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자살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자살을 꿈꾸는 때가 있습니다. 심한 분노나 공포, 슬픔이나 아픔이 사람의 마음을 좀먹어 삶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기는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순간만큼은 자신에게 절실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죽음을 무사히 넘깁니다. 잠시 동안의 슬픔, 고통, 아픔, 분노 안에서 유유히 흐르다가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집니다. 죽음을 꿈꿀 만큼 힘들었기 때문일까요, 조금은 더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럴 때 상상해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꿈꾸고 바로 죽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이 세상,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약한 부분만을 자살시키는 ‘정신자살’을 꿈꿀 수도.

 

그래서 나는 진정한 자살을 꿈꾼다

도진기의 ‘정신자살’



한 남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길영인, 이 남자는 일 년 전 아내 한다미가 사라진 이후 자살을 꿈꿉니다. 허나 죽기는 두렵습니다. 죽는 것은 괜찮지만 그 순간의 육체적 고통이 두려운 것이지요. 그리하여 길영인은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정신자살연구소를 찾아냅니다. 이곳에서 만난 ‘이탁오박사’에게 거금을 주고 정신자살시술을 받기로 계약합니다.


그렇다면 정신자살이 도대체 무엇이냐.


(전략) 길영인 씨께서 정신의 자살을 택했다면, 방법은 육체적 자살보다 훨씬 쉽고, 고통 또한 없습니다. 물론, 정신자살 자체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책이기도 하고요. 외과적인 수술은 아닙니다. 고뇌의 원인은 다양한데, 뇌의 어느 특정 부위를 잘라내거나 손을 본다고 하여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죠. 잘못 건드리면 뇌의 기능이 정지하거나, 저능아를 양산해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정신의 파괴이지 바보의 제조가 아니니까요. 또 여기 사무실 안을 보시면 알겠지만 외과적인 장비 따위는 일체 없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최면요법을 사용합니다.

(p.49) 



헌데 길영인이 정신자살시술을 받기로 한 이후 자꾸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납니다. 우선 일 년 전 사라진 아내 한다미의 주변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다미는 길영인 몰래 만나는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길영인은 이들을 찾아가고, 점점 아내의 가출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연이어 일어나는 살인사건들. 사건들은 점점 더 한다미의 가출과 길영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관성을 조명합니다.


이 상황에서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 이가 등장합니다. 어둠의 변호사 고진입니다. 고진은 길영인 때문이 아니라 정신자살연구소의 소장인 이탁오 박사와 악연입니다. 고진은 4년 전 우연히 이탁오 박사와 알게 된 이후 묘한 살인사건으로 인연이 아닌 악연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고진은 이탁오 박사와의 승부(?)를 마음 속 깊이 담아두고 있었는데요, 이번 사건으로(처음엔 얽힐 줄 몰랐지만) 다시 이탁오 박사를 만납니다.


정신자살의 이야기 전개는 상당히 복잡합니다. 일단 시점이 두 가지입니다. 길영인과 고진 변호사 주변의 3인칭 관찰자 시점. 이 두 가지 시점을 교차로 보여주며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거미줄과 같은 복잡한 얼개를 짭니다. 때문에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중간중간에 보이는 에피소드의 트릭들은 맞출 수 있어도, 마지막 반전을 맞추기는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허나 모두 보고 나면 이 모든 이야기 속에는 반전에 이르는 힌트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 참, 깨끗하게 “제가 졌습니다.”라고 승복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 속에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고찰도 숨어 있습니다.


 

흥미롭더군, 역시. 인간은 누구라도 다르지 않았어.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을 호들갑스럽게 동정하지만, 과연 내면에서도 그럴까? 상투적인 감상주의를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뒷감당 걱정 없이 결정하라면 그들은 어떤 모습을 띨까? 사람들은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자신의 주머니를 가장 먼저 들여다본단 말일세. 어느 누구라도 말이야. 자신의 목숨과 만 명의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 인간은 어느 쪽 스위치를 누를까? 아, 만 명이 부족하다면 백만 명은 어떤가? 백만 명이 죽어 자신이 산다면? 그것이 아니라면 그 반대편을 가볍게 하는 건 어때?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전 재산과 백만 명의 목숨, 자신 가족의 생명과 백만 명의 목숨이라면? 난 들키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는 조건 하에서는 인간은 주저 없이 자신 쪽을 보존하는 스위치를 누른다고 생각해. 무균 상태에서는 말이야. 그들이 유별난 욕심쟁이라고 생각하나? 절대 아냐. 보통 사람이야. 사람은 누구든 양심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선악을 선택해. 각자의 저울은 천차만별이라도 그 눈금은 하등 다르지 않은 게 인간이야. 인간이란 동물, 참으로 재밌지 않나... ...

(p.357)



이 묘한 이야기는 이야기의 마지막 한 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충격적인 결말의 마지막 한 장, 이 결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작가들이 써왔습니다만 이번 결말 역시 신선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일신의 안위를 위해 모든 것을 던졌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면 그것을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면 그 순간 결국... ...

그 인간은 완벽한 정신자살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고.

때문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괴롭다고 하더라도 선택을 내려야 할 때가 된다면,

인간이길 포기하기보다 죽어주겠다,

인간답게,

아무리 네가 날 슬프고 화나게 해도 티를 내지 못하고 그저 헤실거리는 비겁한 인간답게,

인간으로써 죽어주겠다, 라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