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미운 오리 새끼를
우연히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안쓰럽고 도와주고 싶지만 부리에 쏘일 것 같아
선뜻 손을 내밀기도 어려운

담담하게 외로움을 견디는 오늘의 우리에게표명희가 전하는 다정하고도 힘찬 위로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평범한 청소년들이다. 작가는 이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 낸다. 이주배경을 가진 학생이 20만 명이 된 한국 사회에서 친구 중 한두명은 이주 배경을 가지고 있을 테고, 네 가정 중 한 가정이상이 반려동물과 함께 살며, 한부모가족 또한 낯설지 않다.
우리 사회가 겪은 사회적 참사, 역사적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일이거나 이웃의 일일 가능성이 크다.
작가가 세밀하게 그려 낸 한국 사회의 현재가 너무 생생해서일까. 소설 속 인물 하나하나가 아파트 엘리베이터.
편의점 혹은 학교 복도에서 만난 친구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사는 현실을 돌아보게 되고, 공감하는 마음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김중미(소설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 어머니는 "가난을 정면으로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이런 특이한 발랄함"을 치를 떨며 경멸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나‘는 "억센 푸성귀처럼 청청한 생기"(p. 13)에 넘쳐 있는이들과 어울려 살면서 가난을 "소명"으로 삼은 채 살아나간다.
가족들이 죽기 전부터도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번 것은 ‘나‘였다. 대학생 상훈이 ‘가난 체험‘을 위해 ‘나‘를 속이고 가난한 노동자 행세를 하며 동거 생활을 하는 기만적 행동을 하기 전까지
‘나‘는 살아남은 자의 긍지인 가난을 누구에게도 빼앗긴 적 없다. 그러나 그가 가난을 훔쳐간 후 "나에게 있어서 소명"(p.29)이었던 가난은 "무의미한 황폐" (p. 31)로 전락하고 만다. 상훈이 ‘나‘에게서 앗아간 것은 기실 가난만이 보증할 수 있는 삶을향한 ‘나‘의 매혹이기 때문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버는 젊은 여주인공들의 ‘소녀 가장콤플렉스‘는 『나목』의 이경을 상기시키는 「공항에서 만난 사람」과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주인공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가장 뚜렷한 소녀 가장 캐릭터는 「환각의 나비」에 등장하는 두 딸 ‘영주‘와 ‘자연 스님‘이다. 둘은 전혀 다른 듯 닮은 인물들로,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생계를 담당해왔다. 어렵사리 대학의 전임 자리에 취직이 된 영주는 어린 시절부터 하숙집을경영하는 엄마의 동지였고, 처녀 보살로 이름났던 절집(점집)의 자연 스님(속명 마금이) 또한 어려서부터 "집안의 유일한 돈줄"(p.324)이었다. 지금의 절더는 6.25 난리 통에 부역을 한 어떤 가족이 몰살을 당했던 ‘흉가‘인데, 몰살당한 주인의 살아남

은 동생이 그곳에 터를 잡자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네가음흉한 계획을 세워 마금이를 그 집 잔심부름꾼으로 보낸 것이말하자면 ‘신의 한 수‘였다. 마네의 계획(?)대로 그는 열네 살의 마금이를 범하고 이를 안 마금네가 그를 협박하면서 마침내그 집은 마금이네 차지가 된 것이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주인공도 전쟁 중 오빠가 비명에 간 이후 후유증을 앓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미군부대에 취직하여 식구들을 부양한 경험이 있다. ‘나‘도 오빠를사랑했지만 "오빠를 따라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살고싶었다" (p.206). 어머니와 올케가 ‘나‘의 결혼 결심을 축하하기보다 괘씸하게 여긴 것은 ‘나‘의 노력으로 그사이 집안에 꽤 목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딸을 밑천으로 삼거나 딸의 적극적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다소 무기력한 가족들의 모습은, 살아남은 이는 ‘명랑해도된다‘고 말하려는 작가의 반대편에 사뭇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러나 작가 박완서는 젊은주인공들로 하여금 죽음에 저당 잡혀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목』의 이경이 말한바 ‘미치지 않을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春秋

