니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댓글을 읽는 동안에는 눈빛이 반짝였다.
"그 사람들은 왜 우리 여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야? 벌일이네." 어머니는 즐거운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댓글을 공유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어머니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팀이 맞았다. 나는 사진 덕분에위안을 찾았다. 하지만 그냥 사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진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공유하며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 그덕분에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스스로 정해놓은 기대 수준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아등바등하고 있는지를 일깨워주었다.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었고 날씨는 우리의 여행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삶의 흐름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부터 교란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이 감정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외로웠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남편 그리고 어머니와 다시 만나는 길 위에서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 방향대로 흘러가야 했다. 블로그에 댓글을 단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영원한 유목민도 때로는 속도를 늦추고 기대 수준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 다가올 4개월에 대해 세웠던 계획이 다른 시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우리의 계획은 아주 단순해졌다.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한 것이다. 06
를 취하면서 장난을 쳤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들고는 터져나오는웃음을 꾹 참으며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이 자그맣고 소극적인 분이 그린자이언트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그렇게우스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5주 동안 사진첩을 훑어보면서 어머니가 웃는모습으로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우리 둘다 살짝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단지 "그냥 사진 찍을 때 어색해서 그래. 난 그게 그리 어색하더라."라며 대수롭지않은 일이라는 듯 말했지만 말이다. 그랬던 어머니가 여행길에 오른 지 단 며칠만에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실없는 행동을 하며 순수하게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녹색 거인 동상 아래에는 거인의 친구인 녹색의 작은 새싹 꼬마 모형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재미있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얼굴 자리에 구멍이나 있었다. 어머니는 아주 태연하게 구멍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포즈를 취했는데, 얼굴에는 온통 장난기와 즐거움이 가득했다. 이때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알고 있던 것 이상의 생기발랄함이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아주 고상한 것에서부터말도 안되는 우스운 것까지 모두 다 껴안을 수 있는 폭 넓은 분이었다. 적극적으로 삶을 즐기고자 했고 흥이 돋아 우스운 포즈를 취하는 것에도 스스럼없었다.
어머니 안에는 원래 그런 특성들이 있었지만 그저 표출할 기회가 한 번도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젊었을 때라면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을 행동을 이제는 나이도 들고 병도 들었기 때문에망설일 것도 없고,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미시간 집을 떠나면서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진 어머니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이제 더 이상 ‘멋진‘ 사진 말고 ‘진짜‘ 살아 있는 그대로의 사진을찍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바보 같고, 냉소적이면서도, 즐겁고진실한 그런 사진 말이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지난 20년 동안지켜봤던 어머니는 이제 그냥 ‘노마‘ 또는 ‘엄마‘가 아니라 ‘미스노마 할머니‘가 되었다. 나는 "아흔 살이라고 인생이 끝난 게 아니야."라고 혼잣말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즉 팀의어머니이자 나의 시어머니인 ‘미스 노마‘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내륙 지역을 관통하는 90번 주간 도로를 따라 내려가며 주변에 어머니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볼만한 곳에 들르기 위해 일부러 러시모어로 가는 길을 둘러갈 필요도 없었다. 러시모어까지 가는 도중에 별스럽고 재미있는 곳이많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팀과 둘이서 이 도로를 달릴 때는 마음내키는대로 어떤 곳은 들렀다 갔고, 어떤 곳은 그냥 지나쳐버렸다. 이제 우리는 조금이라도 몸이 근질근질하면 반드시 차를 세72
