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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평점 :
畢生.
생각만 해도 숨이 멎을 듯 거창한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쥐어짜내는 것, 그것이 바로 필생입니다.
헌데 이 '안주'라는 책에는 필생의 사업이라는 띠지가 붙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이런 띠지가 붙었을까요.
미미 여사님,
당신에게 있어 '필생의 사업'이란 무엇입니까?
미야베 미유키의 '안주'

저는 시급 5,500원을 받으며 커피집 바리스타 아르바이트를 하며(요즘 이웃이 된 분들은 모르셨죠?), 매달 동생과 함께 주택대출금과 여러 빚을 갚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직업으로 바리스타를 하여 점장이라도 떡하니 맡았다면 월급을 꽤 받을 텐데 저는 8년째 아르바이트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제대로 직업으로 바리스타를 하게 되면 그만큼 글을 쓸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바리스타는 제 직업이고, 생업이지만, 글쓰기가 더 중요합니다. 저는 글쓰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딱 잘라 모두 '싫습니다.' 글을 중심으로 독서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그 안에서 새로운 글을 찾아내는 일을 반복합니다. 때문에 미야베 미유키 여사는 제가 볼 때엔 이미 이룰 것을 다 이룬 사람처럼 보입니다. 헌데 일본 현지에선 이 책의 시리즈를 필생의 사업이라고 말했다니,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렇다면, 왜일까.
이 말이 유독 가슴에 와 닿아서, 한국어 판의 제목을 ‘흑백’으로 정했다. 『흑백』이 출간된 2008년 당시, 일본 현지에서는 “미야베 미유키 씨가 라이프워크(필생의 사업)인 백물어(괴담 대회)를 쓰기 시작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는데, 스페셜 인터뷰를 통해 작가는 이렇게 밝혔다. “『흑백』 자체로 보면 매우 슬프고 심각하며 이야기가 무섭게 구성되어 있지만, 이걸로 ‘우와 무서워’ 하고 생각한 후에 『안주』(한국어 판 제목 미정)를 읽으면 좋은 느낌의 칵테일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노리고 홀수 권과 짝수 권의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습니다. 역으로 『안주』를 읽으신 분들 중에, 괴기소설이면서도 이렇게 귀여운 이야기뿐인 거야? 하고 생각하신 분들은 『흑백』으로 돌아와 보시면 매서운 이야기가 잔뜩 있습니다. 양쪽에서 서로 다른 맛을 느끼실 수 있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은 없을 겁니다.”
출처 :
북스피어 블로그 http://booksfear.com/476
도대체 무엇이 작가에게 이런 말을 하게 했을까, 궁금하더군요.
하여 저는 흑백을 읽었고 아아, 저 위의 인용문을 마음 깊이 느꼈습니다.
과연, 필생의 사업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라고요.
에도하고도 미시마초의 한 귀퉁이에 있는 미시마야라는 주머니가게, 그 가게에 묘한 방이 하나 있습니다. '흑백의 방'이라는 이름의 방입니다. 이 방은 이름처럼 처음엔, 바둑을 두는 방이었습니다. 주머니가게 주인 이헤에 씨가 손님들을 초대하여 바둑을 두던 곳이었는데요, 이곳 미시마야에 조카딸, 17세의 오치카가 몸을 의탁하게 되면서 상황이 사뭇 달라집니다. 어느날 이헤에 씨가 우연히 자리를 비워 오치카가 흑백의 방에서 기다리는 손님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손님은 뜻밖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놀랍게도 오치카는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마음의 짐을 달래주었습니다.
이헤에 씨는 이 이야기를 듣고 '흑백의 방'을 다른 용도로 쓰기로 합니다. 본래는 바둑의 흑돌과 흰돌을 둔다고 하여 흑백의 방이었던 곳을 오치카가 누군가의 기이한 사연을 들음으로써 흑과 백을 논하고, 가리고, 치유하는 흑백의 방으로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이후 미시마야에는 오치카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옵니다.
헌데 오치카도 그저 평범하기만 한 17세 소녀는 아니었습니다. 하긴, 평범한 소녀였다면 애시당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마음을 달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오치카의 사연은 서서히 밝혀지고, 그 사연 속에서 우리는 흑백의 방이 지금 내가 있는 이 세상은 아닌가, 잠시 고민하고,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다가도 그 깊은 저주와도 같은 흑백, 구별되지 않는 회색 빛 속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흑백의 이야기가 대략 저리하다면 안주는 사뭇 다릅니다. 절절하여 가슴이 아프기만 하였던 사연이 가득하였고, 그 안에서 한 줄기 빛을 보여주었던 흑백의 한 쌍, 마치 거울의 양면과도 같은 안주는 우리에게 따뜻함을 보여줍니다. 이번 흑백의 방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기묘합니다. 헌데 무섭지가 않아요. 오히려 귀엽고, 왠지 애처롭습니다. 이 기묘한 인물들, 혹은 존재들은 결코 우리와 비슷한 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그 사연들 역시 마찬가지예요. 헌데 참, 귀엽습니다. 참, 애처롭습니다. 우리 자신 속에 숨은 부끄러움, 슬픔, 외로움, 그 모든 것을 이 기묘한 존재들이, 사연들이 속삭입니다. 흑백의 방에서 들려줍니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따뜻함을 느끼려고, 그 안에서 또다른 존재로써, 떨어져 있지만 행복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는 흑백의 방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감히 말할 수 없는 슬픔이나 외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겠고, 죄책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야베 미유키 여사는 이 책 '안주'에서 그 이야기를 해보라고 속삭입니다. 지금,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흑백의 방을 찾아온 사람들처럼 우리에게, 마음 속 깊이 숨겨놓은 그 상처를, 아무리 치유된 척하더라도 치유되었을 리 없는 그 상처를 나에게 말해 보라고 속삭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안주'라는 이름의 귀여운 흑백의 방에서 조근조근 속삭여 보았더니 미야베 미유키 여사는 저에게 ... ...
너는 또 혼자가 되겠지. 이 넓은 저택에서 홀로 살게 될 게다.
하지만, 구로스케. 같은 고독이라도, 그것은 나와 하쓰네가 너를 만나기 전과는 다르다.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거다. 하쓰네도 너를 잊지 않을 게야.
멀리 떨어져서 따로 살더라도 늘 너를 생각하고 있을 게다. 달이 뜨면, 아아, 이 달을 구로스케도 바라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할 게다. 구로스케는 노래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게다. 꽃이 피면, 구로스케는 꽃 속에서 놀고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게다. 비가 내리면, 구로스케는 저택 어딘가에서 이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게다.
얘야, 구로스케. 너는 다시 고독해질 게다. 하지만 이제 외톨이가 아니란다. 나와 하쓰네는 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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