복원의 꿈

이제 우아하고 기품 있는 중년 및 노년의 인물들과, 생기와재미를 갈구하는 젊은 주인공들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들을 보자. 거기에는 왕년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신이 피폐해진 노인, 잔뜩 위축된 노인, 겉보기에는 고상하지만 위선을 일삼는 노인, 진실보다는 편의를 취하는 중년의 인물들이있다.
「침묵과 실어」의 주인공 정해철은 잡지사 주간인 동시에이류 작가이다. 편집회의에서 경영주의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무리하게 도출한 그는 자신의 비굴함에 괴로워하던 차에 윤상하 선생 댁을 찾아간다. 정해철은 "의식이 있는 침묵" (p.100)을 동경하되 실천은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상태이다. 그런 그가 오래전 윤상하 선생의 이름을 딴 ‘상하문학상‘ 수상을 거절한 적이 있다. 오랜만에 윤상하 선생을 방문해, 윤상하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으며 자신이 수상을 거부했던 예전 사건을 상기시켜 "노인의 노여움을 애걸" (p. 107) 해보러 한 것이다.
잡지사에서 무너진 자존심을, 자신이 썼던 멋진 수상 거부의 변을 떠올리면서라도 다시 세워보려는 속셈이다. 그러나 윤상하선생은 중풍에 실어증까지 겸한 환자가 되어 바보같이 "무진장흘러내리는 웃음" (p. 108)만 지을 뿐이다. 정해철의 입장에서윤상하 선생은 정해철 자신을 위해 끝까지 고약한 ‘친일 문인‘
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변명도 하고 증언도 하고 특히 자신을

향해 분노해야 했다. 윤상하의 실어증은 정해철의 ‘침묵‘을 한없이 비굴하고 나약한 지식인의 몸짓으로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다. 일제 말의 암흑기에 변절했던 윤상하와, 친체제적 편집장으로 살고 있는 정해철은 비루함을 공유한 중년과 노인의 어떤전형들이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의 경우에는 ‘나‘가 꿈꾸는 과거의 온전한 복원을 가로막는 대표적 세 인물이 등장한다. 해방기에 서대문형무소에 잠시 수감되었던 친구 혜진, 송사묵의 부인을 문전박대했던 백민세, 아버지 송사묵이 납북된 것이 아니라 사형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체하는 장남. 이 중에서도
‘나‘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백민세 옹이다. 해방기에도 그랬고지금도 그는 그 무엇에도 연루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가 "우아하고 고상하게 늙은 노인"(p. 189)으로 보임에는 틀림없지만그는 그런 얼굴을 하고 여전히 시침을 뗀다. "누구나 빠져나갈구멍 먼저 마련해놓고 있었다. 진실이 마치 함정이나 덫이라도된다는 듯이" (p.192).
고교 시절 박완서의 국어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을 모델로한 작중 인물 송사묵‘은 부역자로 밀고당해 서대문형무소에서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시절을 통째로 지워버리고싶어 하는 혜진이나 백민세 옹은 그렇다 쳐도, 아버지의 죽음을똑똑히 기억하는 장남까지 송사묵을 ‘납북자‘로 분류하는 데 왜

저항하지 않는가?

네에, 그거요. 납치당하신 것처럼 말하는 것 말이죠. 그건 우리 식구의 말버릇이죠. 사형이나 옥사보다 얼마나 듣기 좋아요.
[・・・・・・] 좋은 일에선 특별나고 싶을지 모르지만 나쁜 일일수록다수의 편에 서는 게 그나마 편하거든요. 일종의 자구책이죠.
불행해진 것도 억울한데 홀로 특별하게 불행해지는 거라도 면해보자는. (p.191)

자신의 가족사가 ‘특별한 종류의 불행‘으로 기록되는 것만은 막고 싶다는 장남의 발언에서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어떻게 복원하느냐‘라는 무거운 질문이다.

