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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제
츠네카와 코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저는 어제 갑작스레 한 편의 엽편소설을 썼습니다. '단 한 걸음'이라는 소설이었는데요, 블로그에 와서 이 소설을 본 이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도대체 이 소설은 무엇인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가.
저는 흥미가 돌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초제'의 서평은 이 엽편소설로 문을 열고자 결심하였습니다.
단 한 걸음
그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딱 한 걸음만 더 딛으면 문을 통과할텐데 사내는 문을 열 수 없었다. 누군가 사내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철사와도 같은 손이 낯익었다. 집에 두고 온 아내의 손이었다.
아내.
현미밥에 된장찌개, 한상가득 아침을 차려준 아내.
눈썹이 처진 아내.
사내의 반쪽도 되지 못하는 아내.
입술을 몇 번이고 오물거려도 결국 "당신 바람 피워요?"라는 한 마디를 묻지 못하는 아내.
아내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는가.
사내는 아내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혹시라도 아내가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을까봐, 사내에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말을 못하여 어쩔 줄 몰라하다 눈물을 터뜨릴까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기 전에, 그 입술을 바라보기 전에 입으로 입을 막았다. 짓무르도록 문질렀다.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사랑했었다."라는 말을 그 닫힌 입술로 이야기했다.
입술을 뗐다. 한 걸음 딛었다. 그 집의 문을 열었다. 등뒤에 새하얀 철사같은, 허나 입술만큼은 붉게 타오르는 아내를 두고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문이 닫히며 내뱉은 나직한 비명에 아내는 주저앉았다.
여러분은 지금 이 짧은 엽편에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저는 이 엽편소설에서 무엇을 이야기했습니까?
지금 떠오르는 '그것'을 메모하십시오.
초제草祭 : 단 한 걸음 딛은 곳에 비오쿠美奧가 있었다.
십 년전의 일입니다. 저는 한 의학관련 신문사에 면접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면접시간은 9시 30분이었으나 8시에 집을 나섰습니다. 혹시라도 시간에 늦어 면접을 보지 못하면 어쩌나 불안했습니다. 역시나, 시간은 남았습니다. 아침 9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에 목적지 을지로3가 역에 도착하였고, 신문사는 역에서 걸어서 5분거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여유롭게 역을 나섰고, 너무 일찍 온 탓에 면접에 악영향을 받으면 어쩌지 걱정까지 했습니다.
헌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5분, 정확히 을지로3가역에서 직진하여 5분이면 도착할 곳에 그 신문사는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신문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마치, 을지로 3가역을 나오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에 빠져버린 듯 제 눈에만 그 신문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5층짜리 전면이 거울로 된 건물이라고 하였습니다. 4거리가 보이자마자 바로 우편 맞은편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지 못했고, 자그마치 다섯 번이나 전화를 했습니다. 주변을 빙빙 돌았습니다. 시각을 확인하니 이미 면접시각은 지나버렸고, 저는 전화조차 하지 않고 자포자기 해버렸습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여기가 정말 내가 아는 서울이 맞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문제의 4거리로 터벅터벅 걸어갈 때, 저는 발견했습니다.
어디로 갔을 리 없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듯 굳건하게 선 5층짜리 전면거울건물을요.
무엇에 홀린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면접이 더 중요했습니다. 헐레벌떡 들어갔습니다. 30분이 늦게 면접장에 도착했으나 운 좋게도 제 직전에 면접을 본 사람이 한 시간이 넘게 면접을 보는 바람에 무사히 면접을 치렀습니다. 게다가 전격 합격하여, 기자생활을 했더랬습니다.
후에 몇 번이고 제 전화를 받았던 직원이 참 신기해 했습니다. 도대체 그 짧은 거리에서 어떻게 이 건물을 찾을 수 없었는지, 대체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았지만 저는 끝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알 수 없었으니까요.
대체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 눈에는 그저 그 건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초제의 배경인 비오쿠가 그렇습니다.
