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대장부

망령된 말이라면 종일토록 입 밖에 내지 않고 망령된 생각이라면 죽는 날까지 떠올리지 않는다면, 비록 남들이 그를 일러 대장부라 부르지 않더라도 나는 그를 일러 대장부라 말할 것이다.
조급하고 망령된 생각을 오래도록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절로 꽃이 필 것이고,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오래도록 입에 담지 않는다면 절로 향기가 날 것이다.


서쪽 문 위에 써 붙여 두었다는 잠언 (箴言) 형식의 짧은 글이다. 이덕무는 이 글을 문 위에 붙여 두고 그것을 자기 삶의 규율로 삼았을 터이다. 마지막 문장이 참 맑고 담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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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헐뜯지 말라

입에 올리는 사람마다 헐뜯어 그의 입에 온전한 사람이 없는 자는 결코 길한 사람이 아니다.
(《일득록》13, 인물3)

함부로 말하는 자신을 탓하라

언어로 한때의 쾌감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비록 미천한 마부에게라도 이놈 저놈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일) 15. 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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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0년 11월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1980년 1월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는데, 국어 교사이자 젊은 소설가였던 아버지가 수도에서 글만 쓰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며 직장을 그만둔 것이 계기였다. 
나무와 흙으로 지어 검푸른 기와를 올리고 문과 창문에는 유리 대신 하얀 종이가 발라진 정든 한옥을 떠나,
서울 외곽의 수유리 언덕에 있는 양옥집으로 옮겨갔다. 가족 모두가 새로운 삶에 차츰 적응해 가던 5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 전해인 1979년 10월, 십팔 년 동안의 군부 독재를 이끌었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서울의 봄‘이라고 불린 그 시기를 틈타 또 한번의 쿠데타를 일으킨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마침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불과 4개월 전, 사소하고 다소 즉흥적인 이유로 나의 가족이 떠나온 도시, 내가 태어나 유

년을 보낸 바로 그곳, 그때까지 그저 작고 평범한 교육 도시였을뿐인 그곳에서 계엄에 불복종하는 항쟁이 일어난 것은 그다음날인 5월 18일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 뒤 오후 한시, 수많은 시위 군중들이 모인 도청 앞 광장에서 군대는 집단발포를 했고, 이후 생존을 위해 시민들이 무장하며 ‘광주 공동체‘가 태어났다. 짧고 평화로웠던 시민 자치가 이루어지던 도청으로,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되돌아온 것은 5월 27일 새벽이었다.

신군부가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를 제외한 다른지역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을 폭동이자 내란으로 이해했다. 그리나 나의 가족은 광주에 친지와 친척, 친구들을 두고 왔기 때문에 그 일의 의미를 처음부터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학살이자 항쟁이었던 그 열흘의 시간. 평범한 사람들이 총상자들을 살리기 위해 끝없이 줄을 서서 헌혈을 하고, 시장에서 음식을 나누고, 무고하게 살해된 자들을 위한 장례를 날마다 함께 치르며 버텼던 절대공동체 

어른들은 우리 남매에게 말했다. "밖에 나가서 절대로 그린 말을 하면 안 된다. 광주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돼." 
그렇게 그 일은 나에게 영영 숨겨야 할지도 모를 무거운 비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내가 문득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 곧 이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우리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여름으로조차 끝내 넘어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것은 어떤 정치적 각성이라기보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후 이 년이 흐른 1982년, 아버지가 광주에서 사진집 한 권을 가져왔다. 증언을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만들어 유동시켰던 책이었다. 이때의 기억을 나는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 이렇게 썼다.

그 사진을 아버지가 집으로 가져온 것은 이 넌 뒤 여름이었다. 누군가를 조문하러 그 도시에 내려갔다가 터미널에서 구했다고 했다. () 어른들끼리 사진을 돌려본 뒤 무거운 침묵이 흘렸다. 아버지는 그 책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방의 책장 안쪽에, 책등이 안 보이게 뒤집이 꽂아놓았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므여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밭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지, 검으로 깊게 내리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나의 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난 서울의 여름, 이상한 열정으로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고 있는 열두 살의 내가 있다.

