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릿광대의 나비
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는 TEXT이자 BIBLE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NOBLE이나 STORY의 영역을 넘어섰습니다. 셜록 홈즈가 하나의 존재로 인정을 받았고, 이 이야기를 갖고 사람들이 무한한 창작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그 인물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그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면서 셜록 홈즈는 결코 죽을 수 없는 무한한 존재가 되었으며 끊임없이 발굴하고 발굴하여도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기에 셜록 홈즈는 단순한 NOBLE이나 STORY가 아닌 TEXT, BIBLE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소설이 셜록 홈즈처럼 TEXT나 BIBLE로 훌쩍 뛰어넘긴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 한 권의 소설이 스스로 TEXT가 되려면, BIBLE이 되려면 어떤 짓을 해야 할까요? 이 책, 엔조 도의 ‘어릿광대의 나비’에 그 해답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TEXT로 날아오른 한 A. A. 혹은 나비

엔조 도의 ‘어릿광대의 나비’

  

얼마 전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의 리뷰를 올렸었습니다.

 

이유 있는 웃음이 좋다  http://cameraian.blog.me/130152832548

 

이 소설은 메타소설로써 확실히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습니다. 메타소설, 다른 말로 METAFICTION이란 말 그대로 소설이 소설이 되게끔 하는 모든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을 일컫습니다.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와 ‘바틀비와 바틀비들’은 제목처럼 소설을 쓰는 과정을 지리멸렬하게 이야기하는데요, 이 소설 ‘엔조 도’의 ‘어릿광대의 나비’ 역시 그러합니다.  

‘엔조 도’의 ‘어릿광대의 나비’의 첫 시작은 비행기 안입니다. 한 인간이 한 인간을 만납니다. 한 인간은 비행기 안에서 생각을 낚시합니다. 이 인간, 비행기가 이동을 할 때 사람들의 생각이 체내에서 빠져나온답니다. 그 생각을 낚는 방법을 이 인간은 알고 있다나요? 은으로 만든 그물과도 같은 망, 자세히 보니 아니 이것은! 곤충채집망이 아닙니까?! 그걸로 생각을 낚는다고요?! 그 생각으로 돈을 번다고요?! 게다가 아주 독특한 사업도 진행하시네요! ‘그 장소에서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뇨!


 

재탕을 노린 ‘호화 여객선에서만 읽을 것’은 아무래도 너무 안이하게 비친 탓에 오래도록 무시당했지만, 질리지도 않고 이어진 ‘통근 전철에서만 읽을 것’, ‘고등학교 앞 언덕길에서만 읽을 것’이라는 실패를 거쳐, 거의 자포자기로 보이는 제목인 ‘오토바이 위에서만 읽을 것’ 독일어판이 태평양을 횡단하는 대형 여객기 안에서 읽기에 적합하다고 판명되면서 멋지게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었다. 이때부터 ‘~에서만 읽을 것’ 시리즈는 그 책의 어느 언어판, 어느 판형을 어디에서 읽는 것이 적절한지를 찾는 게임으로 인기를 얻었다. 어릿광대의 나비, p.21

 

 

다시 곤충채집망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이 곤충채집망으로 낚는 생각들, 그 생각들엔 아주 예쁜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아를레키누스 아를레키누스’ 라틴어로 의미는 ‘어릿광대’랍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나비인데요, 재미난 것은 이 나비를 처음으로 잡은, 요 묘한 사업을 일으킨 ‘사람’의 이름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A. A. 에이브럼스. 흠, 나비에서 이름을 따왔을까, 아니면 이 사람의 이름이 나비로 갔을까요?  

이 소설 ‘어릿광대의 나비’는 에이브럼스의 이야기처럼 무엇이 먼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 이 순간에는 이것이 보였다 싶었는데 다음 순간에는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혹은 저곳에 존재하는 척했다가 귓속말을 걸기도 합니다. 상당히 귀찮습니다. 그래서 모른 체하면 징징거립니다. 왜 내가 보이면서 안 보이는 체하는 거야!

정말이지 소설을 쓰는 과정을 보는 듯합니다. 소설을 쓰다 보면 온갖 잡스런 생각들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그리하면 저는 거대한 포충망을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 요리조리 이야기들을 모읍니다. 이 모은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100000000피스짜리 퍼즐 맞추듯 이곳에 뒀다가 저곳에 뒀다가 하다 보면 이야기가 드러납니다. 그 이야기는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었을텐데 낯섭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한 번 이야기를 잡아냈을 때, 또 나라는 사람을 거쳤을 때, 다시금 모습을 바꾼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어떨 때엔 내가 아니라 내 손이, 혹은 내 눈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즉, 지금 타자를 치는 이 손가락은 내 손이지만 내가 아닌, 글을 쓰는 누군가가 조종을 하는 것이고 이 눈은 나이지만 내가 아닌 독자라서 내 손이 만든 글을 내 눈이 보고 무어라 조언을 하면 그 이야기를 손이 듣고 고치고 그 과정에서 잠시 입이 끼어들여 툴툴거린다던가 하면 시끄럽다고 짜증도 내고 잠시 잊혀진 위장이 꼬르륵 소리를 내며 지금 그렇게 싸울 틈이 아니다 이러다 우리 모두 굶어죽는다 같은 소리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 읽는 것 읽히는 것 듣는 것 들리는 것 그 모든 것은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래의 착상에서 멀리 떨어진 것을 우리의 손이라는 다섯 손가락의 그물망으로 잡아낸,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본다고 착각하며 사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해한 척하는,

그런 거만한 생각의 끝에 치달은 이기심의 사치가 바로,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

소설을 쓴다는 행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들은 진실만을 쓰는 게 아니에요.

진실만을 쓰는 게 아닌데

진실보다 커다란 것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왜 그런가요."

 

마쓰노에의 기록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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