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과 복원의 꿈‘
손유경(문학연구자)
명랑해도 된다. 명랑하고 싶다
저는 자신을 본질적으로 명랑한 사람이라고 여겨요.
이 문장은 박완서 문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박완서소설의 여성 주인공들은 심심한 것, 무료한 것, 지루한 것, 답답한 것을 잘 참지 못한다. 박완서 문학의 원형이라 할 법한 『나목』(1970)의 주인공 이경이 ‘죽지 못해‘ 사는 어머니의 잿빛 세계에서 벗어나 옥희도의 그림이 상징하는 채색된 세계에서 ‘사는 것처럼‘ 살고자 몸부림쳤던 것을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박완서는 한국전쟁 중에 오빠와 숙부를잃고, 1988년에는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떠나보낸 아픈 가족사
를 가슴에 품은 채 40여 년의 작가 생활을 지속했다. 박완서는삶이란 그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살아내야 하는‘ 과정의 연속임을 그녀의 전 생애와 문학을 통해 보여준 셈이다.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살아남은 자‘라는 정체성이 박완서의 삶과 글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라면, 그단서를 토대로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작가와 인물은 과연 ‘어떻게‘ 살아내었는가? 박완서는 생을 지속시키는 힘에 대한 탐구에 몰두한 작가이다. 생기, 재미, 활기, 위엄, 품위.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나목」의 어머니처럼 죽지 못해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라는 믿음이야말로, 작가 자신이 왜 스스로를 "본질적으로 명랑한 사람"으로 규정했는지 알게 해준다. 박완서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명랑해도 된다‘고 말해준 작가이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작가 자신이 평생토록 ‘명랑하고 싶었던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미치광이들의 짓이다. "아아, 전쟁은 분명 미친것들이 창안해낸 미친 짓 중에서도 으뜸가는 미친 짓이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나‘는 결코 미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아가 추구한 생기, 재미, 활기는 바로 ‘살아남은 자의 자존심, 긍지였다. "나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재미나 하고픈, 다채로운 욕망들"을경아는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나는 내 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나목』.
‘흉한 죽음‘이라는 역광
그럼에도 박완서 소설에는 어이없을 만큼 참혹하게 죽은 이들과 그것을 목격한 인물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출몰한다. 죽음은 도처에서 이유 없이 일어난다. 처참한 죽음의 반복적 형상화는 "본질적으로 명랑한 작가 박완서를 평생 따라다닌 고통의몸피가 결코 줄어든 적 없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일깨운다. 한국전쟁 중에 억울하게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한 민간인 이야기는 박완서 문학 전반의 어떤 공유지 역할을 한다. 「겨울 나들이」의 주인공은, "난리 통에 첫번째 아내와 생이별" (pp. 36~37)하고 월남해 자신과 재혼한 남편과, 그가 데려온 전처소생을 정성껏 돌봐온 자신의 노력이 문득 헛되고 억울한 기분이 들어 온양온천으로 겨울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우연히 들른 여관집에는 한국전쟁 당시 아들/남편을 잃은 고부가 살고 있다. 시어머니는 연신 도리질을 하고 있어 ‘나‘는 뭔가 눈치가 보여 불편하다. 그런데 며느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나‘의 모든 예상(노인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든가, 노인이 정신을 놓쳤다든가)을 벗어난 끔찍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을 피해 처가에 몸을 숨겼던 여인의 남편은, 9.28수복을 즈음하여 전세가 바뀌자마자 참지 못하고 본가로 돌아온다. "어떻게 된게 세상은 점점 더 못되게만 돌아가 이웃끼리도친척끼리도 아무개가 반동이라고 서로 고자질하는 짓이 성행해,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일이 이 마을 저 마을에 하루도 안 일
어나는 날이 없었다. 끔찍한 나날이었다" (p. 45). 그사이 여인은시어머니에게 그 누가 아들의 거처를 묻더라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른다고 딱 잡아떼라는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 그러던 중시어머니는 마을을 배회하던 인민군 패잔병들과 마주친다. 그녀가 덮어놓고 ‘나는 모른다‘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아들이놀라 뛰어나오고, 아들은 인민군이 난사한 총에 맞아 처참히 죽고 만다. 이후 시어머니는 "치매가 된 채 허구한 날 도리질이나해대는"(p. 48) 증세를 보인다. 박완서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들이 겪었던 고초를 이렇게도묘사했다. "몇 달을 두고 전선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대로 세상도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었으니 그때마다 부역했다고 고발하고 반동했다고 고발해서 생사람 목숨을 빼앗는 일을 미친 듯이되풀이 했다"(「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1977). 이런 살벌한 사태를 피해 몸을 숨겼던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겨울 나들이」의 노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이상증세를 형벌처럼 평생 겪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를 구성하는 두 개의 에피소드 중 전자에 해당되는 윤 노인의 가족사 역시 위와 유사한 패턴으로 그려진다. 6.25동란 중 인민군을 피해 땅굴에 숨어 있던 윤 노인의 부친은 "저만치 국민학교 마당 깃대박이 꼭대기에서 태극기가 나부끼는 걸 보자 그만 감격에 치받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날뛴 게 문제"였는데,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수수밭에 숨어 있던 인민군이 총을 난사해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숨
