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서 등골에 전율이 지나갔다" (pp. 48~49). 전율할 만큼 깊이 ‘나‘를 감동시킨 것은 노파와 여인의 기품이다. ‘살아남은 자‘는 과연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박완서만큼 집요하게 매달린 작가도 드물다. 박완서가 찾아낸 대답의 하나는 ‘긍지‘이다. 이 글 서두에서 언급된바 『나목』의 주인공 이경이 품었던 바로 그 욕망과 의지, 즉 "미치지 않을자신감을 박완서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골고루 나눠 준다. 노파는 고통스럽고도 엄숙하게 자신의 업보를 감당함으로써 여인은 그런 시어머니를 "힘껏 보필하는 이의 사명감과 긍지"로써, 살아남은 자의 윤리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위엄 있는 삶의 발견은 그 자체로 ‘나‘에게 해방감을안겨준다. 이북에 노모와 아내를 남겨두고 빈털터리로 월남한무명 화가 남편, 그리고 그가 데려온 어미 없는 어린 딸을 평생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온 것이 "큰 허탕을 친 것처럼 억울하게여겨지고 "속아 산 것 같은, 헛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던 ‘나‘의 방황은 엄살일지 모른다(p. 37). 흉한 죽음이라는 역광속에서 비로소 고운 삶의 장면들이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나게되듯, 노파와 여인이 겪은 참상을 배경으로 한 넓은 화폭의 그림에서 ‘나‘의 번민은 그저 무심히 찍힌 점만큼이나 작아진다. "너는 결코 헛살지만은 않았어. 암, 헛살지 않았고 말고"(p. 53). 「공항에서 만난 사람」의 경우에도 주인공의 기억 속 ‘무대소아줌마‘는 당당하고 위엄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루하루의답답증을 주체 못 해"(p. 57) 나선 여행길에서 ‘나‘는 6.25사변
중 알게 되었던 ‘무대소 아줌마‘를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주인공이 미군 PX 점원 노릇을 하던 그 시절 한국인 PX 점원과청소부, 순경은 한패가 되어 물건을 밖으로 빼돌려 이익을 챙기는 동족끼리의 동업에 가담한다. 그때 가공할 만큼 많은 물건을옷 속에 숨기는 능력을 지녀 ‘무대소 아줌마‘로 불렸던 여인을중년이 된 ‘내‘가 다시 만난다. 기억을 더듬던 ‘나‘는 그녀가 얼마나 ‘당당한 사람‘이었는지 새삼 떠올린다. "그녀에겐 아무도흉내 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위엄 같은 게 있었다. 그녀의처지로는 얼토당토않은 거였지만 묵살할 수도 없는 거였다"(p. 68).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국군이라는 말을 "매우 엄숙하고 품위 있게" (p. 70)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다. 이렇게 입이 걸고 안하무인인 무대소와 우리가 오래도록 거래를 계속했던 것은 물론 그녀의 무대소스러운 유능함 때문도있었지만, 그 터무니없는 당당함에 압도당한 때문도 있었다. 그무렵엔 참으로 당당한 사람이 귀했다. 그녀가 거침없이 잘난 척하는 게 밉살스럽다가도 문득 부럽고 보배로워지는 걸 어쩔 수없었다. (p.71)박완서는 이처럼 결코 ‘그럴 것 같지 않은‘ 주변적 인물, 그러니까 참척의 아픔을 겪었거나 먹고살기 위해 한평생 발버둥 쳐온 여인들에게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품위와 당당함을
선사한다. 그 인물들의 보배로움은, 전쟁의 참상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어서 작가 박완서가 피로 물든 과거의 미로에서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이정표 노릇을 한다. 당당한 노인의 모습은 「환각의 나비」에서도 엿보인다. 주인공영주가 낳은 아이들을 한평생 돌본 어머니는 영주가 보기에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노인에겐 그 어렵고도 장한 일을 한이의 특권이랄까, 침범할 수 없는 당당함이 있었고, 아이들하고의 자연스러움은 거의 동물적이었다" (p. 303). 젊어서 과부가된 어머니에게는 원래부터 "당신 손으로 자식을 벌어먹이기 위해 일생 서서 일하면서 터득한 당당함"이 있었던 터다. 이 "어머니만의 자존심"은 아무도 능멸할 수 없는 그만의 세계이다(p. 305). 치매를 앓으며 아들네로 딸네로 정처 없이 떠돌던 어머니가 가출을 했다가 우연히 머물게 된 절집에는 다름 아닌 자신의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처녀 보살 마금이가 살고 있다. 어머니를찾아 헤매던 영주는 절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p. 338) 나비 같은가벼움과 자유로움을 발견한다. 노인의 당당함과 자유로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기쁨으로 번지는 듯 보인다.