그건 평범한 동화책이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서는 놀랍

게도 처음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엌의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픈 소년 칼에게 그를 사랑하는 형 요나탄이 말한다.

네가 죽으면 하얀 새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거야 나는 너를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얼마 뒤 집에 불이 나고, 칼을 입고 뛰어내린 요나탄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과연 하얀 새가 되어 창가로 날아온 요나탄이 들려준 말대로 뒤이어 빵으로 숨을 거둔 칼은 낭기열라라는 아름다운 세계에서 건강한 몸으로 다시 눈을 뜬다. 
그러나 그곳은 아름답기만 한 세계가 아니다. 
들장미 골짜기의 일이라는 무자비한 독재자가 괴물 카틀라의 힘을 등에 업은 채 사람들을 지배하고 핍박한다. 이웃한 벚나무 골짜기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그에게 맞서는데, 요나탄은 ‘사자왕‘이라는그곳에서의 별명대로 용감하고 순정하게 자신의 몫을 다해 싸우는 중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싸움의 과정에서 연약하고 겁 많은 칼이 서서히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 ‘사자왕 칼‘이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일인칭 화자인 칼이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으므로, 처음부터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그를 이해했다. 
형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과 믿음,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까지.

거기에 더해, 칼이 관찰하는 독재자 일의 모습. 그가 조종하는 살인의 화신 카라, 그에 맞서 연약한 사람들이 연대하는 과정

이 어째서인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이 결국 승리하기는 하지만, 그 싸움의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반군의 지도자 오르바르만은 옳지 않는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불길한 예감을 기억한다. 그 어두운 감과 폭력의 기억으로 그늘진 그러나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세계, 낭기얼라에서 소년들이 다시 죽음의 형식으로 함께 떠나가는 마지막 장면을 읽다가 어느새 해가 져서 캄캄해진 내방의 서늘한 벽에 기대앉아 오래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

그후 삼십여 년이 흘러, 오슬로의 여행을 앞두고 이 책을 다시 완독한 지금에야 비로소 내가 왜 연도를 착각해왔는지 깨달았다. 

나의 내면에서 이 책이 80년 광주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1980년 아홉 살의 내가 문득 생각했던 그 여름을 이미 건너지 못했으므로 가을로도 영영 함께 들어갈 수 없게 된 그 도시의 소년들의 넋이 그로부터 삼 년 뒤 읽은 이 책에서 두 번의 죽음과 재생을 겪는 소년들에게로 연결되어 내 몸속 어딘가에 새겨졌다는 것을 

마치 운명의 실에 묶인 듯. 현실과 허구. 시간과 공간의불투명한 벽을 단번에 관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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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알파벳 외에 완벽한 문자 체계를 하나 더 꼽는다면, 혜안을 가진 통치자 세종대왕이 15세기에 창제한 한글을 들 수 있다. 
당시백성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문자 체계를 배우지 못하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대왕은 누구든지 글을 배울 수 있도록 구어를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인 형태로 옮겨 놓은 고도의 규칙성을 가진 알파벳 설계에 착수했다. 심지어 세종대왕의 한글 매뉴얼을 작성한 학자가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에 다 배울 수 있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도 열흘이면 깨우칠 수 있다.‘라고 설명할 정도였다. 

보다 많은 백성들이 글을 읽고 쓰게 하겠다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목표는 성공적이었다. 한글은 몇가지 중요한 언어학적 특성으로 볼 때 배우기가 매우 쉽다.