복원에 대한 ‘나‘의 욕망은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된다. 그런데
‘나‘는 왜 그토록 진실 찾기에 목말라하는가?
박완서의 문학과 생애가 그에 대한 해답 찾기의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어떨까? 복원이란 ‘원래대로 회복함을 의미한다. 그
‘원래‘의 상태란 어쩌면 가까운 이들이 ‘흉한 죽음‘을 겪기 이전의 삶일 수도 있고, ‘흉한 죽음‘에 얽힌 억울한 사연 그 자체일 수도 있으며, 가족과 지인의 ‘흡한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남은 이들이 절실히 추구하는 생기 있는 삶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 책에 묶인 박완서의 소설들에는 복원의 꿈을 좇아 헤맸던 작가의 모습이 고르게 투영되어 있다. 인간은 시간과 마찰하면서늙고 병들지만 바로 그 때문에 빛나고 아름답다는 것이 박완서

문학이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라면, 복원이란 그 마찰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마찰 ‘때문에‘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연이어 던져진 메시지일 것이다. 허물어지는 것이 있기에 복원의 꿈도 생겨나는 법, 늙어가는 인간은 견고한 물건보다 우아하다. 소멸과 복원의 꿈을 동시에 꾸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면서 등골에 전율이 지나갔다" (pp. 48~49).
전율할 만큼 깊이 ‘나‘를 감동시킨 것은 노파와 여인의 기품이다. ‘살아남은 자‘는 과연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박완서만큼 집요하게 매달린 작가도 드물다. 박완서가 찾아낸 대답의 하나는 ‘긍지‘이다. 이 글 서두에서 언급된바 『나목』의 주인공 이경이 품었던 바로 그 욕망과 의지, 즉 "미치지 않을자신감을 박완서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골고루 나눠 준다. 노파는 고통스럽고도 엄숙하게 자신의 업보를 감당함으로써 여인은 그런 시어머니를 "힘껏 보필하는 이의 사명감과 긍지"로써, 살아남은 자의 윤리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위엄 있는 삶의 발견은 그 자체로 ‘나‘에게 해방감을안겨준다. 이북에 노모와 아내를 남겨두고 빈털터리로 월남한무명 화가 남편, 그리고 그가 데려온 어미 없는 어린 딸을 평생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온 것이 "큰 허탕을 친 것처럼 억울하게여겨지고 "속아 산 것 같은, 헛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던
‘나‘의 방황은 엄살일지 모른다(p. 37). 흉한 죽음이라는 역광속에서 비로소 고운 삶의 장면들이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나게되듯, 노파와 여인이 겪은 참상을 배경으로 한 넓은 화폭의 그림에서 ‘나‘의 번민은 그저 무심히 찍힌 점만큼이나 작아진다.
"너는 결코 헛살지만은 않았어. 암, 헛살지 않았고 말고"(p. 53).
「공항에서 만난 사람」의 경우에도 주인공의 기억 속 ‘무대소아줌마‘는 당당하고 위엄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루하루의답답증을 주체 못 해"(p. 57) 나선 여행길에서 ‘나‘는 6.25사변

중 알게 되었던 ‘무대소 아줌마‘를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주인공이 미군 PX 점원 노릇을 하던 그 시절 한국인 PX 점원과청소부, 순경은 한패가 되어 물건을 밖으로 빼돌려 이익을 챙기는 동족끼리의 동업에 가담한다. 그때 가공할 만큼 많은 물건을옷 속에 숨기는 능력을 지녀 ‘무대소 아줌마‘로 불렸던 여인을중년이 된 ‘내‘가 다시 만난다. 기억을 더듬던 ‘나‘는 그녀가 얼마나 ‘당당한 사람‘이었는지 새삼 떠올린다. "그녀에겐 아무도흉내 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위엄 같은 게 있었다. 그녀의처지로는 얼토당토않은 거였지만 묵살할 수도 없는 거였다"(p.
68).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국군이라는 말을 "매우 엄숙하고 품위 있게" (p. 70)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다.
이렇게 입이 걸고 안하무인인 무대소와 우리가 오래도록 거래를 계속했던 것은 물론 그녀의 무대소스러운 유능함 때문도있었지만, 그 터무니없는 당당함에 압도당한 때문도 있었다. 그무렵엔 참으로 당당한 사람이 귀했다. 그녀가 거침없이 잘난 척하는 게 밉살스럽다가도 문득 부럽고 보배로워지는 걸 어쩔 수없었다. (p.71)박완서는 이처럼 결코 ‘그럴 것 같지 않은‘ 주변적 인물, 그러니까 참척의 아픔을 겪었거나 먹고살기 위해 한평생 발버둥 쳐온 여인들에게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품위와 당당함을

