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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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경이로운 이야기이다. 이렇게나 드라마틱한 인생도 없을 것이다. 험난한 배움의 여정을 겪은 어느 소녀의 일대기이고 고군분투하는 성장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평생 학교 문턱에 가보지도 못하던 소녀는 아이다호 시골의 모르몬 교도 가정에서 일곱 남매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대에는 오히려 좀더 개방적이었고 상식선에서 자녀를 키웠지만, 아버지는 종말이 올 것이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정부의 음모에 휘말리는 것이라는 특이한 피해망상을 현실처럼 살면서 가족에게 강요했다. 소녀는 바깥 세상은 전혀 모르고 집에서 홈스쿨링도 하지 않아 무지했다. 심지어 출생신고도 하지 않아 주정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다.

이런 가정 환경에서 형제들은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보통 독한 마음이 아니면 지금까지 자신을 강제하고 세뇌하던 테두리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소녀에게는 셋째 오빠라는, 집을 뛰쳐나가 대학교육을 받은 선구자가 있었고 소녀도 어느 순간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집의 경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기에서 호흡을 하게 된다.

이 낯선 세상은 너무도 달라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결국 소녀는 해내고 만다. 대입 검정고시같은 시험을 치르고 바로 브리검영 대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를 거치는 배움의 길. 이 길은, 남들은 가족의 지지를 받고 평범하게 학창시절을 보낸 뒤에 이룰 수도 있는 과정이었지만 소녀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성취한다. 그 대가는 아버지를 비롯해 어머니와 남매의 반을 잃는 것이었다.

30대초에 불과한 저자는 이런 커다란 역경이 있었기에 그 드라마틱한 삶을 두꺼운 책으로 펼쳐보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저자가 보냈던 아이다호의 시골 풍경이 펼쳐지는 가운데, 종말론에 쫓겨 온갖 위험한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아버지의 고집스러움이 잘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폐철처리장에서 자녀들의 안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날카로운 쇠뭉치를 던진다든지, 안전 장치를 제대로 하지 않고 지붕 위 작업을 하든지 중장비를 운전하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한 번 씩 큰 사고가 나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막대한 손해일텐데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아버지. 사람이 다쳐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집에서 치료하고 어머니의 약초로 치료하는 되풀이. 어머니는 가끔씩 정신이 제대로 돌아올 때도 있지만 아버지의 압제에 동조하며 그 그늘에서 수동적으로 산다. 이렇다보니 자녀들은 육체적, 정서적으로 학대당한 것이라 오롯한 성인으로 성장하지 못한 인물도 있다. 특히 션 오빠. 아버지의 특징을 그대로 물려받고 폭력성이 극대화된 인물.

저자가 가정을 떠나 배움의 과정으로 가는 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고 자기 정신의 소유권을 가져오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몸에 밴 상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지만 이겨내려는 과정이 인상 깊게 펼쳐진다.

책을 읽으면서 의아한 부분이, 막내딸이 오빠의 폭력성을 증거하자 바로 가족의 테두리 밖으로 내친 부모였다. 폭력의 현장에 있었고 충분히 인지할 만한 데도 딸을 거짓말하는 사악한 이로 내몬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광신도라고 할만한 부모는 자기들만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옳다고 여겼을텐데, 그런 폭력을 방관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애초에 아들을 막지 못한 것은 힘으로도 어쩌지 못해 쉬운 방편으로 그저 넘겨버렸고 또 아버지의 사업에 그 아들이 가장 힘을 많이 써주므로 묵인했을 수도 있다. 나중에 딸이 문제를 제기하자 자신들의 비겁한 모습을 감추려는 무의식적 본능으로 가장 쉬운 방법, 즉 약한 자를 사악한 자로 매도하지 않았을까.

