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놀라운 자유를 경험한다. 함께 음식을 만들고, 휠체어를 탄 채 운동경기를 하고,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는 법을 배운다. 
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이곳 캠프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가둬온 것이 자신의 장애가 아닌 세상 자체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더는 갇혀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캠프 제네드를 거친 이들 중 상당수가 어른이 되어 장애 차별에 맞서 싸우는 활동가가 된다. 

더 나은 세상을 한번 겪고 온 사람들은 다시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은미국 각지의 도로와 건물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고 정부와 협상하며 권리를 쟁취한다. 더 이상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얼굴이 책을 쓰며 알게 된 사람들의 모습과도 겹쳐졌다. 장애중심적 기술을 만들어가는 당사자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로 장애권리운동을 펼치는 사람들,
한국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멈춰 세운 장애활동가들.
그 많은 사람과 내가, 국적도 장애 유형도 삶의 경험도 너무나 다른 우리가 ‘장애의 경험‘이라는 느슨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문득 좋았다. 
그들이 억압에 맞서 싸운, 각자의 전선에서 세상을 바꿔온, 비장애중심 사회에 끊임없이균열을 내온 존재들이라는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그제


없던 얘기를 지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슨 성서를 만난 것도 아니다. 
그 작법서의 조언이 마음에 깊게 와닿았고, 그래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참고로 그 책은 『소설쓰기의모든 것 1: 플롯과 구조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과거와 달리 소설 쓰기에 대한 환상을 덜어낸 이후였던 것이 크지 않았나 싶다. 
십대 시절에 나는 소설을 쓸 것이라면 해리포터나『룬의 아이들』 같은 소설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리즈로 이어질 만큼 길고,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눈을 뗄 수 없는 극

대부분의 작법서가 고쳐 쓰는 과정에서 더 유용하다고생각한다. 
특히 지금 소개하는 『소설쓰기의 모든 것 5: 고쳐쓰기』는 고쳐 쓰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이 책은 총 다

섯 권의 ‘소설쓰기의 모든 것‘ 시리즈의 마지막 권으로 나에게는 시리즈 중 가장 활용도가 높았다. 
초고를 고칠 때야말로누군가의 조언이 절실한 순간이고 그럼에도 날카로운 조언에 가장 마음을 다치기 쉬운 순간이니까.

책의 1부에서는 인물, 구조, 시점, 장면, 대화 등을 수정할때 참고할 세밀한 기법들을 알려준다. 다루는 영역이 넓고 조언의 양도 방대해서 읽다보면 ‘고쳐서 쓰기에는 이미 늦었다!‘라고 느낄 수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 번에 하나를 발전시키자고 생각했다. 
한 작품에서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채우기보다는 한두 가지 요소에만 좀 더 집중해서 수정해보자고, 
2부는 ‘고쳐쓰기 최종 점검 리스트‘를 제공한다. 이 목록의 질문은 역시 완성된 초고를 옆에 두고 짚어봐야 한다.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 초고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직면할 수 있다. 
때로는 문제를 알면서도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손 놓을 때가 있지만,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다.

이런 책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된다.
 내 경우는 장편 초고를 쭉 써놓고 고치려고 했을 때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어떤 부분을 쳐내야 하고 어떤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써

저자가 경험하기를, 감정의 강도가 5단계이상이라면 ‘보여주기‘ 방식으로, 즉 장면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대화와 행동을 보여주며 전개하는 편이 낫고, 
그 아래 단계라면 ‘말해주기‘로, 빠른 장면전환과 요약으로 넘어가는 편이 낫다고 한다. 물론 매번 이렇게 수치화할 필요는 없겠으나이런 분석이 필요할 때가 있다. 

작가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다르겠지만 나에게는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는 너무 단순한조언보다는 훨씬 유용한 조언이었다.

B. 단편을 쓰는 즐거움: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SF는 단편이 유독 사랑받는 장르다. 판타지, 미스터리, 추리, 로맨스와 같은 다른 장르에서는 장편이 좀 더 대중적으로인기 있는 모양인데 SF에서는 단편 역시 장편만큼 인기가 많다. 나에게도 독자로서 SF 단편과 장편 중 더 즐겨 읽는 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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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식을 키우며 손도 못 쓰던 과거와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지금을 비교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로 인간은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 행복론에 입각해 삶을 살아가는 거야"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어떤 부모가 아이를 먼저 죽게 하고 싶겠는가?