선사한다. 그 인물들의 보배로움은, 전쟁의 참상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어서 작가 박완서가 피로 물든 과거의 미로에서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이정표 노릇을 한다.
당당한 노인의 모습은 「환각의 나비」에서도 엿보인다. 주인공영주가 낳은 아이들을 한평생 돌본 어머니는 영주가 보기에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노인에겐 그 어렵고도 장한 일을 한이의 특권이랄까, 침범할 수 없는 당당함이 있었고, 아이들하고의 자연스러움은 거의 동물적이었다" (p. 303). 젊어서 과부가된 어머니에게는 원래부터 "당신 손으로 자식을 벌어먹이기 위해 일생 서서 일하면서 터득한 당당함"이 있었던 터다. 이 "어머니만의 자존심"은 아무도 능멸할 수 없는 그만의 세계이다(p.
305). 치매를 앓으며 아들네로 딸네로 정처 없이 떠돌던 어머니가 가출을 했다가 우연히 머물게 된 절집에는 다름 아닌 자신의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처녀 보살 마금이가 살고 있다. 어머니를찾아 헤매던 영주는 절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p. 338) 나비 같은가벼움과 자유로움을 발견한다. 노인의 당당함과 자유로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기쁨으로 번지는 듯 보인다.

살아 있음이라는 사건

폭우로 버스가 끊겨 ‘나‘의 집에 머물게 된 세 여인의 고백과그들에게도 결코 털어놓지 못한 ‘나‘의 비밀로 구성된 「빨갱이바이러스」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마모도 소멸도 안 되는 것에 대한 병적이고도 비밀스러운 혐오감을갖고 있었지만" (p. 351). 이 구절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3)에서 ‘나‘가 형님에게 하는 말인 "생떼 같은 목숨도 하루아침에 간데없는 세상에 물건들의 목숨은 왜 그렇게 질긴지, 물건들이 미운 건 아마 그 질김 때문일 거예요. 생각만 해도 타지도 썩지도 않을 물건들한테 치여 죽을 것처럼 숨이 답답해지네요"라는 대사와 나란히 놓고 읽을 필요가 있다.
주인공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건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혐오스럽다. 반면, 썩거나 마모되거나 소멸되는 생명은 바로 그 때문에 매혹적이다. 현재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만이 점차 썩어갈 수 있다. ‘흉한 죽음‘의 덫에서 벗어나 긍지, 생기, 기품 등 인간의 생을 지속시키는 힘을 발견하고 관찰해온 작가 박완서는,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p. 217)에 사로잡혀 비非생명체를 혐오하는 인물을 작품에 등장시킨다.
말기 암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편과 그를 보살피는 주인공의 마지막 1년을 기록한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그의 존재가 시간과 마찰하면서 빛을 내는 것처럼 빛나 보였다"(p. 203, 강조는 필자)라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빛이 나는 작

품이다.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인 몸은 공간을 점유한 물건과 달리 시간을 산다.
시간과 마찰하는 몸은 늙고 병든다. 박완서가 노년의 삶을 반복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간과 마찰한 흔적으로서의 늙고 병든 몸이야말로 ‘흉한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되었던 보배로운 생명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반복하건대 박완서 소설을통틀어 작중 인물이 겪는 가장 큰 사건은 ‘살아 있음‘이라는 사건이다. 가족과 지인이 당한 ‘흉한 죽음‘을 목격한 후 살아남은작중 인물들은 저마다 생기, 활기, 재미를 갈망한다. 물건 - 아닌 존재만이 추구하고 누릴 수 있는 생기, 활기, 재미는 변화를 그 속성으로 삼는다. 계속 활기에 차 있을 수도, 변함없이 즐거울 수도 없다. 박완서는 요컨대, 노화와 질병을 겪는다는 사실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특권이자 비할 데 없는 축복으로여겨질지 모른다는 삶의 진실을 ‘흉한 죽음‘의 역광 속에서 희미하게 그러나 매우 집요하게 드러낸 작가이다.
「해산바가지는 살아생전 치매에 걸려 주인공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인 ‘나‘의 출산 때마다 보여주었던 경건한 의식을 ‘나‘가 생각해내면서 새삼 시어머니의 "노추한 육체에 깃들었던 "아름다운 정신"을 그리게 되는 이야기이다. 연달아 딸을 낳은 며느리를 죄인 취급하는 한 친구를 만난후 주인공은 시어머니의 해산바가지에 얽힌 오래된 추억을 떠올린다. 손녀 손자 가리지 않고 "똑같은 영접을 해주었던 시어머니는 "어디서 배운 바 없이, 또 스스로 노력한 바 없이도 저절

