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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 열쇠 ㅣ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30
황선미 지음, 신은재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뜻밖의 책 선물을 받습니다. 지인들이 건네준 재미난 책들, 출판사에서 보내준 신간들, 경애하는 작가님들의 작품들. 책을 선물받으면 그저 신이 납니다. 가장 신이 나는 책 선물은 결코 예상치 못한 책일 것입니다. 알라딘에서 대체 무슨 이유로 보내준 지 알 수 없는 이 책, 『목걸이 열쇠』처럼 말이에요.
마음 속 초록공책을 여는 목걸이 열쇠는 어디에 있나요?
『목걸이 열쇠』
한 달에 보통 2~30권정도의 책을 삽니다. 심할 때엔 50권, 100권이 넘어설 때도 있습니다. 지난 달에도 그렇게 책을 샀습니다. 이 서점서 열 권 저 서점서 열 권 돌아다니다 열 권 ... ... 이런 식으로 사고 사고 또 사다 보니 늘 책장이 부족합니다. 대체 이 책들을 다 어따 꽂나 언제 다 읽나 끙끙거리는데 이것 참, 당황스러운 책이 두 권 곁에 왔습니다.
시공주니어문고 시리즈...라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니 이걸 나한테 왜?”였습니다. 난 추리소설작가인데요? 빼도박도 못하는 삼십대 중반에 결혼도 안 했는데요! 조카도 없고요! 이왕 줄 거면 추리소설로 달라고요!
하지만 받은 책을 안 볼 수는 없는 성격이다 보니 읽었습니다. 마감을 끝내고 아픈 머리를 식힐 때엔 가벼운 책이 좋거든요. 그래서 이 책을 들고 아침에 나왔는데 이것 참, 왜 이리 감동적이랍니까. 어떻게 이 가벼운 책에서 1월에 가장 뭉클했던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떠오른답니까.
아, 정확히 말하자면 『싯다르타』는 1월에 훌쩍거리며 읽다가 마지막 몇 장 남겨놓고는 내려놓고 까먹었다가 어젯밤 아이러브커피 하는 중간에 겨우 정줄 잡고 마저 읽었습니다. 읽다가 말다가 정줄 잡고 마저 읽은 『싯다르타』는 그의 다른 저작들이 그렇듯 두 가지 방법의 구도求道를 이야기합니다. 부처 싯다르타가 세속에서 벗어나 득도하는 이야기와 또 다른 싯다르타가 인간을 겪으며 득도하는 이야기를 동시에 전개합니다.『싯다르타』 속의 싯다르타는 말합니다. 모든 것은 같다. 모든 것 안에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진리가 있고 도가 있다. 그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요. 그래, 음, 그렇지……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 저는 또다른 싯다르타를 발견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향기는 요즘 왠지 외롭습니다. 가슴이 커져서 브래지어도 하게 되고 동갑내기 소꿉친구인 동수도 왠지 싫어졌습니다. 향기는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게 자신을 혼자 두는 엄마 아빠 탓이라고요. 때문에 향기는 비밀경찰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들을 모두 벌을 주겠다고 결심하고는 작은 초록공책에 체포 1호! 2호! 이름을 적습니다. 자신에게 한 나쁜 짓을 하나, 둘 적어갑니다.
체포 2호는 환경미화원 아저씨였습니다. 아저씨는 예전 향기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습니다. 향기가 ‘삼삼이’를 위해 괜찮은 종이상자를 구하려 집 앞 재활용처리장을 기웃거렸을 뿐인데 주변을 어지럽힌다고 앞뒤 재지도 않고 혼을 냈습니다. 때문에 향기는 초록공책에 환경미화원 아저씨를 체포 2호로 적고는 죽을 때까지 쓰레기를 치우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환경미화원 아저씨에게 정말 나쁜 일이 생겼습니다. 아주 흉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향기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혼자서 길도 잘 못 걷고, 마스크로 가린 얼굴은 늘 눈물범벅입니다. 때문에 향기는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자기 때문에 아저씨가 저렇게 된 건 아닐까, 신경이 쓰입니다. 그 후로 향기는 조금씩 바뀝니다. 자신이 체포하고 싶었던 사람들도 그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또 자신 역시 남들에게 사소한 잘못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갑니다.
『싯다르타』의 소설 속 싯다르타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문이 됩니다. 사문, 다른 말로 하면 탁발승입니다. 반 벌거숭이가 되어 밥을 빌어먹고 노숙을 하는 그런 스님이 되겠다는 말에 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그 길을 갑니다. 인간을 피부로 느끼며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 마침내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납니다. 이런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싯다르타의 앞에 아들이 나타납니다. 아들은 예전의 싯다르타처럼 자신을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그런 아들을 보며 싯다르타는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 누구도 이토록 사랑한 이가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토록 곁에 두고 싶은 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싯다르타를 버리고 도망쳐버립니다. 그 아이의 모습에서 싯다르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찌하여 그토록 나를 떠나려고 하느냐! 소리치는 자신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모든 것이 같구나, 모든 것이 내 안에 있구나 깨닫습니다.
향기와 싯다르타는 둘 다 자신과 남이 같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동화책 『목걸이 열쇠』 속 향기는 싯다르타처럼 인생의 진리를 알지는 않습니다. 향기는 여전히 사춘기이고, 혼자 있는 것이 싫을 뿐입니다. 부모님이 좀 더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줬으면 좋겠고, 좋아하는 친구가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줬으면 합니다.
너만 아프니?
나도 아프단 말야.
너는 돌봐줄 사람이라도 있지.
난 혼자 아파야 돼.
약도 내가 짓고
밥도 내가 찾아먹어야 되고
슬퍼서 죽겠단 말야!
생일을 나처럼 보낸 애가 있는 줄 아니?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너라도 내 속을 썩이지 말아야 될 거 아냐!
p. 91
그 모습에 씁쓸한 웃음이 납니다. 동화책 속 나오는 향기가 내 모습과 꼭 닮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마음속에 아이가 깃든 듯한 나의 철없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초록공책을 숨겨두고 속상한 일을 하나 둘 적어가는 내 자신이, 그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열쇠로 꼭꼭 잠궈두면서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일부러 잘 보이는 곳에 내놓는 마음이, 열쇠를 곁에 두고 “제발 날 좀 봐주세요!” 하는 그 목소리가 너무나 낯이 익어서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때문에 나는 싯다르타를 생각합니다. 모든 것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새깁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춰둔 초록 공책에 그 말 한 마디를 적고, 나머지 나쁜 마음은 차근차근 지우개로 지어갑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우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