졌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의 선거 부정행위를 폭로하는 윤 노인의 수기를 그의 부인이 그토록 불온시하며 그것이 세상에 알려칠까 봐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것은, "시상만 바뀌었다 허면 미리설치는 건 이 집안 내력"이라는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p.168). 윤 노인이 어용 잡지사 수기 공모전에 당선되고도수상을 포기한 것은 이런 사정들 때문이었다. 다른 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소설가 송사묵 또한 전쟁 중영문도 모른 채 사형을 당한다. "인공 치하에서 이밥 먹고산죄" (p. 180)로 밀고를 당한 ‘나‘의 숙부와, "난리통에도 숨어 있지 않고 학교에도 나가시고 문학가 동맹 사무실에도 나가" (p. 182)는 바람에 부역자로 낙인찍힌 스승 송사묵은, 9.28수복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후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숙부와 송사묵)가 그 안(서대문형무소)에서 짐승처럼 죽어갔다면 우리는 밖에서 짐승처럼 살아남았던 것이다" (p. 184, 괄호는 필자).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골육상잔의 기억" (p. 376)을 다룬 「빨갱이 바이러스」에서 주인공은 인민군이었던 삼촌의 존재가 행여나 가족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아버지가 삼촌을 삽으로내리치는 장면을 목격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나‘는 분명 "인민군에 나가 싸운 삼촌" (p. 372)의 시신이 마당에 묻혀 있을것이라 확신한다. 죽은 자도 살아남은 자도 ‘짐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 시간들을 박완서는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기록한다. 인물과 상황은
조금씩 변하지만 이 사건들을 가로지르는 본질은 단 하나다. 죽인자도, 죽은 자도, 살아남은 자도 ‘이유를 모른다‘. 도처에 널린이 죽음들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 허망한 죽음들을 끊임없이 기억해내고 발설하고 기록하는 과정, 그것이 박완서 글쓰기의 중핵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피로 물든 이 기억의 미로에서 박완서가 길을 잃지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비명횡사한 아버지와 오빠의 원혼을 한참 만에야 제대로 달랠 수 있게 된 「부처님근처」(1973)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고운 죽음이 얼마나큰 축복이 될 것인지를 나는 알고 있다. 흉한 죽음이 얼마나 집요한 저주인지를 알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그토록 동경하는 ‘고운 죽음‘이란 곧 ‘고운 삶‘, 다시 말해 늙고 병드는 인간적 삶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전쟁이나 사고로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지척에서 보아왔기에, 작가 박완서는 늙고 병드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 자체가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축복임을 거듭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박완서 소설은 ‘고운죽음=고운 삶‘의 장면을 조명하면서도 그 피사체에 ‘흉한 죽음‘ 이라는 강한 역광을 내리쪼임으로써 ‘살아 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찬란하면서도 덧없는 ‘사건‘인가를 깨우쳐준다. 기실(비명횡사가 아니라) 살아 있음이야말로 가장 큰 사건이라는 진실을 말이다.
중년 혹은 노인의 기품
박완서 소설에 등장하는 당당하고 품위 있게 늙어가는 중년혹은 노년의 여인들이 주목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겨울나들이에서 도리질하는 노파를 관찰하는 ‘나‘의 시선에 포착된 것은 그녀의 "특이한 우아함이다. 노파는 수척했으나 흰머리를 단정히 빗어 쪽찌고, 동정이 정갈한 비단 저고리에 푹신한 모직 스웨터를 걸치고 꼿꼿이 앉았는 모습에 특이한 우아함이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우아함이기도 했다. 도리질도 처음 내가 봤을 때보다 훨씬 유연해져 꼭 미풍에 살랑이는 것처럼 보였다. (pp. 42~43)노파는 난리통에 아들을 잃고는 이후 25년 동안 자는 시간만빼놓고 도리질을 한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럽고 기괴하다고까지할 수 있을 노파의 이런 행동 너머에서 어떤 ‘엄숙함을 찾아낸 것은 노파의 생을 지속시키는 힘이 다름 아닌 바로 그 도리질에 있음을 주인공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 도리질은 광기의 표식이 아니라 광기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흔적이다. 노파를 극진히 봉양하는 며느리의 태도 또한 그윽하고 평온하다. "정말 대사업을 힘껏 보필하는 이의 사명감과 긍지로 아주머니의 얼굴이 은은히 빛나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어쩌면 이아주머니야말로 대사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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