첫째, 한국어 구어는 단순 음절과 음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겹자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글자 하나가 곧 음절이 된다. 하지만 그 방식이 매

우 특이하다. 한글에서는 2~4개의 문자화된 음소가 사각의 틀 안에서 합쳐지고 그렇게 합쳐진 글자들은 좌우, 상하. 어느 방향으로든 배열되고 읽힐 수 있다. 
이렇듯 음절이 시각화되기 때문에 아이들은 글을 읽을 때 보다 쉽고 보다 큰(보다 굵은) 언어의 단위를 배우게 된다. 
둘째,
멜버른 대학의 김지선과 크리스 데이비스(Chris Davis)가 자세히 설명한 것처럼 한글은 10개의 기본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음이냐 자음이냐에 따라 형태가 차별화된다. 
셋째, 한글의 자음문자는 조음되는 발음기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특히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영어와 달리 한글은 문자와 음성이 매우 ‘투명한‘ 대응 관계를 이룬다. 훈민정음(원문에는 ‘한글‘로 되어있음-옮긴이) 창제 당시에는 상징과 말소리 사이에 거의 완벽한 대응관계가 성립했으나 구어가 진화함에 따라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부 단어의 철자에 고어와의 연관 관계가 반영되는 일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특성이 멋지게 결합된 한글은 무엇보다 글을 처음 배우는 이들이 매우 쉽게 학습할 수 있는 문자 체계다.

이제 다시 고대 그리스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대목에서 인지과학자와 언어학자들이 미스터리로 생각하는 몇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그중 하나가 이 장에서 제기하는 두 번째 중요한 질문이다.

소크라테스의 항변, 플라톤의 말없는 반항.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소크라테스 자신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설명되어 있는 이유에 따르면,
이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이해 과정을 단락()시켜 지혜에 대한 거짓 자만심을 가진제자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누스바아리스토텔레스 대에 이르러 고대 그리스 세계가 구어 교육에서독서의 습관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레드릭 케년 경

수수한 옷을 입고 소박하게 살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라는 이름의 고귀하지만 나태한 말의 잔등을 ‘콕콕 찌르는 등에 (gadfly)‘라고 칭한 남자. 퉁방울눈에 불룩 튀어나온 이마, 독특한 외모를 지닌 그 남자는 안마당에서 제자들에 둘러싸인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지식 그리고 ‘내성(內省)하는 삶(examined life)‘의 깊은 중요성에 대해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아테네의젊은이들을 향해 자기 자신을 다 바쳐 평생 동안 ‘진실‘을 성찰해야 한다면서 눈부시게 설득력 있는 훈계를 했다. 이 남자가 바로 그 유명한철학자이자 스승 그리고 아테네의 시민 소크라테스다.
나는 독서하는 뇌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2000년도 더 된 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문식성에 반대하며 제기한 문제들이 21세기 초의 걱정거리와 거의 다를 바 없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구선 문화가 문자문화로 바뀌면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제기하는 위험성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걱정하던 내용이나 현재의 아이들이 디지털 세계에 몰입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근심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여기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우리는 현재 매우 중요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문자가 디지털 및 비주얼 문화로 옮겨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기원전 5세기와 4세기를 일종의 창이라고 생각한다. 그 창을 통해 들여다보면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 못지않게 비범한 또 하나의 문화가 주류 커뮤니케이션에서 다른 새로운 모드로 불확실한 전환을 하는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21세기의 구술 언어와 문자 언어의 위상을 점검하는 데 우리를 도와줄 사상가로 ‘등에‘와 그 제자들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다. 

소크라테스는 통제되지 않은 문자 언어의 전파를 통렬히 비난했다. 
플라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한 입장이었지만 문자 언어를 사용해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는 구술 대화를 기록했다. 
그리고 세사람 중 연배가 가장 낮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독서 습관‘에 몰입해 있었다. 
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의 명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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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천막이라는 도상을 통째로 가져와서 매슬로가 욕구단계설이라는 사상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통용되고있다. 
이렇게 무척이나 매력적인 생각의 틀에서 살펴보면 피라미드 모양은 실제로 천막 모양이고, 블랙풋족의 천막에 있는 줄무늬 모양 디자인은 위계질서상의 단계를 반영한다. 

