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음울하고 오싹하며 괴기스럽고 묵시론적이며 사교(邪教)적인 분위기 속에, 완벽하게 하얀 세계에서 더 이상 이룰 게 없는 무기력한 젊은 세대들의 고뇌와 저항을 강렬하게 펼쳐내고 있다.

그들이 저항하는 방식은 자살로써, 교주라고도 할 수 있는 세영의 사주 아래 이뤄진다. 더 이상 창조적으로 무언가를 일굴 것도 없고 주장할 것도 없는 세상에서, 노예로만 존재할 수 있는 희망없는 세상에 저항하고 메세지를 던져주기 위한 과격한 방법의 자살. 마치 미시마 유키오가 행한 삶의 완성으로써 극단적인 죽음의 방식. 세영을 숭배하고 세영에게서 세례명을 얻듯이 별칭을 받은 자들의 상당수가 자살한다. 이는 세영이 이 숫자에 이르면 자기의 시도가 성공적이라고 했던 수다. 나머지 죽지 않은 두 명이 있는데 이들은 세영이 정해준 직업을 여러 차례의 도전 끝에 도달한다. 그 중 한 명은 세영의 신봉자로 자살을 약속했다가 세영이 규정한 표백세대의 시스템 속 '타협'하는 인간군으로 편입해 버리는 휘영(소크라테스)이다. 그는 세영과 닮은 여자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며, 시사주간지 기자로 적당히 자기 일에 만족해 하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나머지 한 명이 주인공(작중 화자)인데 그 역시 세영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졌다가 세영의 사후 그녀가 짜놓은 판 위에서 추와 동거하고 여러 준비 끝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 조직의 부속품으로 기능하며 살아간다. 세영의 죽음 5년후 그녀가 뿌려놓은 씨앗이 사악한 결실을 거둘 무렵 그는 각성하게 되어 자살 예고자들의 죽음을 막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마침내 그는 세영의 표백 시스템에서 어느 한 부류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기존 사회질서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상이 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세영이 정해주고 지금 사회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패배적으로 택하는 공무원 직업에서도 탈피하고자 한다. 세영은 아마 그가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직감하고 따로 별칭(세례명)을 지어주지 않고 육체적인 공략도 다른 여성에게 전가하며 자살 요구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앞으로 3년 안에 뭔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어 세영이 틀렸다고, 아직 우리에겐 뭔가 이룰 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결의하는 주인공(적그리스도). 하지만 이런 심리변화가 작품 중후반에 약간은 갑작스레 이뤄지는 느낌이다. 휘영과 주인공의, 그래도 살아서 뭔가 해 볼만하다는, 주로 대사와 1인칭 서술로 표현되는 이러한 각성이 좀 비약으로 전개되는 인상이었다. 자살 설득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하는 세영에 비해 삶의 희망이라는, 자살은 안 된다는 당위적이고 침범할 수 없는 명제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간단히 자리를 내 주는 듯 싶다. 아무튼 천재성과 허무주의를 지닌 세영의 카리스마에 대치하여 가장 평범한 소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위대한 일을 3년 안에 해내겠다고 선언한 것도 작가가 의도한 장치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휘영같이 신문사 기자로 그럭저럭 살아가다 주인공처럼 퇴사하여 원대한 포부를 안고 전업작가로 뛰어든 작가의 각오같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충격적인 소재와 전개, 문제상황에 대한 극단적인 해결방식과 이에 대한 반론이 치열하게 대결을 이루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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