책에서는 저자에 대한 가족내 입장이 갈라진다. 교육을 받은 자와 못 받은 자, 부모에게서 독립한 자와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자. 자기 생각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려면 공부도 필요하고, 경제적인 독립도 수반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부모로부터 내쳐쳤는데, 이 책이 출판된 후 가족의 변호사로부터 책의 내용이 맞지 않다고 문제제기를 받은 내용이 위키피디아에 있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럴 것을 미리 짐작하고, 책 곳곳에 굳이 이런 이야기는 다른 형제들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 대화는 말한 그대로를 꼭 옮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의미는 이러했다고 굳이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준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절절한 사연에 읽는 내내 슬프기도 하였고 저자를 응원했다. 저자는 글재주가 아주 좋았는데, 그 어두운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위트있는 표현들이 백미였다.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다른 인터뷰에 보니 New Yorker Fiction Podcast를 보았다고 한다.

아직은 나이가 젊은 저자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지금 케임브릿지에 있다고 하는데 좋은 저작을 많이 남기고 학자로서도 대성하였으면, 아니 무엇보다도 아직은 마음에 남아 있을지 모를 그 상처들을 훌훌 털고 행복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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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관내분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 마지막 로그 + 라디오 장례식 + 독립의 오단계
김초엽 외 지음 / 허블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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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흥미로운 작품들이었다.

다만 요즘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서인지 작품들이 대체로 인공지능을 제재로 하고 죽음이라는 모티브가 일괄적으로 들어가 있어 비슷한 주제의식으로 편중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요한 물음은 인간성의 규정,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구분점이란 무엇인가, 차가운 창조자인 인간과 따뜻한 자유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한 안드로이드 중 누가 더 인간적인가, 그런 문제의식을 표출하고 있었다.

중단편 모음집이라 술술 읽혔는데 대상인 <관내분실>과 <독립의 오단계>가 인상적이었다. <관내분실>은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개념을 넣은 것 외에는 어려운 과학용어 없이 일반소설과 흡사하게 잘 읽혔다. 다만 어느 정도의 가까운 미래냐 먼 미래냐는 정확하게 가늠하기 힘든 것이, 뭔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엄마와의 관계가 소원했던 딸이 임신을 하게 되면서 엄마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엄마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는 줄거리 속에 엄마의 불행했던 연원이 결혼으로 인한 경력단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마인드 업로딩 기술이 상용화되는 미래에는 이런 여성의 직업활동에 대한 사회적 제약은 해소되지 않았나 하는데 작품 속 세계관은 그러지 못해 위화감이 느껴졌다. 다만 마지막 부분은 좋은 엔딩장면으로 기억된다.