바로 이 때문에 헤비 헤드와 카이나이학의 창시자 나르시스 블러드가 시크시카에서 지냈던 메슬로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가설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블랙풋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데에 천막을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였다. 아마도 결정적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처음에 매슬로는 피라미드모양을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피라미드 모양은 찰스 맥디미드라는 심리학자가 1960년 비즈니스 호라이즌스에 신음 글「돈은 어떻게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가」에 사용하고자 특별히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신 메슬로 아이콘으로 만들어낸 것은 심리학이 아니라 관리 연구 분야였다. 매슬로식 개인의 관리연구 버전은, 공동선에 기여하기보다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한 뒤에야 이상적인 노동자가 되는 작업에 착수할 수있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앞선 장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우리의노동 페르소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무엇을 생산할 수 있는가와 거의 전부 연관이 된다. 프레더릭슬로가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작은 단위로 깎아내어 효율성

을 높이겠다는 일념으로 일분 일초를 이리저리 배치했다면, 판리 연구는 매슬로의 위계질서를 이용해서 일터라는 기계에 있는 톱니의 최고의 건강 상태와 생산성을 확보했다. 물론 그 톱니는 바로 우리다.

욕구단계설은 관리 연구 전공 서적으로 건너가면서 독자적인 생명체가 되어서, 서양의 자본주의적 이상의 복합체가 되었다. 매슬로가 만들어내려던 것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관리 연구분야에서는 위계질서를 계단식으로 바라보아서, 인간의 욕구란일종의 컴퓨터 게임과 같다고 생각했다. 한 단계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뒤에 다음 단계로 올라서야 하는 게임 말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욕구단계실을 시험해본 사람들은 행동이란 분석심리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의식적 욕망의 결과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보상이나 강화에 따라 형성되기만 하는 것도 아니며, 내면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욕망에 따라서도 일어난다는 매슬로의 새로운연구를 대단히 높이 샀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다시말해, 1970년에 매슬로가 사망한 뒤로 자본주의는 인간 행동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결합해 경영학이라는 형태를 갖추었다. 경영학의 목표는 우리 사회의 유용한 일원이 되도록 힘을 실어주는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최대한 많이 일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관리 연구 분야에서 개인이란 보다 광범위한 사회의 대리자다. 한 개인이 자아를 실현하면, 사회 전체가 자연스럽게 이득을

본다. 설령 그 모든 개인이 사회 전반의 집합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아무런 행동도 안 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블랙풋족의 철학은 이보다 더 크고 넓다. 블랙풋족의 철학은 사람들을 정해진 역할에 붙들어 놓고 더욱 복잡해지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도 뒤떨어지지 않도록 합심하는 사회와 관련이 있다. 

차를 소유하는일은 뒤처지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을 따라잡으면서, 내년에는더 크고 좋은 차를 살 수 있도록 가족이나 친구들과는 동떨어진채 일하는 데에만 온 시간을 쏟는 일이 아니다. 자동차는 이동하는 데 쓰는 물건이다. 서양에서 사회란 개별적이고 고립된 성과가 되었다. 프로이트 같은 서양인들에게 다른 사람들이란 곧 문제였지만, 블랙풋족에게 다른 사람들이란 곧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다.
블랙풋족은 개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공동체가 개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였다. 사회철학이라는 관점으로바라본다면, 이들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 따라 작동하는 사람들이다. 서양은 결핍 모델에 따라 작동한다. 한 사람은 학위를취득하는 것처럼 일종의 사회적인 성과를 보여주거나 또는 재산을 축적해서 사회적인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노력을 통해 사회 속 위치를 높인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능력주의 사회를 이루는 완벽한 기초인 것만 같다. 모두가 평등한 만큼 열심히 노력하면 그에 따라 성취를 이루고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

서 사상이 발전하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한강 한 장 살펴보았듯이. 서양에서는 결코 모든 것이 평등하지 않다. 우리가 같은 배를 타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하다. 서양에서 실패하거나. 순응하기를 거부하거나, 사회경제적인 제약 때문에 순응할수 없는 사람들은 열등한 사람 또는 완전한 실패자라는 취급을받는다. 
노숙자들, 장애가 있든, 또는 다른 방식으로 주변화되었든 간에, 문명이라는 게임에서 진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매슬로는 시크시카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가치를 얻어낼 필요가 없는 사회를 보았다. 그 가치는 처음부터 존재한다고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자격을 부여받은 상태로 태어났으며, 그기준에 맞춰 살아갔다.