있다. 어머니의 웃음을 한 번 보고 나자, 자꾸만 더 그 웃음이 보고 싶어졌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사우스다코타의 미첼이라는 곳이 낙점되었다. 그곳에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옥수수 궁전이 있었다. 현지 사람들은 그곳을 세계에서 가장 큰 조류 사료장이라 불했다. 역사적으로 이 궁전은 한 해의 풍요로운 수확을 축하하기위해서 지어졌다. 궁전 건물 벽에는 옥수수, 지푸라기 등의 천연소재를 가지고 만든 여러 주제의 벽화로 가득했으며 해마다 새로운 주제로 벽이 장식되곤 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마침 새로운 벽화가 발표되는 옥수수 궁전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축제기간 동안에는 거리의 교통이 통제되고 옥수수와 관련된 모든것들이 각광받고 축하받는다. 링고랑 같이 저쪽에 서보세요." 팀이 이렇게 말하자 어머니는 옥수수상으로 갔다. 나는 거대한 인간 모형의 옥수수 동상 옆에 서 있는 어머니와 링고의 사진을 찍었다. 여행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는 데 어머니와 링고는 이미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미첼에서 래피드시티까지 440킬로미터를 달리면서 사우스다코타에서 눈에 띈 것은 광활한 해바라기 밭, 나무가 별로 없다는
점, 엄청난 수의 광고판이었다. 페인트를 칠해 만든 수백 개의 간판을 지나 월드럭 상점으로 향했다. 그때 기온이 36도였다. 이런 날씨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이 세계적인 관광 명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1931년에문을 연 월드럭은 차가운 얼음물을 무료로 나누어주며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의 자동차 운전자들을 끌어들였다. 우리도 얼음물을받아 시원하게 들이켰다. 월드럭 안에 들어가 여러 상점을 지나 우편엽서를 고르고 있을 때 어머니는 당신보다 엄청나게 큰 들소 모형을 쓰다듬고 있었다. 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야외 건물들 사이에 서 있는 사슴뿔을 단 커다란 토끼 모형 위에 올라 앉기도 했다. 어머니는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사우스다코타 래피드시티 외곽에서 캠핑을 하고 다음 날 드디어 첫 번째 목적지인 키스톤 블랙힐스산맥에 있는 러시모어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이 공원은 1923년 정부 차원에서 관광을 중진하려는 목적으로 구상되었다. 조각가 거츤보글럼Gutzon Borglum을 비롯한 400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14년에 걸친 작업 끝에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ion,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시어도어루즈벨트neodore Roosevelt,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등 네 명의미국 대통령 얼굴이 18미터 크기의 화강암 조각상으로 탄생했다. 우리는 이 조각상들의 높이가 얼마전에 본녹색 거인상의 길이와 얼추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원 방문객 센터에서 우리의 수줍은 어머니는 모형 전시실의 기폭 장치 막대 피스톤을 눌러대고 있었다. 피스톤을 누르면바로 눈앞의 화면에서 산이 폭발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어머니는이 장면을 보며 신이 나서 어린 아이처럼 낄낄대며 웃었다. 어머니 옆에 있던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도 그 모습을 보고 킥킥거렸다. 그러더니 아이의 부모가 모두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서는 어머니가 폭탄을 터트릴 때마다 응원하며 흥겨운 분위기를연출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웃음이 우리 두 사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성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머니는 누군가의 손길과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고, 그런 점 때문에 길을 나선 첫날 내 안에 커다란 두려움이 싹튼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어머니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보살핌에 대한 대가로 가격을 매길 수도 없는 소중한 것을주고 있었다. 순수한 즐거움,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다른사람들과 어울려 함께하고자 하는 태도, 모든 걸 버렸기 때문에모든 걸 즐기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머니가 대통령 조각상을 보고 싶어했던 까닭이 미국 역사에대한 관심 때문인지, 지질학적 호기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걸 보는 것 자체가 멋진 일 같아서인지는 알 수 없
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대통령 조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국립공원 내 안내문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읽으며 마치 스펀지같이 모든 걸 흡수했다. 그리고 우리도 이내 어머니에게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하지 못했다. 우리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어머니가 해보고 싶은 일을 빼곡히 채워 넣은 목록을받을 심산이었다. 그런 목록을 입수한다면 여행 계획을 세우기가좀 더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버킷리스트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글쎄, 잘 모르겠다."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우리는 어머니한테 목록받는 걸 곧 포기했다. 때로 우리는 어머니가 여행 계획을 세우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적지 않게 실망하기도 했다. 나이 때문인가? 단어가 쉽게 생각나지 않는 건가? 그냥 꿈을 꾸어본 적이 오래돼서 꿈꾸는 방법을 잊은 건가? 그동안 생각을 묻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의견을 표현하는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머니가 이 목록에 대해 무겁게 입을 닫겁내는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은 덕분에 찾아온 기회에 감사하게 되었다. 계획이 없으면 그냥 물 흐르는 대로 가게 마련이었다. 볼것도않고, 할 것도 많았으며, 그 무엇보다 어머니는 그냥 인생을 즐기16