로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분이었다. 경건하게 생명을 대하던 시어머니는 비록 ‘시간과 마찰하면서‘ ‘망가진 정신, 노추한 육체" (p. 148)를 갖게 되었지만 "임종 때의 그분은 주름살까지 말끔히 가셔 평화롭고 순결하기가마치 그분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날 때의 얼굴을 보는 것 같"(p.
149)을 만큼 고요하다. 박완서가 그려내고 싶었던 ‘고운 죽음‘
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반면에 시어머니, 올케, 그리고 ‘나‘
가 모두 공범이 되어 여아 낙태를 저지른 이야기를 다룬 「꿈꾸는 인큐베이터」에는 미처 세상 빛을 보기도 전에 ‘흉한 죽음‘을당한 어린 원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박완서의 글쓰기는 이처럼 전쟁 중에, 극심한 가난 속에서, 남녀차별주의가 미만해 있는 사회에서 ‘흉한 죽음‘을 당한 생명들을 애도하는 데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애도 행위는 살아 있음이야말로 가장 큰 사건이자 축복이라는 작가의 인식과 맞닿아 있다.

소녀 가장 콤플렉스

박완서가 살아남은 자에게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또 하나의 인물 유형은 소녀 가장들이다.
「도둑맞은 가난」의 주인공은 부모와 오빠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동반 자살한 이후 홀로 살아남은 미싱사이다. 주인공의 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멸과 복원의 꿈‘

손유경(문학연구자)

명랑해도 된다. 명랑하고 싶다

저는 자신을 본질적으로 명랑한 사람이라고 여겨요.

이 문장은 박완서 문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박완서소설의 여성 주인공들은 심심한 것, 무료한 것, 지루한 것, 답답한 것을 잘 참지 못한다. 박완서 문학의 원형이라 할 법한 『나목』(1970)의 주인공 이경이 ‘죽지 못해‘ 사는 어머니의 잿빛 세계에서 벗어나 옥희도의 그림이 상징하는 채색된 세계에서 ‘사는 것처럼‘ 살고자 몸부림쳤던 것을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박완서는 한국전쟁 중에 오빠와 숙부를잃고, 1988년에는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떠나보낸 아픈 가족사

를 가슴에 품은 채 40여 년의 작가 생활을 지속했다. 박완서는삶이란 그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살아내야 하는‘ 과정의 연속임을 그녀의 전 생애와 문학을 통해 보여준 셈이다.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살아남은 자‘라는 정체성이 박완서의 삶과 글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라면, 그단서를 토대로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작가와 인물은 과연 ‘어떻게‘ 살아내었는가? 박완서는 생을 지속시키는 힘에 대한 탐구에 몰두한 작가이다. 생기, 재미, 활기, 위엄, 품위.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나목」의 어머니처럼 죽지 못해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라는 믿음이야말로, 작가 자신이 왜 스스로를 "본질적으로 명랑한 사람"으로 규정했는지 알게 해준다. 박완서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명랑해도 된다‘고 말해준 작가이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작가 자신이 평생토록 ‘명랑하고 싶었던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미치광이들의 짓이다. "아아, 전쟁은 분명 미친것들이 창안해낸 미친 짓 중에서도 으뜸가는 미친 짓이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나‘는 결코 미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아가 추구한 생기, 재미, 활기는 바로 ‘살아남은 자의 자존심, 긍지였다.
"나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재미나 하고픈, 다채로운 욕망들"을경아는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나는 내 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나목』.