라이언 헤비 헤드는 이렇게 말한다. "제일 꼭대기에 있는 부부인 자아실현을 보면, 이 모델은 거의 들림없이 블래풋 공동체에서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매슬로의 생각은 그가 그곳에서 6주를 보내는 동안 바뀌었으며, 남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블랙풋 공동체에서는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이며,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관념은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 할애했습니다."
매슬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되고자 노력한때 가장 행복하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관리 매뉴얼에 나오는 매슬로의 주장은 그렇다. 실제로 매슬로가 얘기한 내용은 달랐는데 관리 매뉴얼에는 이런 내용이 실리지 않았다. 매슬로는 블랙

풋족의 사회와 문화적 지혜를 바탕으로 개인적인 성취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개인의 만족은 보다 넓은 공동체에기여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위계질서상의 한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 자유롭고 자아를 실현한 개인이되기보다. 개별적인 자아를 초월해서 사람들과 주변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캐나다 토착민인 기트산족의 일원이자 활동가인 신디 블렉스톡은 이렇게 설명한다. "캐나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일곱 세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바탕으로 바라봅니다. 이는 곧 한 사람의 행동은 과거 일곱 세대의경험에 영향을 받으며, 앞으로 일곱 세대에 걸쳐 끼칠 영향을 고러해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블랙풋족의 세계관에서 개인이 지닌 진정한 힘이란 공동체의 집합적인 힘에 기여하는 것이다.


삭제된 진실

매슬로가 시크시카에서 보내면서 관찰했던 또 다른 점 하나는블랙풋족의 이웃이었던 백인 정착민들의 노골적인 인종차별이있다. 출입이 제한되어 있던 블랙풋족의 땅을 앞서 몇십 년 동안끊임없이 침범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동안 번성해왔던 블랙풋족의 소 떼를 직접적으로 희생시켰고, 블랙풋족의 영

토를 임대해 백인의 양 방목을 허가하는 새로운 법을 캐나다와 미국 양쪽 모두에서 통과시키며 이득을 보았다. 
매슬로가 보기에이 사람들은 좋은 평판을 듣지 못했는데, 이런 점이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메슬로는 이렇게 썼다. "내가 살면서 마주쳤던사람들 가운데 제일 소름끼치고 엉망인 백인들을 점점 더 알아갈수록 점점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명인이라는 백인들은 그렇게 저열한 행동을 하는 반면에, 이른바 야만인들은 딱 보기에도 정신적으로 발달한 상태에 이른 것이 어떻게 가능했던것일까?
이런 모순은 당사자인 토착민들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점이었다. 예를 들어 라코타의 치료 주술사였던 존 파이어 레임디어는 이 점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백인 형제들이 우리를 문명화하러 찾아오기 전, 우리에게는감옥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자도 없었습니다. 감옥이없는데 범죄자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자물쇠나 열쇠도 없있고, 그러니 강도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말이나선박이나 이불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그것들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비문명적이어서 개인의 소유물에 그다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가지고 싶어 하는 까닭은 오로지 나눠주기 위해서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으니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측

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문법도, 변호사나 정치인도 없었으니 사기를 칠 수도 없었습니다. 백인들이 찾아오기 전 우리는 정말로 나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본적인 것들없이 우리가 어떻게 어울려 지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운명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라는데 말입니다.