게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함께 더 생기 있고 충만하게 살아가며,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에 대해 "그래, 좋아!"라고 답할준비가 되어 있었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다가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인생을 즐길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 나는 15년 정도 소식이 끊겼던 친구 타냐가 어느 날 갑자기 이메일을 보내왔을 때그리 놀라지 않았다. "요즘 문득 네 생각이 많이 나더라. 잘 살고 있지? 지금 우린사우스다코타에 살고 있어. 시간 되면 네 소식 좀 전해줘." 나는 답장을 보냈다. "우리도 지금 사우스다코타에 와 있어!" 이 우연의 일치에 짜릿함을 맛보며 친구에게 지금 남편 팀과시어머니와 같이 여행 중이고, 그 내용을 자세히 보려면 페이스북페이지 ‘미스 노마 할머니‘에 가보라고 링크를 알려주었다. 우리모험의 연대기를 기록하기에는 블로그보다 페이스북이 편리했다. "어머니가 맥주 좋아하니?" 타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해왔다. "스피어피시에서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괜찮으면 우리가만든 수제 생맥주를 캠프장에 가져다줄게." 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럼 좋아하고 말고." 내 오랜 친구는 정말 수제 맥주를 싸들고 캠프장에 나타났다. 여섯 개들이 맥주 세 팩을 가져왔는데, 팀은 그 가운데 수상 경력
에 빛나는 캐니언크림에일 맥주를 유리컵에 부어 어머니에게 건다. 어머니는 맛있게 한 모금을 마시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요양원에 들어갔더라면 결코 이런 걸 맛볼 수 없었을 텐데. 정말 좋구나." 그러고는 차가운 맥주를 쭉 들이켰다. 어머니가 한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띤 것인지 깨달은 나는 전율을 느꼈다. 드디어 우리는 목적을 찾았다. 평생 동안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보살펴온 여성이 이제 생의 마지막 목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머니와 여행하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라는 사실 말이다.
오늘 하루 종일 휠체어를 밀고 다니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 이제 엄마가 너를 밀어줄게."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누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본 적이없었다. 그날 생전 처음 휠체어에 앉아보는 호사를 누렸다. 주변의 관광객들은 우리를 향해 흘낏흘낏 의아한 눈길을 던지거나머리를 저으며 지나갔다. 어쩌면 혀를 끌끌 찼을지도, 나를 막돼먹은 아들로 봤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짧은 보답을 받는 동안 라미는 비디오를 찍었고, 우리는 뭔가 기분 좋게 웃을거리가 필요한 날은 그 영상을 틀어보곤 한다. 그때 우리 곁을 지나친 사람들은 우리가 휠체어를 교대로 타보는 것 이상의 멋진 경험을 한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날 산이 우리를 안아주고, 서로가 서로를 꼭 안아주는 것을 느꼈다. 내려놓는 기쁨, 그리고 많은 노력을 통해 서로를 붙들어주는 것에서 생기는 자유의 달콤함을 맛보았다. 라미와 나는 그 후로 엄마가 내 휠체어 운전 솜씨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또는 다른 이유로 불안을 느낄 때면 어김없이 그날을상기시켜주었다. "어머니, 팀이 잘하고 있어요. 우리 옐로스톤 기억하죠?"
무나 대조적이었다. 덕분에 어머니는 앞자리 가운데에 편안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우리 셋은 어머니의 휠체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우리는 인디언 부족 수백 명이 춤추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부족 사람들이 전부 나온 듯했다. 이들은 모두 멋진 전통 의상을 차려 입고, 수십 개의 북소리와 수많은 사람들의복창에 맞추어 춤추며 율동적으로 스텝을 밟고 있었다. 춤이 끝날 때마다 당연히 이어질 법한 박수갈채도 없었다. 이들은 외부의 인정이나 상을 받으려고 춤추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쇼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일종의 정신적인 축제를 하는 곳에온 것이었다.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명상을 움직이는 기도를, 어머니인 지구와 아버지인 하늘의 융합을 보고 있었다. 대를 이어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춤을 보면서 나는 전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팀이나 나나전통이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의식 같은 게 있는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 그런 점 때문일까. 내 눈에는 세대간을 아우르는아름다움, 문화적 강단, 밝게 빛나는 사람들의 광채가 더욱 빛나어머니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어머니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옆에 있는 내게 속삭였다.
