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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뒷표지
저 남자가 누운 것이 뭐 같아요?
1997년,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저는 우연히 무라카미 하루키를 알았습니다. 학교나 학원에서 들었을까요? 아니면 과외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아아, 그 때부터 변소님은 문학소녀셨군요?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아니었습니다.
pc통신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천리안에서 잡퀴방이라는 소모임에 가입해 있었고, 그곳에서 많은 어른들과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때에 만난 어른들은 하나같이 술 좀 마셨다 하면 "이상문학상"이니 "하루키"니 "류"니 하는 말을 입에 거들먹거렸습니다. 특히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를 다닌다는 언니오빠들은 더해서는 "빵집습격사건"이니 "상실의 시대와 노르웨이의 숲의 번역이 어떻게 다르다"니 하는 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였고, 저는 그저 듣기만 하였습니다. 단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저 사람들은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 탁상공론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향긋한 소주냄새에 취해 방긋방긋 웃느라 바빴달까요. 저는 "응, 그래." "그럼요. 오빠는 진리죠."같은 적당한 말대꾸를 하면서 생글거리며 속으로는 "하루키고 류고 자시고 술이나 마셔라 좀."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너네들 때문이라도 반드시 하루키와 류는 안 읽어주겠다."는 묘한 결심을 했습니다.
정말 하루키도 류도 읽지 않고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헌데 들어간 과가, 아아! 어울린 인간들이 죄다 그쪽이라 그런가 문예창작학과였고, 결국 이렇게 저렇게 접하다 보니 또다시 수업시간마다 "하루키"니 "류"니 "일본소설은 가볍다"니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매우 귀찮고 짜증이 나더군요. 하여, 마침내 대학 일년생 때 하루키를 손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접한 하루키는... ...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대로 읽기 시작해서 도서관에 꽂혀 있던 하루키의 모든 저작을 읽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언더그라운드'를 좋아했습니다-그러고 보니 언더그라운드는 논픽션이네요. 당연히 바로 옆에 나란히 꽂힌 무라카미 류도 몽땅 싸그리 다 읽었고, 무라카미 류의 작품들 중에서는 특히 '코인로커베이비스'를 좋아했습니다- 하루키보다는 류를 더 좋아했습니다.
이후로 일본작가들의 작품을 야금야금 먹어치웠습니다. 야마다 에이미의 120%cooool은 특히 좋아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시게마츠 기요시의 따뜻한 소설들도, 유미리의 소설들도 새록새록합니다. 그 후로도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인연은 계속되어서 몇 년에 한 번씩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야금야금 읽기는 했습니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이 책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입니다.
표제작을 전 참 좋아합니다. 또 이 작품집의 마지막 작품에는 '양을 둘러싼 모험'과 '1973년의 핀볼'에서 언급되는 '양사나이'가 등장합니다. 사실 저는 그 '양사나이'를 읽으려고 이 작품집을 읽었었습죠. (맞나. 아니면 부끄러운데.) 그런데 제가 읽었을 당시에도 이 제목의 책이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습니다요. 아무튼 오랜만에 저 표제작이 읽고 싶어 서점에 갔는데, 마침 서점에 딱 있더군요. 바로 눈에 띄는 자리에 딱, 떡, 딱. 마치 제 손에 닿기 위해 그곳에서 오래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때문에 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 책을 샀고, 표제작을 읽었고, 마지막의 양사나이를 다시 만나며 "아아, 그랬었지. 그랬던 거였어."라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렇게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는 이름도 제대로 외우기 힘든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 중 제가 최초로 구입한 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새로운 책이 또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바로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입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살 생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기묘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저의 눈에 어떤 '것'이 보였고, 그 때문에 저는 기묘한 시공간의 틈으로 빨려들듯 갑자기 불안해져서는 "이 책을 사야만 해!"라고 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포스트잇과 책의 사이즈 비교.
그리하여 저의 이 책을 쫓는 모험은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포스트잇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출근을 하다 버릇처럼 트위터에 접속했다가 이 책을 사면 포스트잇을 준다는 비채의 멘션을 발견합니다.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포스트잇이 있다니! 바로 갖고 싶어졌습니다. 일전에도 비채에서 나온 스노우맨을 책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단지 포스트잇을 받기 위해 구입한 선례가 있습니다. 그대로 코엑스 반디엔 루니스에 들렀고, 서점은 '4월의~' 단편집 마지막에 실린 '도서관 기담'의 첫 장면처럼 아주 조용했습니다. 점알, 책이 소리를 전부 흡수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책이 어디에 있나 확인하였고, 책을 한 번 들여다 본 후에 일단은 내려놓았습니다. 다음 날 18일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선물을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다음 날, 친구들을 만났고, 친구들에게 이 책을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물론 목표는 포스트잇이었기에 포스트잇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일까요? 포스트잇은 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럴 리가. 저는 분명 비채 담당자님의 멘션을 확인하고 왔는데요. 어쩌면 아직 서점에는 전달이 안 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일단 포기하였습니다. 대신 같은 비채의 책 '스피벳'을 구입-아니 선물받았습니다.
