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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 제5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희주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평점 :
4.5
누군가는 끝까지 부정하며 이해하지 못해도 누군가는 끝끝내 사랑이라 외치는, 빠순이로 대변되는 팬질의 최하층민.
아이돌 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은 작년 여러 커뮤니티를 흔들며 뭇 팬들의 심금을 울린 화제작이었다.
책 소개와 함께 인터뷰가 실린 기사를 읽으며 그 소재에 조금 들떴고 궁금했다.
`씨발, 죽어도 좋다`라는 말의 임팩트가 한 번 쿵 치고 난 뒤에야 빠순이의 소설이라는 책 제목이 <환상통>이라는 사실이 와닿았고 읽고 싶어졌다.
책은 N그룹의 팬인 m과 만옥이 민규를 좋아하는 이야기다.
3부로 나뉘어진 구성 속에 m과 만옥, 민규는 각각 화자가 되어 각자의 감정을 허물없이 나열한다.
특별한 사건 없이 그저 그 감정의 본질만을 담담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이렇다 할 내용 없이 그저 아이돌, 팬이라는 소재만으로 이루어진 글이고 그렇기에 누군가에겐 결코 공감 못 할 그 소재로 수상한 작품이라는 데 의의를 둔다.
그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어떻게 느껴질 지 궁금하지만 두 말 할 필요 없이 그 마음을 아는 사람들은 읽고야 말 책이다.
`걔네가 밥 먹여 주냐`라는 말로 어린 날의 치기라 치부되던 아이돌 팬질은 학창 시절의 전반을 차지할 만큼 많은 학생들의 삶에 깊숙히 파고들어 있다.
그 기저에는 분명 입시나 시험 같은 우리 나라의 교육 환경이 한 몫 했음에도 그 하나의 낙조차 뺏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로 인해 폄하되고 짓밟히고 마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험은 그 자신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이라 헷갈릴 때 주변에선 모두가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반쯤 수긍하는 마음으로 인정하려 들면 한편으로는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정없이 요동치는 이 마음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있는지, 처음 맛 본 이 감정에 취해 더 빠져들기 전에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것을 사지 절단 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부위에서 아픔을 느끼는`환상통`이라 칭했다.
소설 속 m과 만옥은 이야기 속에서 빠순이로서의 상징성을 지니지만 그들이 빠순이를 대표할 순 없다.
m과 만옥이 민규를 좋아하는 방법이 다르듯 평균을 낼 엄두조차 나지 않는 무수한 아이돌 팬들은 오롯이 자신만의 마음을 갖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같기에 같은 이름으로 묶였을 뿐 그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은 별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할 말이 많아진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에게 유리를 거쳐 첫 눈에 반하고 내 모든 걸 기꺼이 내어 줄 만큼 사랑에 빠지는 일, 결코 1대 1이 될 수 없는 관계, 평생을 가도 모를 존재, 절대 낭만적이지 않은 사랑 같지 않은 사랑, 나만 놓으면 끊어질 인연.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기에 첫사랑은 기억에 남는다는 말처럼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이름과 그 목소리와 얼굴, 노래, 춤과 말투, 색깔,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쌓인 추억이 자꾸 그 때의 나를 불러오는 거다.
그 작은 것 하나에 행복해했던,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버거워 눈물 흘렸던, 현실의 무엇보다 꿈 같은 그의 말이 중요했던, 끝없이 되돌아보고 괴로워하면서도 쫓을 수 밖에 없던, 내 전부를 바쳐 열렬히 사랑했던 그 때의 어리고 순수했던 내가 너무도 소중해서 지켜주고 싶어서.
역시 빠순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빠순이 뿐이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그 과반수의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
비록 허점은 있을지라도 누군가에겐 생각이 많아지는 밤을 선물하고 그 밤 내내 추억에 잠기도록 만들 책이었다.
우리는 어째서 우리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까요. 어째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가장 천하거나 아무 것도 아닌 말로만 표현하게 될까요.
멤버들을 볼 때 내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씨발, 죽어도 좋다. 예요. 자동인형처럼 씨발, 죽어도 좋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요. 그 말을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 정신이 들 때까지 반복해요.
그러나 말하고, 또 말해도 이상하게 그 말만은 닳지 않는 것 같고 오히려 어떤 말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져요.
민규랑 가까이 있는 사람들, 저 사람들은 어째서 살아 있을 수 있는 걸까. 하구요. 저런 애를, 저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면 심장이 있는 대로 팽창해서 판막이 펑, 터져버릴 텐데.
그런데도 다들 잘 살아 있다니.
대단하다.
그러나 실은 나는 우리가 더 대단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멀리서 그들을 보며,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서도 죽지 않는 우리가.
그가 좋다고 말한 이후, 나는 거리에 벚꽃나무가 그렇게 많다는 것을, 산들바람이 그렇게 자주 분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요. 만약 내가 누군가의 팬이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은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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