January 2016 라미 8장 비행 플로리다주올랜도
팀과 결혼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무엇이든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결정할 것을 약속했고, 둘째,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로 했다. 나중에 뒤돌아보면서 ‘그렇게 했있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우리 결혼서약이었고 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동 캠프에서 지켜야 할칠칙이기도 했다. 지난 7월 팀의 부모님 집에서 열기구 광고 스크랩을 발견한뒤, 우리 둘은 비밀 조약을 하나 맺었다. 그 조약의 내용은 어머
니와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실행에 옮기기 힘들었다. 미 서부에서 남서 쪽으로 이동하면서 모든 열기구 회사를 뒤졌지만 몸이 불편한 노인이 탑승할 수 있는 열기구는 없었다. 11월이 왔다 지나가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아직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땅에 줄로 연결한 상태로 열기구를띄워준다는 업체는 있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머니는 정말 날고 싶어했으니까. 몸이 불편한 노인이 탈 수 있다는 곳도 있었지만 그런 곳에서 말하는 열기구도 바구니 안쪽에 앉을 의자가 없었다. 어머니의 체력으로는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바구니 안에 앉을 자리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바구니 안쪽에 앉을 의자가 있다고 해도 어머니가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수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어머니의 체력으로 발판을 딛고 안으로 들어가는 게 가능할까? 바구니에 문이 달려 있어서 휠체어를 밀고 그대로 들어갈 수있는 그런 열기구는 없을까? 계속 물음표만 늘어갔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해보았다. 바구니 안에 의자를 하나 실어서거기에 앉아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안전할까? 하지만 결국 가장 큰 문제는 바구니 안에 탑승하는 일이었다. 나는 계속 인터넷을 검색하고 열기구 회사에 전화를 했지만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불편한 몸도 문제였지만 우리의 계획도 아직 불확실했다. 이 넓은 땅 어디에서 탈지그리고150
언제 탈지도 애매했다. 우선 장소는 겨울을 보내기로 계획한 플로리다에 집중해서 찾아보기로 했다. 플로리다 데스틴 근처의 헨더슨비치 주립공원 캠프장에 천막을 쳐놓고 앉았다. 발밑에서는링고가 낮잠을 자고 있었고 그동안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해대기 시작했다. ‘처음 몇 곳은 아예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마침내 통화음이 가자마자 받는 곳이 하나 있었다. 톰슨에어의 제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전화기 너머로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른 게 아니라 어머니와 같이 열기구를 타려 하는데 어머니 나이가 올해 아흔이세요. 인터넷에 뜬 사진을 보니까 바구니안에 의자도 있던데, 자세히 문의 좀 하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 근데 그보다 먼저 이렇게 나이 많은 분이 열기구를 타려고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인가요?" 나는 단숨에 두서없이 전화를 한 이유를 댔다. 그리고 곧 이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제프라는 사람과 친구 같은 수다를 떨었다. 세프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가완디 박사가 ‘독립심과 ‘안전‘이라고 하는 주제에 대해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나이 들고 아픈 사람을 대할 때 가장 저지르기 쉬운잘못은 단순히 더 아프지 않게, 또는 더 이상 다치지 않게 오
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은 그 이상의 것을 중요시한다.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나갈 수 있는 기회가 이들이 의미 있는 인생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이렇게 쓰고 있었다. 몇달 전 그 구절을 보았을 때 "맞아! 그래!"라고 무릎을 치며 읽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제프가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길 바랐다. 어머니 같은 분이 열기구를 타는 일이 너무 위험하진 않은지 정직한 답변을 듣고 싶었다. 나는 이 모험이 어머니를위험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추억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어머니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제프가 열기구를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는지 전화선을 타고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열기구와 관련된 본인의인생 이야기를 들뜬 목소리와 확신에 찬 어조로 들려주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열기구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제프와 그의 가족이라면 어머니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거라는느낌이 들었다. 그는 가장 최근의 이력으로 미국 열기구 협회에서 인정하는 최고 열기구 조종사 인증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인증을 취득한 사람은 미국에서 32명밖에 없다고 했다. 제프가 진점으로 열기구를 좋아한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우152