매슬로가 블랙풋족에게 받은 영향은 어쩌다 지나가는 말이라든가 기껏해야 각주 외에는 그의 책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매슬로는 어서 자신의 사상의 원천이 블랙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일까? 여러분이 매슬로였다던 이떻게 행동했을까? 몇 세기에 걸쳐 토착민들의 입지는 법적인 시위로 보거나, 할당된 땅으로 보거나, 전반적인 인간성이라는 영역에서나 계속 줄어들었다. 그런 와중에 심리학이라는 진지하고 문명적인 학문에 혁명을 불러일으킨 사상을 블족에게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얘기한다면? 매슬로는 차라리 개와 얘기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매슬로가 자아실현에 관한 아이디어와 시크시카에서 보냈던 시간의 연관성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 무척애를 썼다는 생각이 든다. 매슬로가 얘기하는 대로라면, 영감은훨씬 나중에 받았다. 1938년 시크시카가 아니라, 1941년이 끝나가던 무렵에 번개처럼 갑자기 내리쳤다고 말이다.

어느 날 진주만 작전 직후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인간의 본성과 증오, 전쟁과 평화, 그리고형제애를 이야기하는 평화 협상 테이블을 떠올렸다. 나는 군대에 입대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바로 그 순간, 평화협상 테이블을 위한 심리학을 발견하는 데에 여생을 바쳐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평생을 뒤바꾼 순간이었다. 인간은 전쟁, 편견, 증오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존재라고 증명하고 싶었다.

진보라는 가짜 행진을 멈추고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학생 하나가 문명의 첫 번신호를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자. 한 가지 고고학적 사례를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회복이 된 인간의 대퇴골, 즉 허벅지 뼈였다. 마거릿은 이를테면 문자에서 예술, 민주의에 이르는 이른바 그 모든 문명의 문화적 발전이나 기술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고고학적 기록이 오래전 사람들이 서로를 대했던 방식에 관해서 우리에게 어떤 내용을 알려줄 수 있는지에 주목했다. 어느 동물에게나 부러진 다리는 큰 문제다. 걸을수 없다면 사냥을 하거나, 식량을 채집하거나, 위험한 상황에서도망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리가 부러졌던 개인이 다리를 치

료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를 고고학적 기록에서 찾아낼 수 있다면, 이는 문명적인 사회의 증거가되는 것이다. 설령 누군가가 그 사회에 필요한 일을 직접 거듭수 없는 경우라도 사람들이 서로를 돌봐주는 사회 말이다.

이 책에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닌지가 명확하지 않은 일화들이 종종 등장한다. 앞서 소개했던 간디의 일화처럼 말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간디의 일화 같은 이야기들을 자세히따져보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진위 여부를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이런 일화들이 사실이라 단정 짓기 어렵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일화들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놀라울 정도로 계속 회자된다. 이렇게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일화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미드의 일화다. 
이는 어느 정도는 이 이야기가 명백하게 정치적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20세기에 인류학이라는 분야를 새로 쓰려 했던 새로운 세대의 인류학자라는 학술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속에 미드를 데려다 놓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드는 프랜츠 보이스 곁에서 공부했던 연구자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루스 베네딕트와 함께 작업했고, 빈곤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여성의 권리를 지지했던 대중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대퇴골 이야기는 미드의 이미지와 확실하게 맞아떨어지며, 내가 완전히 동의할 수 있는 세계관이다. 여기에 빠져 있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권위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여러분에

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처럼. 미드가 상대하는 과학계도, 그러니야만인과 문명인 사이의 격차를 점점 더 공고하게 만들어나가던 인종 과학이라는 과학계도 마찬가지로 정치적이었다. 그저 정치적이지 않은 척을 했을 따름이었다.

