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식을 키우며 손도 못 쓰던 과거와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지금을 비교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로 인간은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 행복론에 입각해 삶을 살아가는 거야"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어떤 부모가 아이를 먼저 죽게 하고 싶겠는가?
나는 "개별 상황으로 전체를 말하는 게 옳은 것인가 싶어.
인류가 발전한다는 생각을 나는 거부해.
경제 발전이란 말 속에 내재된 자본주의 야수성을, 그 포악성을 잘 알잖아.
가톨릭과 기독교가 세계에 저지른 수많은 폭력들을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철저히 이용당한 거지.
그들의 탐욕과 욕망에 그들이 황금률을 이용해 톡톡히 사업 수완을 부린 거지. 난 상대적 행복론이 황금률의 빵부스러기란 생각이 들더라고.
여하간 난 공자님, 노자님이 너무 좋네. 놀라워. 그 시절에 그런 사상을 갖고 인간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이" 했다.
남편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당신과 나의 생각 차이가 동서양 사상의 차이일 줄이야?"
예수님의 황금률과 공자의 사상이 우리 집 거실을 배회하다 지나갔다.
그분들이 거실을 배회하다 가셨다 하여 우리 일상이 달라지겠는가? 단지 우리의 다름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그것이 행복할 뿐이었다.
행복이 무엇인지 서로 몇 년간 싸우다 생각의 다름. 다름의 근원을 알게 된 것뿐이었다. 아직도 우리는 행복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 죽을 때까지 싸워볼 일이다.
부부가 별거 아닌 것 갖고 싸운다 생각하지만 왜 싸우는지, 그 근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함께 싸워도, 함께 살아도 사실은 각자 사는 게다.
다름을 찾아내는 일은 지치는 일이다. 한 인간은 그 사회, 문화, 역사의 응축된 결과물로 존재하니, 그 존재와 함께 결혼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한 인간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의미 있는 존재이고 귀중한 존재이니, 다름을 발견하고 다름을 분석하는 일이야말로 해볼 만한 일이다.
부부가 별거 아닌 것 갖고 싸운다 생각하지만 왜 싸우는지, 그 근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함께 싸워도, 함께 살아도 사실은 각자 사는 게다. 다름을 찾아내는 일은 지치는 일이다. 그만큼 한 인간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의미 있는 존재이고 귀중한 존재이니, 다름을 발견하고 다름을 분석하는 일이야말로 해볼 만한 일이다.
"그래, 거 봐.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아이들은 부모에게 먼저 상담하지 않아! 그게 일반적이야. 뭔 큰 사고를친 게 아니면, 다 자기들의 바운더리 안에서 해결이 돼. 그게 정상이야. 살아 있어도 상담은 고사하고 자주 통화도 안 하는데, 무슨! 부모는 건강하게 잘 키웠으면 다한거야."
길을 걸으며 마음속으로 ‘해리포터 시리즈의 움직이는 사진. 펜시브 같은 기억 저장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우리와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잠시 마음의 행복을 누리길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다. "가끔은 추억만으로도 위안이, 행복해지는 순간이 있지 않아? 여하간 그런 프로그램이 개발되면 난 사용한다에 한표! 내 정보를 모두 긁어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 묻고 싶을 때, 그냥 들어와 몇 초 들러 가도록 말이야." "뭐, 데이터 용량이 무한정 커지면 사용하겠지만 그걸 걔네들이 얼마나 사용하겠어? 마음을 비우고 사진이나 찍자, 여기 좋다." 말을 끝낸 남편은 셀카를 찍었다.
카카오톡 가족 대화창에 남편이 사진을 올리니 딸은 활짝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아들은 보지도 않는다. 한 시간 넘은 대화의 결과를 확인하는 데는 1분이면 족했다.
다시 성곽길을 따라 한참 걸었다. 왼편의 성곽을 따라 울창한숲길을 걸으며 수백 년 전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광활한 서울 시내는 건물로 빼곡했고, 촘촘한건물만큼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응축된 공간, 시간이 축적된 공간을 잠시 지나가는구나‘ 생각했다. 남편이 다시 말했다.