나는 "개별 상황으로 전체를 말하는 게 옳은 것인가 싶어.

인류가 발전한다는 생각을 나는 거부해. 

경제 발전이란 말 속에 내재된 자본주의 야수성을, 그 포악성을 잘 알잖아. 

가톨릭과 기독교가 세계에 저지른 수많은 폭력들을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철저히 이용당한 거지. 

그들의 탐욕과 욕망에 그들이 황금률을 이용해 톡톡히 사업 수완을 부린 거지. 난 상대적 행복론이 황금률의 빵부스러기란 생각이 들더라고. 

여하간 난 공자님, 노자님이 너무 좋네. 놀라워. 그 시절에 그런 사상을 갖고 인간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이" 했다.

남편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당신과 나의 생각 차이가 동서양 사상의 차이일 줄이야?"

예수님의 황금률과 공자의 사상이 우리 집 거실을 배회하다 지나갔다. 

그분들이 거실을 배회하다 가셨다 하여 우리 일상이 달라지겠는가? 단지 우리의 다름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그것이 행복할 뿐이었다. 

행복이 무엇인지 서로 몇 년간 싸우다 생각의 다름. 다름의 근원을 알게 된 것뿐이었다. 아직도 우리는 행복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 죽을 때까지 싸워볼 일이다.

부부가 별거 아닌 것 갖고 싸운다 생각하지만 왜 싸우는지,
그 근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함께 싸워도, 함께 살아도 사실은 각자 사는 게다. 

다름을 찾아내는 일은 지치는 일이다. 
한 인간은 그 사회, 문화, 역사의 응축된 결과물로 존재하니, 그 존재와 함께 결혼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한 인간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의미 있는 존재이고 귀중한 존재이니, 다름을 발견하고 다름을 분석하는 일이야말로 해볼 만한 일이다.

부부가 별거 아닌 것 갖고 
싸운다 생각하지만
왜 싸우는지, 그 근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함께 싸워도, 함께 살아도 사실은 
각자 사는 게다.
다름을 찾아내는 일은 지치는 일이다.
그만큼 한 인간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의미 있는 존재이고
귀중한 존재이니, 
다름을 발견하고
다름을 분석하는 일이야말로 
해볼 만한 일이다.

"그래, 거 봐.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아이들은 부모에게 먼저 상담하지 않아! 그게 일반적이야. 뭔 큰 사고를친 게 아니면, 다 자기들의 바운더리 안에서 해결이 돼. 그게 정상이야. 살아 있어도 상담은 고사하고 자주 통화도 안 하는데, 무슨! 부모는 건강하게 잘 키웠으면 다한거야."

길을 걸으며 마음속으로 ‘해리포터 시리즈의 움직이는 사진. 펜시브 같은 기억 저장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우리와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잠시 마음의 행복을 누리길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다.
"가끔은 추억만으로도 위안이, 행복해지는 순간이 있지 않아? 여하간 그런 프로그램이 개발되면 난 사용한다에 한표!
내 정보를 모두 긁어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 묻고 싶을 때, 그냥 들어와 몇 초 들러 가도록 말이야."
"뭐, 데이터 용량이 무한정 커지면 사용하겠지만 그걸 걔네들이 얼마나 사용하겠어? 
마음을 비우고 사진이나 찍자, 여기 좋다."
말을 끝낸 남편은 셀카를 찍었다. 

카카오톡 가족 대화창에 남편이 사진을 올리니 딸은 활짝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아들은 보지도 않는다. 한 시간 넘은 대화의 결과를 확인하는 데는 1분이면 족했다.

다시 성곽길을 따라 한참 걸었다. 왼편의 성곽을 따라 울창한숲길을 걸으며 수백 년 전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광활한 서울 시내는 건물로 빼곡했고, 촘촘한건물만큼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응축된 공간, 시간이 축적된 공간을 잠시 지나가는구나‘ 생각했다.
남편이 다시 말했다.

"사람이 죽고, 세상이 변하고, 변한 세상에서 사는 애들에게 우린 그냥 부모고, 지나가는 보호자야. 
우리끼리 잘 살면되는 거야! 
애들은 우리가 거쳐온 과거에 사는 게 아니라 미래에 사는 거니까, 

아이들에겐 우리의 말이 정답일 수 없어."
남편이 말한 자식과 부모의 정의가 그날처럼 믿음이 갔던 적이 없었다.