가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대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인데 이 작가 기대된다. 젊은 과학도인데 궁금하여 유튜브를 검색해 보니 작품활동에 대한 의욕이 충만해 보였고 무엇보다 청각장애가 있어 불완전한 발음을 할 때도 있지만 당당하게 소신을 피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도 흥미롭긴 했는데, 먼 미래의 어느 시점 장대한 거리를 여행하는 우주 항법의 획기적인 발달이 달성됐고 과거 항법과 새 항법 사이에서 정책적인 이유로 인해 가족과 유리된 삶을 사는 노과학자의 애틋한 사연이 나왔다. 전반적으로 좋았지만 그 시대에는 가족과 생이별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다른 매개할 수 있는 항법을 쓰던지 아니면 정책상의 배려가 있던지, 이래야 더 그 세계관에 맞지 않았을까 싶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은 <독립의 오단계>인데, 막 독립성에 눈뜬 안드로이드가 법정에 선다는 구성이므로 논리적인 반박이 이어져 현학적인 문체가 곁들여지기도 하지만 흥미로웠다. 작품에 나온 대로 아마도 미래에 가서는 사고로 인해 몸의 일부분을 잃게 되는 경우 사이보그 수술로 잃어버린 신체를 대체하여 완전체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거 같기는 하다. 작품 속 미래에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결정적 차이는 자궁으로부터 태어났는가 인간에 의해 창조된 기계냐이다. 주인공 편의 인물들은 자궁과 골반을 포함하여 신체의 65%을 잃어 사이보그 수술로 보완한 인간(중년의 여변호사)과 뇌의 일부만 살아남은 남자의 신체를 재구성한 안드로이드이다. 이 안드로이드는 소유주인 인간 뇌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인공지능으로써 점점 주체성을 자각하게 되는데 여변호사를 마음 속으로만 '어머니'라 지칭하다 마지막에 가서 실제로 어머니라 부르며 기계 일련번호대신 이름을 갖게 되면서 어머니의 성을 이어받는다. 자궁을 잃은 여성으로 본인 육체로는 생명을 생산할 수는 없지만 안드로이드가 독립적인 인격체로 거듭나면서 모자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상징성이 드러나 흥미롭다.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중년 여성은 차가운 재벌 2세 과학자 및 경영자로 자기가 낳은 아들을 평생 자기의 통제하에 두려 했고 이에 대항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한 아들 뇌의 일부에 아들의 신체을 대체할 안드로이드를 생산해 여전히 지배하려고 한다. 이로써 인간과 기계 중 누가 더 인간적인가, 누가 더 모성을 발휘하는가 하는 문제를 던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신체의 상당부분을 기계로 대체한다는 설정에서 어떻게 인체 기능이 유기적으로 복원되는지 간략한 설명이라도 없어 아쉬웠다. 또한 안드로이드 신체에 탑재된, 뇌의 일부분만 남은 남자가 또 다시 자살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뇌의 데이타가 안드로이드의 인공지능에 전송된다는 내용만 있지 어떻게 생체 조직에서 의미있는 정보를 추출하여 데이타화하고 전송될 수 있는지 설명이 부족하다. 안드로이드 안에서 사체가 된 뇌의 일부 조직이 어떻게 처리됐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봐서 아마 그대로 탑재된 상태가 아닐까 싶은데 이런 상태라면 그 안에서 부패할 텐데 뇌사 이후의 조직 상태에 언급이 없어 의아했다. 법정에서 주인공 안드로이드는 법정 구성인인 판사와 검사의 ‘지능증축’ 뇌구조를 스캔하는데 이렇게 피의자인 안드로이드에게 무방비적으로 스캔당하는 설정이 의아스러웠다. 이는 아마 1인칭 시점이라 그랬을지 모르나 차라리 여변호사의 입이나 제3의 정보로 ‘지능증축’이 표현되는 설정이면 더 개연성이 있었을 듯하다. 또한 여변호사가 사고를 당한 이유가 판사였던 아버지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인간에 의한 폭탄 테러였는데 이런 사고쯤은 이 작품의 세계관에서는 미리 예방/제압 가능했거나 피의자가 좀더 우아한 방법으로 복수하지 않았을까. 전반적으로 내용을 무거운 문체로 담아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갑자기 휙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어 여운을 느끼기에는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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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쓰는 법 - 독서의 완성 땅콩문고
이원석 지음 / 유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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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하고 검증된(혹은 작가가 검증한) 독서가들의 양질의 서평집이 뭐가 있는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다음에 읽을 책의 목록을 추가로 얻은 셈인데, 이로보면 서평 쓰는 법에 대해 얘기한 작가의 책이면서 독자로 하여금 어떤 책에 대해 읽고 싶게 만들었으니 그 자체로 서평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독서가=애서가=서평가란다. 읽다보니까 작가 자체가 엄청난 다독가이고 다양한 분야에 내공이 깊어 보인다, 관심분야의 논문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면.


작가가 책 속에 소개한 어떤 책 하나가 통째로 다른 책의 서평인 것도 있다고 해 흥미로왔고, 고전은 각종 해석과 서평을 견디어 가치를 부여받은 책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러한 통찰도 흥미로웠다.


이 책을 통해 얻은 중요한 메세지는, 서평은 독서의 완성이자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글쓰기로써 스스로의 내면으로 몰입하여 자아성찰에 이르게 되며, 감성적인 작업인 독후감과 한 자리로 귀결된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서평의 진정한 종결은 '삶을 통한 해석이자 실천'이라고 한다. 서평을 통해 그러한 경지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서평을 쓰고 싶다. 또한 최근에 몇 편이나마 서평 코스프레한 글을 끄적이다보니 책내용에 대해 더 깊이 사색하게 되고 마음에 더 새기게 되었는데 책의 성찰이 나의 성찰로 이어지고 내가 성장하게 된다면 이 얼마나 가성비 좋은 일인가. 서평 쓰는 일은 사회봉사라는데 이 정도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 같다, 다만 생업이 있다는 전제하에.