"사람이 죽고, 세상이 변하고, 변한 세상에서 사는 애들에게 우린 그냥 부모고, 지나가는 보호자야. 우리끼리 잘 살면되는 거야! 애들은 우리가 거쳐온 과거에 사는 게 아니라 미래에 사는 거니까,
아이들에겐 우리의 말이 정답일 수 없어." 남편이 말한 자식과 부모의 정의가 그날처럼 믿음이 갔던 적이 없었다.
"완벽한 DNA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력이 떨어져. 모든 존재는 불완전성을 갖고 있어야 변화에 민감하고 능동적이야. 적당히 줘야지. 다 주면 안 되는게 인생이고, 생명체의 기본이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라 부모들이 조급해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부모의 불안이 클수록 아이를 닦달하고 부모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라 외치는 것을 내가 왜 모르겠
는가?
그러니 아이들을 걱정하는 시간으로 내 인생을 보내지않기를, 나도 한 번 사는 인생임을, 나도 살아가는데 아이가 왜 못 살아가겠는가?
내가 잘 살고 부모가 행복하게 사는 게 아이들에겐 자신을 믿는 힘, 삶을 개척하는 힘을 주지 않겠는가?
자유는 생각보다 누리기 어렵다.
진정한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유는 내가 쟁취하여 나 스스로 누리도록 해야 한다.
1년에 하루 이틀 이런 자유를 쟁취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실 내가 나를 잊고 사는 게다.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자면 수도 없다. 우리 모두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관계를 맺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니 말이다.
딸아, 어떤 삶 속에서도 너를 찾고, 너를 사랑하는 소소한 너만의 방법을 만들기 바란다.
누군가 네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묻는다면 너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나예요"라고 대답했으면 좋겠구나!
절절한 사랑을 하던 때도, 갓 낳은 너를 품에 안고 있을 때도 나는 나를 사랑했단다. 모든 생명체가 이기적이듯 사랑에 있어 나의 사랑하는 딸도 이기적이었으면 한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가족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신이 나에게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내 목숨을 저울에 올리고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너희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주겠지만, 그건 내가 살만큼 살았기 때문이고, 너희들이 최소한 내 나이만큼은 살았으면 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단다.
사랑하는 딸아! ‘나의 행복‘이란 자기중심적 사고로 너의 인생을 살길 바란다.
하루 24시간 중 너만을 위한 두 시간을 만들기를 1년 열두 달 중 단 반나절, 단 하루의 시간을 스스로 선물하기를. 그렇게 너의 에너지를, 너의 행복을 너의 자유를 만들어 네 삶을 스스로 사랑하고 네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누군가 네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너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나예요"라고 대답했으면 좋겠구나!
절절한 사랑을 하던 때도, 갓 낳은 너를 품에 안고 있을 때도
나는 나를 사랑했단다. 모든 생명체가 이기적이듯
사랑에 있어 나의 사랑하는 딸도 이기적이었으면 한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가족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구의 딸이거나, 아내이거나, 엄마이거나, 며느리이기 이전에 너는 처음부터 너였단다. 너는 네가 아닌 적이 없었단다. 그러니 딸아! 자신을 사랑하며 뚜벅뚜벅 살아가며 너의 삶을 펼쳐나가길 바란다.
"매 순간 선택의 기준이 오롯이 너의 행복이기를" 눈부신 삶을 살아갈 세상 모든 딸에게, 엄마의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전하는 이야기
소리 내지 않던 여성이 목소리를 내니 사회가 시끄럽다 한다. 이타심이 없는여자, 이기적인 딸, 자식보다 자기 인생만 생각하는 아내, 대를 잇지 않고 효를 모르는 며느리라고 말이다.
수백 년간 숨죽여 살았던 여자들이 이제야 자기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내니 사방에서 이기적이라말한다. 이런 것이 이기적이라면 천만 번이라도우리의 소중한 딸들이 이기적이길 바란다. 내 사랑하는 딸과 대한민국의 수많은 딸들에게 어찌 자랐건, 어떤 남자와 결혼했건,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이건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오롯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당당한 여성으로 살기 바란다.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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