"완벽한 DNA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력이 떨어져. 모든 존재는 불완전성을 갖고 있어야 변화에 민감하고 능동적이야. 적당히 줘야지. 다 주면 안 되는게 인생이고, 생명체의 기본이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라 부모들이 조급해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부모의 불안이 클수록 아이를 닦달하고 부모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라 외치는 것을 내가 왜 모르겠

는가? 

그러니 아이들을 걱정하는 시간으로 내 인생을 보내지않기를, 나도 한 번 사는 인생임을, 나도 살아가는데 아이가 왜 못 살아가겠는가? 

내가 잘 살고 부모가 행복하게 사는 게 아이들에겐 자신을 믿는 힘, 삶을 개척하는 힘을 주지 않겠는가?

자유는 생각보다 누리기 어렵다. 

진정한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유는 내가 쟁취하여 
나 스스로 누리도록 해야 한다. 

1년에 하루 이틀 이런 자유를 쟁취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실 내가 나를 잊고 사는 게다.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자면 수도 없다. 
우리 모두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관계를 맺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니 말이다.

딸아,
어떤 삶 속에서도 너를 찾고, 
너를 사랑하는 소소한 
너만의 방법을 만들기 바란다. 

누군가 네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묻는다면 
너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나예요"라고 대답했으면 좋겠구나!

절절한 사랑을 하던 때도, 
갓 낳은 너를 품에 안고 있을 때도 
나는 나를 사랑했단다. 
모든 생명체가 이기적이듯 
사랑에 있어 나의 사랑하는 딸도 이기적이었으면 한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가족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신이 나에게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내 목숨을
저울에 올리고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너희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주겠지만, 
그건 내가 살만큼 살았기 때문이고, 
너희들이 최소한 내 나이만큼은 살았으면 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단다.

사랑하는 딸아!
‘나의 행복‘이란 
자기중심적 사고로 
너의 인생을 살길 바란다. 

하루 24시간 중 너만을 위한 
두 시간을 만들기를 1년 열두 달 중 단 반나절, 
단 하루의 시간을 스스로 선물하기를. 
그렇게 너의 에너지를, 너의 행복을 너의 자유를 만들어
네 삶을 스스로 사랑하고 네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누군가 네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너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나예요"라고 대답했으면 좋겠구나!

절절한 사랑을 하던 때도,
갓 낳은 너를 품에 안고 있을 때도

나는 나를 사랑했단다.
모든 생명체가 이기적이듯

사랑에 있어 나의 사랑하는 딸도
이기적이었으면 한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가족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구의 딸이거나, 아내이거나,
엄마이거나, 며느리이기 이전에
너는 처음부터 너였단다.
너는 네가 아닌 적이 없었단다.
그러니 딸아!
자신을 사랑하며 뚜벅뚜벅 살아가며
너의 삶을 펼쳐나가길 바란다.

"매 순간 선택의 기준이 오롯이 너의 행복이기를"
눈부신 삶을 살아갈 세상 모든 딸에게,
엄마의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전하는 이야기

소리 내지 않던 여성이 목소리를 내니
사회가 시끄럽다 한다. 
이타심이 없는여자, 이기적인 딸, 자식보다 자기 인생만 생각하는 아내, 대를 잇지 않고 효를 모르는 며느리라고 말이다. 

수백 년간 숨죽여 살았던 여자들이 이제야 자기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내니 사방에서 이기적이라말한다. 
이런 것이 이기적이라면 천만 번이라도우리의 소중한 딸들이 이기적이길 바란다. 
내 사랑하는 딸과 대한민국의 수많은 딸들에게 어찌 자랐건, 어떤 남자와 결혼했건,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이건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오롯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당당한 여성으로 살기 바란다.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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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처럼 
네 일 내 일 따질 것도 없는,
우리 가정의 소중한 자식인데

어찌 아빠가 아이를 키울 수 없겠는가?
나이가 어리든 많든, 
남자든 여자든
내가 키워야 할 자식이라 받아들이면
잠이 부족해도,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려도,
시간에 쫓기듯 살아도 
아이를 키울 수 있다.

부부싸움,

다름의 근원을
발견하는 길

둘째가 여덟 살 즈음이었을까? 늦은 밤 우리 부부는 유리컵에 우윳빛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남편과 내가 동시에 "참시원하다!" 하며 잔을 비웠다. 
두어 잔 마셨을까? 