미드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사려 깊고 헌신적인시민 소수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점을 결코 의심하지 말라. 실제로 늘 일어났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미드가 했든 다른 사람이 했든 상관없이 옳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두루 고려한다면, 이 변화가 더 나은 모습을,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분명히 밝혀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슬로부터 아이티 사람들, 역사에 남을 만한 베냉왕국의 금속공학자들과 예술가들,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
하우데노사우디와 잉카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 등장한 사람들의 수많은 생각은 문명으로 가는 길에 잃어버렸던 강력한 생각들이었다. 어떤 비용을 치르는지는 패널지 않은 채, 성장과 진보라는 이상을 밀고 나아가는 길에 잃어버린 생각들이었다. 만약이 기트산족이 그랬던 것처럼, 향후 일곱 세대에 어떤 영향을 씨실지를 우리가 고려했더라면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핵폭탄을 개발하는 일을 막을 수가 있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서양에서는 진보의 행진, 그리니까 문명의발전이 시스템 안에 너무나 깊숙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퀀텀(양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많지 않다. 200년쯤

전에는 퀀텀에 관한 생각은 고사하고,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지만 퀀텀이 아니라 사람들을 다룰 때면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놓치기가 훨씬 쉽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그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확실한 고정관념을 품고 있다. 특히 문명이 비합리적이라 여기는 비서구인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앞선 일곱 세대가 지금 세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을까? 그러려면 거의 두 세기 정도를 거슬러올라가, 프랜시스 골턴. J. G. 프레이저, 존 러버, 휴 블레어, 토머스베빙턴 매콜리, 그리고 그 모든 다른 이들이 한 일을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매일 떠올리지는 않겠지만, 심지어는 이 사람들의 이름조차도 모르겠지만, 이들의 생각은 여전히폭발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겉이 넘쳐난다.
헤비 헤드가 짚어주었듯이, 매슬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자전혀 다른 연구자가 되어 시크시카를 떠났다. 다른 숱한 학자들처럼, 그리고 심지어는 아주 살짝 더 젊었을 시절의 자신처럼 사회적 지배라는 개념에 더 이상 전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서로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적인 성숙함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두 세계관의 핵심적인 차이란 변화의가능성을 어떻게 그리는가‘라고 느껴진다. 매슬로가 인종차별적인 백인 이웃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블랙에게 물었을때, 블랙풋족의 원로들은 그 사람들이 완전히 발달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 백인들은 니타피타피niitedpicapi가 아니었다. 헤비 헤

드는 이 말이 "완전히 발달한 사람, 또는 도착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블랙족이 맥인 이웃들을 발달하지 못했다"
라고 설명한 것을. 일부 사람들은 문명화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다양한 단계에 있다는 서양 인류학의 개념을 미러링한 것이라고 단순히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한 블랙풋족의 철학은 사람들을 단 한 가지 발전 단계에 못 박하두지 않는다. 

됨됨이는 나면서부터 결정되지 않는다. 변화는가능하다. 매슬로 덕분에 사람들을 우리 사회의 개인들을 파도위에서 하릴없이 표류하는 것처럼 여기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도중에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매슬로 본인마저도 자신이 고안한 중요한 개념을 완전하게 파악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사회적 지배라는 낡은 세계관으로 돌아가 프렌시스 골턴을 연상케 하는 우생학적인 생각들을 뱉어냈다(비록개인적으로 공책에 써둔 내용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요즘에는 ‘개인주의‘라는 말과 ‘만연하다‘라는 말이 흔히 같이 붙어서 쓰인다. 이런 표현법의 함의는 바로 우리의 자기중심성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나 전반적인 사회에 일종의 위협이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개를 숙이고 노동하는 자본주의의 생신적인 부품이 되는 편이 낫다. 운명에 따라 정해진 대로 말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해질 것이며, 안전하고 문명적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연히 이런 생각에 이르지는 않았

다. 어떤 식으로든 간에 이른바 서양의 진보와 발전이라는 환상너머를 보아야 하며, 세상을 사고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방식을 향해 눈을 떠야 한다. 그저 자기 자신만 바라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내용을 바탕으로 삼아 자기 자신에게 점점 더 좁은 한계를 설정하기보다는 무언가 더 크고 나은 것의 일부가 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상상하기 시작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되어라. 그렇지만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렇게 해야 문명과 같이 우리를 가르는관념에서 벗어나,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일에 초점을 맞춰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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