일전 블로그 이웃 훙치뿡캭 양에게 추천받았던 책입니다. 약간은 불만스러웠지만 일단 책 자체가 너무 예뻤기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또 다음 날에도 저는 반디앤루니스에 들러서 포스트잇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이 책을 사면 포스트잇을 사느냐고 꿋꿋하게 물었지만 이상하게도 포스트잇은 없다는 이야기만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마침내 저는 비채 담당자님께 "받으실 수 있어요!!"라는 확인을 받았고, 신이 나서 바로 달려가 포스트잇-아니 책을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포스트잇은 없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어째서?
왜?
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분명 트위터에서는 포스트잇을 준다고 하였는데 왜 이곳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가? 순간 저는 묘한 기분에 빠졌습니다.
어쩌면 저곳, 트위터 속에서 내가 비채 담당자님과 이야기한 세상과
지금 제가 발을 딛고 선 이 코엑스 반디앤루니스란 세상은
전혀 다른 공간인 것은 아닐까.
전혀 다른 시간인 것은 아닐까.
세상은 어쩌면 아주 이질적인 공간으로 갈려 있는데,
나는 포스트잇을 뒤쫓다 보니 어쩌면 그 틈새로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책을 사도 포스트잇을 받지 못하는 세상으로 와버린 것은 아닐까.
저는 혼란에 빠져 비채 담당자님께 불안한 마음에 멘션을 날렸고, 마침 담당자님은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점점 더 불안해졌고, 앞에 서 있는 카운터의 직원들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침묵과도 같은 5분이 지났고, 어디선가 한 명의 여직원이 달려왔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 땀을 뻘뻘 흘리며 여직원은 나타나 저에게 포스트잇을 건넸습니다.
저는 포스트잇을 받으며 안심했습니다.
모든 것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서관 기담'을 다시 읽은 탓이야.
그런데 문뜩 서점을 한 걸음 나섰을 때 또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 여직원이 포스트잇이 존재하는 또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은 아닐까? 도서관 기담에서 나오는 그 지하와도 같은 세계로 저 여직원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달려갔다 온 것은 아닐까? 그 여직원은 나때문에 포스트잇을 둘러싼 모험을 치른 것은 아닐른지.
그 순간, 어디선가 '음메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제가 손에 든 책에서 들렸다고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요.

분홍색 속표지에 포스트잇을 저렇게 붙여봤습니다.
작가프로필과 함께 어슷하게 보니, 멋집니다.
이러니 무라카미 하루키 님은 여자독자(특히 예쁜)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아, '저처럼'이란 수식어를 까먹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님은 '저처럼' 예쁜 여자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하루키 풍으로 좀 읊조려 봤습니다. 뭐 대강 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렇게 책을 구했고 -정확히 말하자면 포스트잇을 구했고- 책은 좀 느긋하게 읽을 예정이었습니다. 현재 시귀 리뷰이벤트가 북홀릭서 진행중이라서 것부터 도전하고 싶어서 말이에요.
북홀릭 시귀리뷰대회 http://cafe.naver.com/hibookclub/468
하지만 이웃님들이 갑자기 이 에세이집에 대한 포스팅을 시작하더군요. 정확히 누가 제일 먼저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나, 가장 인상깊었던 포스팅은 오늘 새벽에 본 특급변소인증스토커 japanbooks님의 서평입니다.
http://blog.naver.com/japanbooks/20162810522
japanbooks님의 서평 중 특히, 목차를 파란 글씨로 나열한 바로 아래에 있는 기다란 문장은 꼭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그 한 문단만으로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사람인가,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서평을 보고 무척 기분이 좋았고, 때문에 사실 이 책은 한참 후에 읽을 생각이었으나 오늘 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아.
너무 좋더군요.
제가 이렇게 '하루키와 포스트잇을 둘러싼 모험'을 적고 싶어질 만큼, 하루키의 가벼움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아저씨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는 마라톤 귀신 무라카미 하루키 씨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직 안 읽은 분들 계십니까?
읽으세요.
참,
좋네요.
네이버 블로그 원문은 이쪽.
http://cameraian.blog.me/130143326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