아지랑이도마뱀은 특별히 존재가 애매모호한 영역에서 살고 있었던 것일 테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두 많든 적든 애매모호한 균형 속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뭔가 하나의 요인을 옮기거나 교체하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일은 흔하잖아.
p. 259, 초제
초제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비오쿠라 불리는 신비한 공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비오쿠는 산 속 어딘가이기도 합니다, 혹은 수로의 끝에 닿기도 하며, 우리가 사는 이 마을이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하나같이 몽롱합니다. 도대체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 이곳은 무엇이며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 혼란스럽습니다. 안개에 쌓인 듯, 장님 코끼리 더듬듯 그렇게 헷갈리기만 합니다.
하나의 비오쿠는 모든 것이 버려진 수수께끼의 벌판입니다. '짐승의 들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수수께끼를 접하고 수수께끼가 되어갑니다.
하나의 비오쿠는 현재의 소도시입니다. '지붕위의 성성이'와 '텐게의 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너무나 평범한 듯 살아가지만, 그 평범한 현실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갑작스레 사람이 도깨비가 되지 않나, 저도 모르게 도피해서는 세상을 피하려들지 않나, 참으로 묘한 일만 일어납니다.
하나의 비오쿠는 탄생하고, 이어집니다. '풀의 꿈 이야기'와 '아침의 몽롱한 마을'을 통해 비오쿠 자체의 생존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다섯 개의 하나로 나뉜 비오쿠는 정말 어디일까요.
무엇일까요.
문을 지나서 조금 더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어두운 숲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숲 너머에 도무지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단 벗어나면 쉽게 돌아갈 수 없게 하는
환술 때문인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사뭇 가벼워졌다.
p. 126, 천둥의 계절
작가의 또다른 책 '천둥의 계절'에는 '온'이 등장합니다.
온은 세계지도에 없는 곳입니다. 일본에 속하지만 속하지 않습니다. 온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선택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일본은 자신들보다 아래에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온과 일본을 나누는 경계가 바로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입니다.
이 벌판에는 야수가 삽니다. 누군가는 야수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또 누군가는 신을 빙자한 사람의 손에 '천벌'을 받아 그대로 버려집니다. 바람에 시체가 날려 썩어 문드러져, 해골이 남을 때까지 육신은 벌판을 떠나지 못합니다.
비오쿠와 같습니다.
비오쿠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비오쿠에서 살아갑니다. 비오쿠에 빠진 이는 비오쿠가 됩니다. 비오쿠를 만든 이도 비오쿠가 되며, 비오쿠를 이끌어가는 이도 비오쿠가 됩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그곳,
모든 것이 살아있되 살아있지 못하는 그곳이 바로 비오쿠입니다.
서평의 서두에 올렸던 엽편소설로 돌아가겠습니다.
단 한 걸음
그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딱 한 걸음만 더 딛으면 문을 통과할텐데 사내는 문을 열 수 없었다. 누군가 사내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철사와도 같은 손이 낯익었다. 집에 두고 온 아내의 손이었다.
아내.
현미밥에 된장찌개, 한상가득 아침을 차려준 아내.
눈썹이 처진 아내.
사내의 반쪽도 되지 못하는 아내.
입술을 몇 번이고 오물거려도 결국 "당신 바람 피워요?"라는 한 마디를 묻지 못하는 아내.
아내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는가.
사내는 아내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혹시라도 아내가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을까봐, 사내에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말을 못하여 어쩔 줄 몰라하다 눈물을 터뜨릴까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기 전에, 그 입술을 바라보기 전에 입으로 입을 막았다. 짓무르도록 문질렀다.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사랑했었다."라는 말을 그 닫힌 입술로 이야기했다.
입술을 뗐다. 한 걸음 딛었다. 그 집의 문을 열었다. 등뒤에 새하얀 철사같은, 허나 입술만큼은 붉게 타오르는 아내를 두고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문이 닫히며 내뱉은 나직한 비명에 아내는 주저앉았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이야기했습니까?
당신이 나의 엽편 소설에서 읽어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서평을 읽기 전과 ,
읽기 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이 바로,
美奧
입니다.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는 그곳,
당신은 지금 그곳에 왔습니다.
환영합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영원한 벌판,
인생이라는 이 벌판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애당초 인간은 매일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게 아닐까.
p. 322, 초제
사진과 함께 보는 서평은 이쪽 :
http://cameraian.blog.me/130140457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