TV에서는
아마존의 사라져가는 부족 이야기가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독교 재단에서 부족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짓는 모습이었다.
원주민 여인의 얼굴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목이 길게 늘어나고 군데군데 올이 터져 실밥이 이리저리 풀린 티를 입고 나온 여인은 힘이 없어 보였다. 얼굴 가득 주름이 일렁였는데,
체념과 불행이 새겨진 듯했다. 힘없는 말소리와 불안한 눈빛!

색바랜 늘어난 티와 함께 나타난 여인은 묘하게도 일시에 컬러 화면을 흑백 화면으로 만들었다. 평화롭던 마을이, 아이들의 해맑던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라 말하던 아주 짧은 순간,
그녀는 분노와 원망이 한데 뒤엉킨 눈빛을 카메라 너머로 보냈다. 마을 주민은 흩어졌고, 아이들은 모두 타지로 돈을 벌러갔으며, 아직 부모 손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 까만 눈을 반짝이며 그녀 주변을 어슬렁댔다.

내레이션을 하는 유명 연예인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질문했다.
 "누구를 위한 개발일까요?" 밀림의 파괴를 획일화된 개발을, 작은 부족의 해체를, 교회와 학교의 건설을 담담하게 말하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라고 물었다. 나에게 묻는 것인지,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종교 단체에게 묻는 것인지, 아마존 부족에게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잔잔했다.

나는 혼잣말처럼 "더 배우면 더 행복해지나? 제도권 교육과 종교가 행복의 잣대인가?" 했다. 그냥 던진 내 말에 남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행복에도 단계가 있어. 절대적 행복이 아닌 상대적 행복 말이야.
 10의 행복을 기준으로 그들이 2의 행복만 알아서 2가 만족됐다고 100퍼센트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어?" 했다. 

나는 막걸리 잔을 비우며 "상대적 행복? 그건 누가 정하는데? 내가 행복하고 만족하면 그만이

지.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내 행복을 평하겠다는 발상은 뭐지?"
했다.

다큐멘터리는 끝이 났지만 우린 서로 씩씩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부부는 좀처럼 싸우지 않는다. 아이들 교육이든 시댁 문제든 친정 문제든 직장 문제든 모두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거니 하니 싸울 일이 없었다(정치 문제만 예외로 하고). 

그런데 행복에 대한 생각의 다름을 확인하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결혼하여 13년을 살았는데 무엇이 다른지 처음 알았다. 
생각의 저 깊숙한 곳, 세상을 바라보는 눈, 행복을 바라보는 차이를 발견하였으니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궁금했다. 왜 이런근본적인 시각의 차이가 발생하는지, 그 근본에 숨어 있을 철학적 논리가 무엇인지 말이다.

2016년, 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을 읽기 전까지,
늘 남편과 생각의 다름이 부딪히면 가시가 목에 걸린 듯 불편했다. 그래서였을까? 책을 읽으며 기뻤다. 내 손으로 가시를 뺄 수 있을 듯해서 말이다.
성당에서 결혼하고자 2주 속성 교리 공부 후 세례를 받았던 남편은 예수님의 황금률에 입각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누가복음 6:31)"는 말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공자가 말한 "자기 자신에게 베풀어 보아 원치 아니하는 것은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시저기이불원施諸己而不, 역물시인施)는 시각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살아온 시대는 온갖 종류의 종교, 사상, 철학,문화가 마구 뒤엉켜 있어 
우리가 무엇을 근간으로 생각하고행동하는지 우리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노자가 이리 말했다. ‘사랑하지 마라! 사랑을 하기만 하면 반드시 만들고, 세우고, 베풀고, 감화를 주고, 은혜가 있고, 함이 있다. 만들고, 세우고, 베풀고, 감화를 주면, 원래 스스로 자기를 잘 가꾸어 나가는 만물의 참모습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은혜가 있고, 함이 있으면, 사물들이 치우치게 되어 공존의 미덕을 상실한다.‘ 정말 놀랍지 않아? 몇 년 전 막걸리 마시다 내가 한 말을 기원전 500여 년 사람이 했다니 말이야"
하니 남편은 흥미로워했다.