살아 있음이라는 사건
폭우로 버스가 끊겨 ‘나‘의 집에 머물게 된 세 여인의 고백과그들에게도 결코 털어놓지 못한 ‘나‘의 비밀로 구성된 「빨갱이바이러스」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마모도 소멸도 안 되는 것에 대한 병적이고도 비밀스러운 혐오감을갖고 있었지만" (p. 351). 이 구절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3)에서 ‘나‘가 형님에게 하는 말인 "생떼 같은 목숨도 하루아침에 간데없는 세상에 물건들의 목숨은 왜 그렇게 질긴지, 물건들이 미운 건 아마 그 질김 때문일 거예요. 생각만 해도 타지도 썩지도 않을 물건들한테 치여 죽을 것처럼 숨이 답답해지네요"라는 대사와 나란히 놓고 읽을 필요가 있다. 주인공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건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혐오스럽다. 반면, 썩거나 마모되거나 소멸되는 생명은 바로 그 때문에 매혹적이다. 현재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만이 점차 썩어갈 수 있다. ‘흉한 죽음‘의 덫에서 벗어나 긍지, 생기, 기품 등 인간의 생을 지속시키는 힘을 발견하고 관찰해온 작가 박완서는,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p. 217)에 사로잡혀 비非생명체를 혐오하는 인물을 작품에 등장시킨다. 말기 암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편과 그를 보살피는 주인공의 마지막 1년을 기록한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그의 존재가 시간과 마찰하면서 빛을 내는 것처럼 빛나 보였다"(p. 203, 강조는 필자)라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빛이 나는 작
품이다.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인 몸은 공간을 점유한 물건과 달리 시간을 산다. 시간과 마찰하는 몸은 늙고 병든다. 박완서가 노년의 삶을 반복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간과 마찰한 흔적으로서의 늙고 병든 몸이야말로 ‘흉한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되었던 보배로운 생명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반복하건대 박완서 소설을통틀어 작중 인물이 겪는 가장 큰 사건은 ‘살아 있음‘이라는 사건이다. 가족과 지인이 당한 ‘흉한 죽음‘을 목격한 후 살아남은작중 인물들은 저마다 생기, 활기, 재미를 갈망한다. 물건 - 아닌 존재만이 추구하고 누릴 수 있는 생기, 활기, 재미는 변화를 그 속성으로 삼는다. 계속 활기에 차 있을 수도, 변함없이 즐거울 수도 없다. 박완서는 요컨대, 노화와 질병을 겪는다는 사실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특권이자 비할 데 없는 축복으로여겨질지 모른다는 삶의 진실을 ‘흉한 죽음‘의 역광 속에서 희미하게 그러나 매우 집요하게 드러낸 작가이다. 「해산바가지는 살아생전 치매에 걸려 주인공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인 ‘나‘의 출산 때마다 보여주었던 경건한 의식을 ‘나‘가 생각해내면서 새삼 시어머니의 "노추한 육체에 깃들었던 "아름다운 정신"을 그리게 되는 이야기이다. 연달아 딸을 낳은 며느리를 죄인 취급하는 한 친구를 만난후 주인공은 시어머니의 해산바가지에 얽힌 오래된 추억을 떠올린다. 손녀 손자 가리지 않고 "똑같은 영접을 해주었던 시어머니는 "어디서 배운 바 없이, 또 스스로 노력한 바 없이도 저절
로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분이었다. 경건하게 생명을 대하던 시어머니는 비록 ‘시간과 마찰하면서‘ ‘망가진 정신, 노추한 육체" (p. 148)를 갖게 되었지만 "임종 때의 그분은 주름살까지 말끔히 가셔 평화롭고 순결하기가마치 그분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날 때의 얼굴을 보는 것 같"(p. 149)을 만큼 고요하다. 박완서가 그려내고 싶었던 ‘고운 죽음‘ 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반면에 시어머니, 올케, 그리고 ‘나‘ 가 모두 공범이 되어 여아 낙태를 저지른 이야기를 다룬 「꿈꾸는 인큐베이터」에는 미처 세상 빛을 보기도 전에 ‘흉한 죽음‘을당한 어린 원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박완서의 글쓰기는 이처럼 전쟁 중에, 극심한 가난 속에서, 남녀차별주의가 미만해 있는 사회에서 ‘흉한 죽음‘을 당한 생명들을 애도하는 데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애도 행위는 살아 있음이야말로 가장 큰 사건이자 축복이라는 작가의 인식과 맞닿아 있다.
소녀 가장 콤플렉스
박완서가 살아남은 자에게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또 하나의 인물 유형은 소녀 가장들이다. 「도둑맞은 가난」의 주인공은 부모와 오빠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동반 자살한 이후 홀로 살아남은 미싱사이다. 주인공의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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