서평을 쓰는 테크닉적인 면이랄까 작가는 서평에 요약이 포함되어야 하고 서평가의 책에 대한 입장 (독자에게 책을 추천할 것인가, 비추천할 것인가)을 분명히 해야 한단다. 이미 요약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작가의 의도가 반영되며 서평 자체가 정치적이란다, 잠재독자에게 책에 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나는 요약은 치밀하게 하지 않고, 책 읽은 후의 전체적인 느낌을 주로 직관에 의해 쓰는 경향이 강한 거 같다. 작가가 말했듯이 제대로 요약하려면 최소한 장마다 요약을 해야 한다는데, 이러러면 단순한 책읽기를 넘어 대단한 집중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마추어 단계로 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인상을 말하는 현재 상태의 나로서는 좀 과한 작업일 수도 있겠다. 반면 그렇게 몰입하여 읽으면 책과 나의 내면에 대한 성찰이 깊어진다는 얘기일 테니 자아성장적인 측면에서는 정말로 내가 흥미있게 작업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그렇게 밀도있게 해 보련다.


이 책은 막연히 서평이란 걸 갈겨쓰던 나에게 서평에 대한 한 가지 관점을 정립해 준 책이었다. 지금 이 서평도 작가가 보기엔 허접한 것일 수 있겠으나, 만약 이 글을 읽고 작가의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이가 혹 있다면 나는 서평의 본질에 접근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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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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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은 제목부터가 눈에 야릇하다. 영휴(盈虧)라는, 일상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다. 한국어로 달의 '참과 이지러짐'이라는데, 아마 일본어 제목도 이렇게 풀어쓴 것(月の滿ち欠け) 같지만, <달의 참과 이지러짐> 이러면 느낌이 안 나서 그런지 말이 길어서 그런지 생소한 한자어를 넣어 간략하게 번안 제목을 뽑았다. 작중에 영휴의 개념 설명이 나오는데 태초에 인간에게 선택권을 준 죽음의 두 방법 중 하나이다. 자손을 남기며 죽는 방법과 환생을 하는 방법. 이 환생이 달의 영휴처럼 이승에서 현상화된다. 환생이 있다면 작품에서처럼 사람이 죽고 그렇게 빨리 다시 태어날까 싶은데, -주호민의 <신과 함께>에서도 착한 영혼은 49일만에 환생하기도 하고-이 작가의 세계관은 이러려니 하고 좀 의아해도 넘어가자.


이 작품에는 오싹할 정도로 주인공 여성의 환생이 여러번 나오고 그 전에 모두 어린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이러한 반복되는 전개는 마치 소멸되지 않는 업장의 되풀이같다. 주요 모티브는 작중에서도 언급된 <안나 카레니나>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유부녀로 연하의 남성과 사랑에 빠지다 기차에 치여 파국에 치닫는. 이 작품은 안나 카레리나의 사후가 덧붙여진 환생 버전이랄까. 처음에 연하남과 사랑에 빠질 때 그렇게나 사랑했을까 갸우뚱할 정도로 당시 여자의 행동은 담담하지만, 나중에 가서 주로 서술로써 그 사랑이 목숨도 각오하고 환생도 불사할 정도로 강렬했다고 추론된다. 워낙 루리의 사랑과 집념이 크다보니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같은 환생 이야기에 빨려들게 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으로,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과 거듭되는 환생이 강한 에너지를 행사하면서 주변 인물들의 삶은 무력하게 가정이 파탄나거나 영락하거나 고독하게 되는데, 마지막 즈음에 가서 어쩌면 분량 면에서는 남자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별 존재감 없던 오사나이와 아내의 사랑이 갑자기 생명력을 얻게 되는 전개가 탁월하다.


