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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평점 :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그렇습니다. 블로그 이웃들의 덧글처럼 이 책은 정말이지 제목이 카피문구입니다. 아주 강력한 카피문구. 사실 카피문구만 좋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내용도 괜찮습디다. 이유도 있습디다. 이 카피문구에 어울리는 아주 제대로 된 이유가.
이유 있는 웃음이 좋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사랑도 아닌데 운명처럼 다가오는 책들이 있습니다. 생소한 느낌의 제목에 흠칫 놀라지만 일단 집어 들고 조금 지나고 나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게 됩니다. 작년 이맘때에 만났던 엔리케 빌라 마타스의 ‘바틀비와 바틀비들’이 그랬습니다. 이 책은 전체가 주석입니다. 주석 안에서 수많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글을 쓸 수 없는 작가’의 이야기를 말이에요. 것도 아주 특별한 형식, 모든 소설을 주석으로 적는 놀라운 실험으로! 저는 이 책이 서술방식은 물론 그 내용 역시 무척이나 감명 깊었습니다. 세상에나! 그렇지!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리고 일 년 만에 만난 책. 이 책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는 ‘바틀비와 바틀비들’을 닮았습니다. 아니, 이 책의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는 ‘바틀비와 바틀비들’을 오마쥬했다고 당당하게 밝힙니다.
피에르 굴드가 자신의 소명을 찾은 것은 바로 스페인 작가 엔리케빌라 마타스의 『바틀비와 바틀비들』을 읽으면서였다. 그 놀라운 책은 무능한 필경사인 화자가 어떤 상상의 텍스트 페이지 하단의 주석들처럼 구상한, 번호를 매긴 단락들의 형태로 전개된다. 그리고 그 모든 단락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자신의 자리를 절대로 떠나려 하지 않으면서 사무실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의 이름을 딴 바틀비들. 화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바틀비들은 종이에 글을 한 줄도 쓴 적이 없거나, 아니면 겨우 한 줄을 써놓고 결국 글쓰기를 포기한,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작가들이다. 그래서 엔리케 빌라 마타스는 “현대문학의 가장 혼란스럽고 아찔한 시도의 오솔길에서 ‘거부’의 미로를 산책해보라”고 독자들에게 권한다. 즉, “글쓰기란 과연 무엇인가를 자문하고 글쓰기의 불가능성 주위를 서성이며 맴돌아보라”고 말이다. (pp.223~4)
단편선의 한 작품 『단검에 찔린 유명인들에 관한 안내서』 의 서두입니다. 시작부터 특이합니다(웃음). 아니 이건 무슨 해설? 혹은 평론인가? 싶지만 이 소설은 이렇게 밖에 쓸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단편소설의 제목 『단검에 찔린 유명인들에 관한 안내서』 때문입니다(단편소설인데 제목을 단행본으로 적었습니다). 이 단편소설은 ‘바틀비와 바틀비들’이 주석으로 소설을 장식했듯, 단검에 찔린 유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거든요. 물론 그것만 있다면 서운하죠. 이유 있는 풍자, 웃음을 위한 소설가의 시선도 들어 있어요.
프랑스 문학 가운데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둘 꼽으라면 그것은 분명히 “오늘, 엄마가 죽었다”와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일 것이다. 굴드는 그 문장들을 하나씩 큰 소리로 여러 번 되풀이해 발음해보았다. 그 문장들은 언뜻 보기에는 별로 신통할 게 없다. 하지만 그 문장들의 단순함 그 자체가 진정한 천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문장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부터, 우리는 그 각각의 문장들이 앞으로 전개될 그 걸작의 내용과 꼭 들어맞게 의도적으로 구상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프랑스어가 원래부터 그처럼 완벽한 단어들의 조합, 프루스트나 카뮈 같은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조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굴드는 완벽한 첫 문장들이 주변 공기 속에 흩어져 떠돌고 있지만 위대한 작가들만이 그것을 발견하고 포착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위대한 작가는 당연히 위대한 책을 쓰기 때문에, 위대한 책들에는 언제나 완벽한 첫 문장이 있다. (pp.11~2)
표제작인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도 오마쥬입니다. 바틀비와 바틀비들의 이야기처럼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소설을 쓸 수 없는 남자 피에르 굴드를 이야기합니다. 피에르 굴드는 첫 문장을 쓸 수 없어서 두 번째 문장부터 쓰려고 결심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거, 다른 사람이 모르면 첫 문장 되는 거죠? 그래서 그는... ... 짓을 합니다! 궁금한 분들은 직접 펼쳐 보세요.
특히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 ‘거짓말 주식회사’였습니다. 말 그대로 거짓말을 파는 회사가 있답니다. 헌데 이 회사가 요즘 경영상태가 안 좋다네요. 아, 질 좋은 거짓말 쏟아내기 힘들어요. 게다가 요즘엔 거짓말이 탈진(?)상태예요. 오죽하면 제대로 된 거짓말을 쏟아내는 소설가 찾기가 힘들까! 그런 식의 이야기를 조잘조잘되는데 이것 참, 자꾸만 빨려 들어갑니다.
‘내 집 담벼락 속에’도 참 좋았어요. 혹시 아시나요? ‘벽을 드나드는 남자’ 라는 소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자는 벽을 드나드는 능력이 있었잖아요. 그러다 결국 벽에 갇혀(?)버리고. 헌데 이 남자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심지어 ‘내 집 담벼락’에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게다가 그 남자를 마침내 벽에서 분리해내는데 성공했다면? 이 남자는 현대시대를 보며 무슨 말을 할까요?
‘펼쳐진 책’과 ‘가게들(아홉 편의 짧은 이야기)’도 참 독특합니다. 이 소설들은 단편소설 속의 엽편소설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야기와 이야기가 차곡차곡 이어져서 마치 펼쳐진 책의 부분을 훑는 듯하달까요? 아! 그리고 '거짓말주식회사'와 '블록', '마지막 연주'는 꼭 잊지 말고 찬찬히 챙겨보세요. 여러분은 뜻밖의 ‘무언가’를 발견하고 웃게 될 거예요.
어제 이 책을 읽게 됐다고 했을 때 이웃님들 중 한 분께서 이 작가의 또 다른 책 ‘육식 이야기’를 말씀해 주셨더랬어요. 아무래도 저, 이 책도 사서 읽을 것 같네요. ‘다른 남자’를 읽고 나서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저는 아무래도 읽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