차를 마시며 우리 부부는 생각의 출발과 지향이 다름을 인정했다. 남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낮은 목소리로 "부모가 있는데 자식이 죽어간다고 생각해봐. 당연히 살리고자 최선을 다하겠지. 그렇지만 돈도 병원도 없다면 사랑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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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아버지가 그립다.
단호한 목소리로
"딸들이 시부모께 효를 행하기도 어려운데 친정부모까지 챙기려면 얼마나 힘드냐" 하던,
딸아이를 가져 임신 6개월에 부른 배로 친정에 가니
마당의 체리 나무에서 체리를 한 바구니 따놓고
"네가 잘 먹어서 미리 따놨다. 달고 맛있구나.
실컷 먹어라" 하며 환하게 웃던 아버지가 그립다.
딸이어서 서운했다는 말이 
다 지나간 말이었으면 한다.

흐르고 욕망하고 질투하고 소멸하기도 하니, 결코 몇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 사랑은 감정이 자라고 육체의 섞임을 통.
해 우리 세대를 존속시키기도 하고 스스로 관계를 파괴하기도 하니, 날씨처럼 변화무쌍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무심코 생각하면 사랑의 기술은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니 상대에게 사랑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26년 결혼해 살아보니 그게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다. 
그러니 대충 하다 말 기술이 아니라는 데에 고단함이 숨어 있다.

 이기적이어도 보통이기적인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재미나고 요사스러운 것은,
사랑은 대상을 만나면 끝은 내가 좋아야 하되, 과정은 상대의 만족, 기쁨, 해소, 평안과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정말 해괴하기 그지없는 사랑의 기술은 한껏 기술을 사용하되, 
그게 기술로만 보여서도 안 되고, 사랑의 기술 대가의 반열에 오르려면 지치지 않는 ‘실천‘과 ‘단련‘으로 끝없이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되, 
연마하지 않은 듯 보임이 미덕이란 사실이다. 
그러니 까놓고 말하면 사랑의 기술은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지만, 
이게 결국은 ‘상대도 좋아 죽을 지경‘이 돼야 하니 ‘참 어려운 문제‘다. 
다 같이 좋은 게 어디 쉽겠나? 그게 결혼이다. 서로 사랑해서 좋자고 한 결혼이지만 둘 다 좋기도 힘들고, 사랑이 없어졌다 하여 쉽게 취소하기도 어려운 게 결혼이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상대를 사랑하고, 진정한 나를 알기 위해 상대를 알아가야 하니, 
결혼생활은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간접적 원인)을 반복하는 불교의 연기설()과 닿아있다. 
불교뿐이랴?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는 말씀을 하셨다. 남편이 이웃만 못하겠는가? 부처와 예수가 "나를 사랑하고자 해도 상대를 사랑하라" 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니 공을 이루는영혼(spirit)을 구하든 인생의 반려자인 남편을 사랑하다 보면 뭐든 건질 것 같았다. 사랑만 하면 된다니…………. 그래서 결혼하며 크게 다짐했다.

남편을 잘 사랑해 사랑의 기술을 구현해보리라.‘
왜냐하면 이게 결국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가장 강력한 방편‘이니 말이다.

생각은 참 쉽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결혼생활은 고공 외줄 타기보다 어렵다. 고공 외줄 타기는 안전고리를 걸고 몇 백미터만 가면 끝나지만 결혼은 끝도 모르고, 아이를 등에 지고,
머리에 꿈을 이고,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깔린 유교 문화에서 
배우자를 균형대처럼 잡고 걸어가는 것이니, 최상급 고공 줄타기보다 난이도가 높다.

결혼 후 남편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남편의 거울에 비친 내세계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내게 있어 결혼은 인간을 이해하는 창, 사랑을 실천하는 장, 결국 ‘나를 파악하는 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6년 즈음 살아보니 사랑은 정말 기술이 필요하다. 요즘 말로 하면 빅데이터를 축적하여 내 사랑이 어느 궤적을 지나가고 있는지 파악함과 아울러, 소소한 사랑의 기술 중 무엇이 더 필요한지 과거를 통해 현재의 실천과제를 도출해내고, 그것을 통해 가까운 미래를 보장하니 말이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상대방의 욕망과 내 욕망의 차이, 수준, 내용을 알지 못하면 사랑은커녕 현실 인식 차이로 결혼 자체가 위태롭게 되니 말이다.

