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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고코로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의 선택의 연속입니다. 여러 갈래로 뻗은 교차로에서 우리는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를 고릅니다. 물론 특이한 사람들은 이 갈래길을 무시하고 직진, 산을 넘거나 터널을 뚫기도 합니다. 또 어떤 소심한 사람들은 겁이 나서 그 자리서 주저앉거나, 뒤로 물러서기도 하고요.
저는 선택의 상황이 오면 일단 숨을 가라앉힙니다. 일단 제 자신을 들여다 봅니다. '무엇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 후에, 양갈래길 중 어느 하나를 고민할까, 아니면 터널을 뚫어? 그도 아니면 저 황무지로 가? 고심하다 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가끔은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감상에 젖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너무 힘이 들어 다 그만두고 싶다, 이러는 게 아닌데, 후회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나아가기를 멈추지는 않습니다.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요.
또,
그 길의 끝에는 분명 제가 상상치도 못한 어떤 행복한 결말이 있으리라 상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저는 밑도 끝도 없는 낙천주의자입니다.
이번에 읽은 소설 '유리고코로'의 주인공이 그랬습니다.
대책없는 낙천주의자,
이 기묘한 상황에서도 묘하게 밝은 남자,
전 그렇게 보았습니다.

얼마 전 저는 이 작가의 소설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을 읽었습니다. 그 서평을 적었습니다. 뜻밖의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그저 이 소설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정말 좋아요!"라고 말했을 뿐인데 알라딘서는 이달의 우수서평? 이름 맞나요? 이런 것에 뽑히고, 출판사 편집장님께서도 연락을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책도 한 권 받았고(이 책도 참 재미나게 읽어서 곧 서평을 쓰려고요.) 후에는 신문기사에서 코멘트도 나갔습니다.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http://cameraian.blog.me/130139322403
추리소설, 男들보다 손 큰 女心을 파고들다
http://news.donga.com/3/all/20120612/46934908/1
두 번째 링크에서 언급된 '조영주'가 접니다.
헌데 이후로 난감한 일이 일어났더군요. 이 책에 대해 상당히 불쾌했다는 평이 올라오고, 이런 책은 사서는 안 된다든가, 왜 이런 책을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이야기가 한참 나오는 것을 보고는 참 안타까웠습니다. 뭔가 괜히 가슴 한 구석이 찌릿찌릿하더군요.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가요, 소재와 주제는 다르고 어떤 소재든 작가가 잘 포장을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누마타 마호카루의 소설은 소재의 선택은 상당히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이 작가의 마음이 와닿았기에 이 소설은 훌륭하다고 느꼈습니다.
작가는 두 편의 소설 모두 파격적인 소재를 다뤘습니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리노 나쓰오의 잔혹기는 어떻습니까?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는요? 이 두 소설 역시 소재 자체는 상당합니다. 화차는 상당히 점잖게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기리노 나쓰오의 잔학기는 상당합니다. 그밖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소설 합작-살인을 위한 살인도 있습니다.
지금 당신, 살인을 꿈꿉니까?
http://cameraian.blog.me/130107368399
누마타 마호카루에 대해 혹독한 이야기를 해주신 여러분들께서 이 세 권의 소설을 읽는다면 어땠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꼭 보고 나서 말씀해주십시오. 그 이야기, 귀기울여 듣고 제가 글을 쓸 때에 꼭 참고하겠습니다. 저는 이야미스 류보다는 정통 탐정물을 추구하지만, 그래도 궁금하네요. 공부가 될 듯합니다.
하여, 저는 이 책을 정말 재미나다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이 소설이 싫었나? 그렇다면 내가 이 책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한다고 한 마음은 잘못된 것인가? 때문에 저는 잠시 우울해졌습니다. 이번 '유리고코로'를 읽기 전까지도 계속해서 그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머뭇거리다 마침내 이 소설을 읽었고,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결과는 아래의 사진과 같았습니다.

포스트잇을 끊임없이 붙였습니다.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었습니다. 이 지독한 소재를 이토록 따뜻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에 감탄했습니다. 이미 이 책의 줄거리는 꽤나 유명해졌으니 설명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혹시나 아직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덧붙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한 남자입니다. 남자는 우연히 공책 한 권을 발견하고, 그 공책 안에서 '우리 부모님 중 누군가가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발견합니다. 남자는 당황하면서도 기묘한 수기, 혹은 소설에 심취합니다. 자신의 현실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지독히 차갑고 쓸쓸한 살인의 연대기에 푹 빠져듭니다. 결코 있을 수 없고, 이런 일이 어떻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어? 라고 생각했던 살인의 연대기, 사이코패스의 생활이 차츰 몸에 와닿으며 남자는 변해갑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신의 매우 가까운 곳에 이런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제부터 앞으로 내가 얼마를 살든,
그런 형편없는 여자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앞에 나타나는 어떤 괜찮은 여자에 대해서도
그 형편없는 여자에게 가졌던 애정은 품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다.
p. 237
남자의 심리묘사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전염되나 봅니다. 소재 자체의 기이함, 불안함과 상식파괴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예전에도 몇 번이고 여러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그런 기시감입니다. 과연 이 세상의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 현실을 깨부수는 것은 어떠한가, 라고요.
혼란스러웠습니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이, 그러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렇게 살아가도 되는 것인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아무런 철퇴도, 형벌도 가해지지 않는다면 과연 이 사회는 옳은 것인가.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아마도 혼란을 혼란 그대로 안고
살아간다는 게 아닐까.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영원히 풀릴 수 없는
또 하나의 혼란이라는 것을
깨닫는 게 아닐까.
p. 293
이 고민은 소설 속 수기의 주인공 '싸이코패스'가 하는 고민과도 같았습니다. 싸이코패스는 자신의 삶에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해지지 않는 이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그는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자신의 현실을, 모두가 혐오스럽고 보고 싶지 않을 그런 비참한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을 마구 망가뜨리고, 부숩니다. 누군가가 구원해줄 리 없다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그저 숨을 쉽니다.
살아있어야 할 의미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혼돈이라는 이름의 지옥을,
삶이라는 이름의 절망을요.
이 수기를 본 주인공 '나'는 자신의 곁에 존재하던 절망이란 삶을 깨닫고 한 가지 선택을 합니다. 결코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선택,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은 무엇일지,
여러분의 눈으로 확인하십시오.

그래도 때때로 겁먹은 듯 허공을 바라보고
이유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부서진 의식 어딘가에 꽂혀 있는
기억의 가시가 찌릿,
고통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p.302
마음 같아서는 그냥 5점입니다만,
취향의 문제가 크니까요.
때문에 별점은 3.5입니다.
대신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이 너무 좋았던 관계로 그 분위기와 이 소설의 따뜻함,
을 높이 평가하여 4점으로 반올림하였습니다.
서평 원문은 이쪽 :
http://cameraian.blog.me/130141975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