‘흉한 죽음‘이라는 역광

그럼에도 박완서 소설에는 어이없을 만큼 참혹하게 죽은 이들과 그것을 목격한 인물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출몰한다. 죽음은 도처에서 이유 없이 일어난다. 처참한 죽음의 반복적 형상화는 "본질적으로 명랑한 작가 박완서를 평생 따라다닌 고통의몸피가 결코 줄어든 적 없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일깨운다. 한국전쟁 중에 억울하게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한 민간인 이야기는 박완서 문학 전반의 어떤 공유지 역할을 한다. 「겨울 나들이」의 주인공은, "난리 통에 첫번째 아내와 생이별" (pp. 36~37)하고 월남해 자신과 재혼한 남편과, 그가 데려온 전처소생을 정성껏 돌봐온 자신의 노력이 문득 헛되고 억울한 기분이 들어 온양온천으로 겨울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우연히 들른 여관집에는 한국전쟁 당시 아들/남편을 잃은 고부가 살고 있다. 시어머니는 연신 도리질을 하고 있어 ‘나‘는 뭔가 눈치가 보여 불편하다. 그런데 며느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나‘의 모든 예상(노인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든가, 노인이 정신을 놓쳤다든가)을 벗어난 끔찍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을 피해 처가에 몸을 숨겼던 여인의 남편은, 9.28수복을 즈음하여 전세가 바뀌자마자 참지 못하고 본가로 돌아온다. "어떻게 된게 세상은 점점 더 못되게만 돌아가 이웃끼리도친척끼리도 아무개가 반동이라고 서로 고자질하는 짓이 성행해,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일이 이 마을 저 마을에 하루도 안 일

어나는 날이 없었다. 끔찍한 나날이었다" (p. 45). 그사이 여인은시어머니에게 그 누가 아들의 거처를 묻더라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른다고 딱 잡아떼라는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 그러던 중시어머니는 마을을 배회하던 인민군 패잔병들과 마주친다. 그녀가 덮어놓고 ‘나는 모른다‘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아들이놀라 뛰어나오고, 아들은 인민군이 난사한 총에 맞아 처참히 죽고 만다. 이후 시어머니는 "치매가 된 채 허구한 날 도리질이나해대는"(p. 48) 증세를 보인다.
박완서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들이 겪었던 고초를 이렇게도묘사했다. "몇 달을 두고 전선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대로 세상도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었으니 그때마다 부역했다고 고발하고 반동했다고 고발해서 생사람 목숨을 빼앗는 일을 미친 듯이되풀이 했다"(「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1977). 이런 살벌한 사태를 피해 몸을 숨겼던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겨울 나들이」의 노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이상증세를 형벌처럼 평생 겪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를 구성하는 두 개의 에피소드 중 전자에 해당되는 윤 노인의 가족사 역시 위와 유사한 패턴으로 그려진다. 6.25동란 중 인민군을 피해 땅굴에 숨어 있던 윤 노인의 부친은 "저만치 국민학교 마당 깃대박이 꼭대기에서 태극기가 나부끼는 걸 보자 그만 감격에 치받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날뛴 게 문제"였는데,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수수밭에 숨어 있던 인민군이 총을 난사해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숨

졌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의 선거 부정행위를 폭로하는 윤 노인의 수기를 그의 부인이 그토록 불온시하며 그것이 세상에 알려칠까 봐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것은, "시상만 바뀌었다 허면 미리설치는 건 이 집안 내력"이라는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p.168). 윤 노인이 어용 잡지사 수기 공모전에 당선되고도수상을 포기한 것은 이런 사정들 때문이었다.
다른 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소설가 송사묵 또한 전쟁 중영문도 모른 채 사형을 당한다. "인공 치하에서 이밥 먹고산죄" (p. 180)로 밀고를 당한 ‘나‘의 숙부와, "난리통에도 숨어 있지 않고 학교에도 나가시고 문학가 동맹 사무실에도 나가" (p.
182)는 바람에 부역자로 낙인찍힌 스승 송사묵은, 9.28수복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후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숙부와 송사묵)가 그 안(서대문형무소)에서 짐승처럼 죽어갔다면 우리는 밖에서 짐승처럼 살아남았던 것이다" (p. 184, 괄호는 필자).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골육상잔의 기억" (p. 376)을 다룬 「빨갱이 바이러스」에서 주인공은 인민군이었던 삼촌의 존재가 행여나 가족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아버지가 삼촌을 삽으로내리치는 장면을 목격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나‘는 분명
"인민군에 나가 싸운 삼촌" (p. 372)의 시신이 마당에 묻혀 있을것이라 확신한다.
죽은 자도 살아남은 자도 ‘짐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 시간들을 박완서는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기록한다. 인물과 상황은