결혼은 선언으로, 결혼신고서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혼은 이혼신고서로 완성되지만 결혼만큼은 혼인 서약을 했다 하여 완성되지 않는다. 결혼 속에서의 나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이기 전에 사랑을 선택한 사람으로 사랑의 기술을 연마해야 할 한 인간일 뿐이다. 지금 돌이켜봐도 결혼이란 기껏 사랑의 기술을 끝없이 연마하는 과정을 위해 최소한의 바운더리를 설정한 게 아닌가 싶다. 각자의 바운더리를 격투기장으로, 페어 경기를 하는 아이스링크로,
그저 빨리 달리기만 하는 단거리 달리기 경기장으로,

긴 호흡으로 달리는 마라톤 경기장으로 만들지는 부부가 알아서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스물다섯 딸이 결혼한다 할 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딸의 인내심이라면, 딸의 끈기라면 나보다 더 치열하게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딸아,
사랑의 과정을 즐기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너의 결혼과 사랑은 서로의 안면을 강타하여 KO패를 이끄는 격투기가 아닌, 앞만 보고 목표만을 바라머 달리기만 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닌,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힘들게 뛰는 마라톤 경주가 아닌, 호흡을 맞추고 음악에 맞춰 서로를 보듬고 아름답게 춤을 추는 페어 스케이팅이길 바란다.

다만 조심할 것은 서약으로 시작되는 결혼을 믿지 마라. 
결혼이 결말인 듯 아름답게 쓰인 동화도 잊어라. 
사랑해서 한 결혼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요구되는 긴 삶이니 말이다.

사랑의 과정을 즐기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너의 결혼과 사랑은서로의 안면을 강타하여 KO패를 이끄는격투기가 아닌,
앞만 보고 목표만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닌,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힘들게 뛰는마라톤 경주가 아닌,
호흡을 맞추고 음악에 맞춰 서로를 보듬고
아름답게 춤을 추는
페어 스케이팅이길 바란다.

오빠 신발로 타느라 너무 고생해서 
딸은 그냥 즐기게 해주고 싶있어요."
내가 부모님을 보며 밝게 말했다.
"그래, 나도 안다. 네가 맞지도 않는 신발을 들고 다녔지.
내 동생은 사줘도 타지도 않고."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도 알았다. 엄마의 그 보이지 않는 선을 말이다. 
엄마의 잘못이 아님을 안다. 
단지 엄마는 엄마의 엄마로부터 배운 대로 아들딸을 낳아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았을 뿐이다.

요즘도 시간이 나면 스케이트장을 찾아 스케이트를 탄다.
어렸을 적 맞지도 않는 신발을 신고 스케이트를 탔던 그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넘을 수 없는 선이란 없음을 되뇐다.

추운 겨울, 발에 맞지 않는 큰 스케이트를 신고 수없이 넘어지고 온몸이 젖으며 배운 것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것이었다. 발이 휘휘 도는 오빠의 스케이트지만 

신고 달리지 않으면 넘어질 일도 없음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없음을. 
넘어지지 않고서 어찌 일어나는 법을 배우겠는가? 
발에 맞지 않는 스케이트라며 꺼내 들고 빙판에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들과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잣대가 다름을 
그리도 명료하게 알았겠는가? 
나는 달릴 수 있는 한 늘 달렸고, 내가

달려가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고 넘어설 수 없음을 알았다.

어린 나는 세상의 불평등은 모르되 집안에서의 불평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그걸 넘는 방법은 나 스스로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안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것을 겨울바람처럼 명료하게 깨달았다.

넘어지다 보면 넘어지는 순간 넘어지는 이유를 알게 되고.
일어나다 보면 일어서는 순간 일어나는 요령을 알게 되니. 
세상 이치는 잔혹하지만 대가 없이 배워지지 않음을 
나는 발에 맞지 않는 오빠의 큰 스케이트를 타며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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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강연을 하러 가면 "제가 생각하는 SF가 어떤 장르인지 소개하겠지만, 사실 합의된 정의는 없습니다"라고 먼저 이야기한다. 
SF가 흔히 어떤 특징들을 지녔고 내가 좋아하는 SF의 요소들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어도 여기서부터 SF이고 저기서부터는 아니라고 선을 그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한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SF란 무엇인가‘에 대답하기 위해 온갖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하는 과정이 분명 내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SF 작가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밑천을 만든 셈이었다. 