리 가족의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다고 확언했다. 그와 통화를 하면서 ‘와, 이거 정말 할 수 있게 되려나 봐.‘라는 희망이 점점 커져갔다. 제프는 자기네 가족의 열기구 회사가 세운 안전 기록에 대해기술하며,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 열기구는 다른 데 것과 달라요. 바구니 안에 긴 의자가놓여 있어요. 어머니가 불편해하실 게 없습니다. 아무런 문제도없을 거예요." 이렇게 첫 번째 장벽은 해결되었다. 나는 큰 숨을 들이켜고 다음 질문에 들어갔다. "그럼 바구니 안에는 어떻게 들어가죠?" "걱정 마세요. 다 들어가는 방법이 있으니까. 제가 들어가게해드릴게요." 제프가 말했다. 그리고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나를 다독이며계속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몸무게가 300킬로그램이나 되는 거구 손님도 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깃털ㅊ 가볍다면서요. 문제없어요." 마침내 나는 날짜를 잡았고, 팀과 함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날 어머니에게이 소식을 공개하기로 했다. 며칠 후, 크리스마스 장식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기 위해 상점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팀에게 "어머니가 아직도 열기구를 타
고 싶은 마음이 변함없어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 검소하게 사는습관이 몸에 배인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통 열기구 타기와 같은 ‘별난 모험에 큰돈을 들이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지불할 가치가있다고 생각했다. 팀과 나는 풍선과 두꺼운 종이, 테이프를 이용해 작은 열기구모형을 만들었다. 조그마한 열기구 바구니 안에 ‘열기구 승차권‘ 도 만들어 넣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걱정은 사라지고 아이와같은 흥분과 즐거움으로 들떴다. 우리는 정말 멋지게 그날을 준비하고 싶었다. 열기구 타기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오랫동안 바라던거였고 이제 그 꿈을 실현하려는 거였으니까. 크리스마스 날 아침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여느 집 부모들처럼 팀과 나도 킥킥거리고 속닥거리며 바쁘게 준비를 마치고, 어머니가 일어나기 전에 식탁 위에 우리가 만든 열기구 모형을 걸어두었다. 오전 9시 정각이 되자 어머니 방의문이 열리고, 어머나는 아버지가 함께 살 때 크리스마스만 되면 늘 그랬던 것처럼산타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우리는 <위위시 유어메리 크리스마스크We wish You a Merry Christmas)라는 캐럴 대신에 피프스 디멘션Downsic의 높이, 높고도 멀리 Up, Upand Away〉를틀었다. 현악기들의 연주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클라이맥스에 다다르254
쭈그러들어 있던 나일론 뭉치가 우리 눈앞에서 7층짜리 건물크기로 살아나고 있었다. 풍선의 무지갯빛 줄무늬는 마치 아름답게 떠오르는 일출의 빛깔에서 하나씩 색을 가져온 듯했다. "자, 우린 준비 다 됐습니다. 미스 노마도 준비되셨나요?" 제프의 어머니 코니가 밴 차량의 문을 열고 노래하듯 외쳤다. ‘준비됐어요. 그런데 바구니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죠? 내가저길 넘어갈 순 없을 것 같은데요." 어머니는 큰 소리로 물었다. 그때 글렌이 어머니에게로 다가왔다. 헐크 같은 덩치의 영국남자가 옆에 다가서자 어머니는 더 작아 보였다. 그는 허리를 굽혀 멋진 파란 눈을 어머니에게 들이대고 매력적인 영국 억양으로 이렇게 물었다. "제가 한번 번쩍 안아드려도 될까요?" 곧바로 어머니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글렌은 어머니를 가뿐히 안아 올려서는 바구니 안에 ‘퐁당‘ 내려주었다.(나중에 들은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면.)일단 모두 자리를 잡자, 한바탕 실컷 웃고 나서 우리는 마지막안전 점검을 하며 비행 준비를 마쳤다. 나에게는 세번째 열기구탑승이었다. 이전에는 열기구를 타는 동안 멋진 경관을 보느라정신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어머니를 제일 많이 지켜보게 될 것잡았다. 어머니의 눈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시각에서 세상을바라보고 또 어머니의 가슴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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