조금씩 변하지만 이 사건들을 가로지르는 본질은 단 하나다. 죽인자도, 죽은 자도, 살아남은 자도 ‘이유를 모른다‘. 도처에 널린이 죽음들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 허망한 죽음들을 끊임없이 기억해내고 발설하고 기록하는 과정, 그것이 박완서 글쓰기의 중핵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피로 물든 이 기억의 미로에서 박완서가 길을 잃지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비명횡사한 아버지와 오빠의 원혼을 한참 만에야 제대로 달랠 수 있게 된 「부처님근처」(1973)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고운 죽음이 얼마나큰 축복이 될 것인지를 나는 알고 있다. 흉한 죽음이 얼마나 집요한 저주인지를 알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그토록 동경하는
‘고운 죽음‘이란 곧 ‘고운 삶‘, 다시 말해 늙고 병드는 인간적 삶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전쟁이나 사고로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지척에서 보아왔기에, 작가 박완서는 늙고 병드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 자체가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축복임을 거듭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박완서 소설은 ‘고운죽음=고운 삶‘의 장면을 조명하면서도 그 피사체에 ‘흉한 죽음‘
이라는 강한 역광을 내리쪼임으로써 ‘살아 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찬란하면서도 덧없는 ‘사건‘인가를 깨우쳐준다. 기실(비명횡사가 아니라) 살아 있음이야말로 가장 큰 사건이라는 진실을 말이다.

중년 혹은 노인의 기품

박완서 소설에 등장하는 당당하고 품위 있게 늙어가는 중년혹은 노년의 여인들이 주목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겨울나들이에서 도리질하는 노파를 관찰하는 ‘나‘의 시선에 포착된 것은 그녀의 "특이한 우아함이다.
노파는 수척했으나 흰머리를 단정히 빗어 쪽찌고, 동정이 정갈한 비단 저고리에 푹신한 모직 스웨터를 걸치고 꼿꼿이 앉았는 모습에 특이한 우아함이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우아함이기도 했다. 도리질도 처음 내가 봤을 때보다 훨씬 유연해져 꼭 미풍에 살랑이는 것처럼 보였다. (pp. 42~43)노파는 난리통에 아들을 잃고는 이후 25년 동안 자는 시간만빼놓고 도리질을 한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럽고 기괴하다고까지할 수 있을 노파의 이런 행동 너머에서 어떤 ‘엄숙함을 찾아낸 것은 노파의 생을 지속시키는 힘이 다름 아닌 바로 그 도리질에 있음을 주인공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 도리질은 광기의 표식이 아니라 광기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흔적이다. 노파를 극진히 봉양하는 며느리의 태도 또한 그윽하고 평온하다. "정말 대사업을 힘껏 보필하는 이의 사명감과 긍지로 아주머니의 얼굴이 은은히 빛나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어쩌면 이아주머니야말로 대사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일 밤 그의 손을 꼬옥 붙들고 잤다. 행여 내가 잠든 사이에라도 당신의 영혼이 육신을 훌쩍 떠나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는 몸짓이었고, 그도 그걸 알아주길 바랐다.
이렇게 결코 그를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처럼 굴면서나는 뒤로 조금씩 그의 장사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와 나의 교적이 있는 본당 연령회장 댁 전화번호를 비롯해서 오랫동안 격조했지만 알려야 할 친척들의 연락처까지 수소문해서 메모해놓는가 하면, 임종의 장소를 집으로 할 것인가 병원으로 할것인가를 자식들과 수군수군 의논하기도 했다. 그리고 환갑 때 찍은 사진 중 부부의 사진을 딸을 시켜 사진관에 보내 아버지만 홀로 떼어내어 영정으로 쓰기에 적당한 크기로 확대를 해오도록 했다. 넉넉한 사랑을 받으며 나이 먹은 티가 역력한 흡족하고 평화로운 미소가 마음에 들어 골라잡은 사진이었다. 
그러나 미리 만든 영정 사진을 받아보고 나는 그만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가슴이 뜨끔하고 말았다. 장식 없는 나무들 속에 확대된 그의 미소는 암만 해도 나하고 나란히 앉아 찍은 환갑 사진 속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끊임없이 불어넣은 거짓 희망에 속아주고 있을 뿐 결코 정말 속고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엷은 미소가 감도는 눈매는 남의 속을 지그시 들여다보면서도 노염을 타거나 무안을 주려는 게 아니라 연민으로 감싸는 쏠쏠함 때문에 우는 것 같기도 하고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되레 나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덟 개나 되는 모자는 다 그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1년 동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