데뷔 직후에 나는 ‘이런 게 무슨 SF냐‘는 퉁명스러운 리뷰를 종종 보았다(재미있게도 이 말은 작품에 대한 칭찬으로도 멸시로도 쓰인다). 
그 말이 신경 쓰여서 누가 봐도 SF인글을 써보겠다고 ‘SF란 무엇인가‘를 탐험하는 과정을 지나고 나니, 나는 내가 쓰는 글들이 이미 SF라는 폭넓은 세계의 어느 언저리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누가 뭐래도 이 소설들은 SF 세계의 일부였다.

첫 소설집을 쓰면서 나는 SF의 고전적인 테마들을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일에 도전해 보았다. 


과학책을 읽을 때 나는 무조건 연필과 플래그를 지참한다.
책에서 발견한 아이디어가 소설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카라플라토니의 감각의 미래』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최신 인지과학을 탐색하는 책이다. 
목차에는 우리가 흔히 감각이라고 여기지 않는 ‘시간 감각‘에 대한 챕터도 있다. 

인간의 시간감각이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기본적인 감각들을 뇌안에서 통합하고 편집하여 인지하는 초감각이자 다중감각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언젠가 이것을 소설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나중에 울산의 공중관람차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이어갔다. 관람차를 탈 때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 주위의 풍경이 멈춘 듯한 기분을 시간 감각, 시간 인지능력과 연관 지어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고 그 결과물은 「캐빈 방정식이 되었다. 
소설의 화자는 삼 년 전 사라진 언니에게서 울산 공중관람차의 귀신 출몰 소동에 대해 조사 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소문의 실체는 언니의 연구 대상이기도 했던 시간감각의 왜곡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뢰받은 소재와 당시 읽고 있던 책에서 다루는 소재가 합쳐지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광장 : 미술과 사회> 전시 도록의 일부로 실을 소설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무엇보다 과학에 관한 생각이 조금은 복합적으로 변한 것도 있었다. 나를 이 세계로 초대한 과학책들은 열정과 호기심, 순수한 경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제 과학은 그렇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실험, 행정업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포함해 반복되는 잡다한 일들,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복잡한 문제들. 그 안에도 즐거움과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여전히 과학이 좋았지만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시기, 새로운 길이 눈앞에나타났다. SF 공모전에 냈던 두 편의 소설이 수상 소식을 가져왔다. 기사가 크게 나서 장르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도 되었다. 대학원 졸업 학기, 진로를 결정해야 할 무렵이었다. 마땅한 길을 찾지 못했던 나는 이왕 주목받는 행운을 누린 김에 딱 일년만 전업 작가로 살아보자는 뜬금없는 결정을 내렸다.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구조에 기인한다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받아들이며 출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애인이 몸과 정신의 손상, 즉 장애 자체로 겪는 고통도 분명히 실존한다. 어떤 사람의 장애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그가 개별자로서 고유하게 경험하는 몸의 고통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현대의 장애 담론은 손상을 장애화하는 사회, 제도, 문화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장애인 사이의 다양성, 구체적인 몸의 고통과 경험, 장애 정체성과 자긍심 문제를 놓치지 않고 다룬다.

한편 포스트휴머니즘과 인간 신체-결합기술에 관한 대중서와 학술서도 국내에 여럿 나와 있었다. 
마크 오코널의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트랜스휴

열심히 살다니 정말 대단해!‘ 같은 맥락 없는 말을 듣게 되거나, 앞으로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소설이 장애라는 해석 틀로만 읽힐까봐 다소 섣부른 걱정을 했다. 그래서 약간은 방어적인 태도로 초고를 썼다. 그 결과는 내가 너무 글 뒤에 숨어버린, 무미건조한 글이 되고 말았다.

편집자님의 피드백에 대부분 동의했던 나는 일단 초고를 뜯어고치며 내 경험 서술을 늘리고 회상 장면들을 ‘감정적으로‘ 크게 수정했다. 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자기 이야기를 녹여내는 김원영 작가의 파트를 읽으며 분석도 했다. 그런데 내글을 수정할수록 뭔가 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뭘까. 이기분은? 한참 고민하다가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계속 이야기를 나눠왔던 연구자 K에게 글을 보여주었다.

K는 글을 다 읽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 아니야. 이건 너무 과해."
K의 말에 따르면, 추가된 내용이 독자의 몰입을 돕는 대신 그냥 불평불만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K의
‘과하다‘는 표현 하나로 내 원고에 느꼈던 거리감이 정리되는기분이 들었다. 

독자를 몰입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내가 과거에 느꼈던 감정을 지나치게 부풀린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추가된 경험들이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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