오사나이의 아내 역시 오사나이가 알지 못한 예전부터 몰래 흠모해 왔었고, 역시나 그 사랑에 미련이 있어 환생을 한 것인데, 이로 보면 이 작품의 주요 여성들은 겉모습과는 달리 인류 대다수가 맞이하는 죽음의 형태를 거부하고 환생을 불사하는 강렬한 사랑의 실천자들이다.


끝으로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에는 힘들 것 같다. 소설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독자가 각자 이미지화해서 읽고 감상하면 되는데, 영화에서는 잘못하면 로리타 컴플렉스로 연결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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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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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음울하고 오싹하며 괴기스럽고 묵시론적이며 사교(邪教)적인 분위기 속에, 완벽하게 하얀 세계에서 더 이상 이룰 게 없는 무기력한 젊은 세대들의 고뇌와 저항을 강렬하게 펼쳐내고 있다.

그들이 저항하는 방식은 자살로써, 교주라고도 할 수 있는 세영의 사주 아래 이뤄진다. 더 이상 창조적으로 무언가를 일굴 것도 없고 주장할 것도 없는 세상에서, 노예로만 존재할 수 있는 희망없는 세상에 저항하고 메세지를 던져주기 위한 과격한 방법의 자살. 마치 미시마 유키오가 행한 삶의 완성으로써 극단적인 죽음의 방식. 세영을 숭배하고 세영에게서 세례명을 얻듯이 별칭을 받은 자들의 상당수가 자살한다. 이는 세영이 이 숫자에 이르면 자기의 시도가 성공적이라고 했던 수다. 나머지 죽지 않은 두 명이 있는데 이들은 세영이 정해준 직업을 여러 차례의 도전 끝에 도달한다. 그 중 한 명은 세영의 신봉자로 자살을 약속했다가 세영이 규정한 표백세대의 시스템 속 '타협'하는 인간군으로 편입해 버리는 휘영(소크라테스)이다. 그는 세영과 닮은 여자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며, 시사주간지 기자로 적당히 자기 일에 만족해 하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나머지 한 명이 주인공(작중 화자)인데 그 역시 세영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졌다가 세영의 사후 그녀가 짜놓은 판 위에서 추와 동거하고 여러 준비 끝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 조직의 부속품으로 기능하며 살아간다. 세영의 죽음 5년후 그녀가 뿌려놓은 씨앗이 사악한 결실을 거둘 무렵 그는 각성하게 되어 자살 예고자들의 죽음을 막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마침내 그는 세영의 표백 시스템에서 어느 한 부류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기존 사회질서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상이 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세영이 정해주고 지금 사회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패배적으로 택하는 공무원 직업에서도 탈피하고자 한다. 세영은 아마 그가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직감하고 따로 별칭(세례명)을 지어주지 않고 육체적인 공략도 다른 여성에게 전가하며 자살 요구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앞으로 3년 안에 뭔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어 세영이 틀렸다고, 아직 우리에겐 뭔가 이룰 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결의하는 주인공(적그리스도). 하지만 이런 심리변화가 작품 중후반에 약간은 갑작스레 이뤄지는 느낌이다. 휘영과 주인공의, 그래도 살아서 뭔가 해 볼만하다는, 주로 대사와 1인칭 서술로 표현되는 이러한 각성이 좀 비약으로 전개되는 인상이었다. 자살 설득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하는 세영에 비해 삶의 희망이라는, 자살은 안 된다는 당위적이고 침범할 수 없는 명제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간단히 자리를 내 주는 듯 싶다. 아무튼 천재성과 허무주의를 지닌 세영의 카리스마에 대치하여 가장 평범한 소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위대한 일을 3년 안에 해내겠다고 선언한 것도 작가가 의도한 장치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휘영같이 신문사 기자로 그럭저럭 살아가다 주인공처럼 퇴사하여 원대한 포부를 안고 전업작가로 뛰어든 작가의 각오같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충격적인 소재와 전개, 문제상황에 대한 극단적인 해결방식과 이에 대한 반론이 치열하게 대결을 이루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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