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내가 죽던 날
로렌 올리버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4.4
얼마 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보다가 타임루프에 걸려 죽음을 반복하는 `일곱 번째 내가 죽던 날`이라는 영화를 접했고 재밌겠다 싶어 제목을 기억해뒀었다.
아직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동명의 소설을 발견하고 반갑게 빌려왔다.

주인공 사만사는 린지, 엘로디, 앨리와 함께 학교에서 인기인으로 통한다.
린지는 우리나라로 치면 일진 같은, bitch의 이미지로 선배에게도 거침없고 마음에 안드는 아이를 따돌리는 데 앞장선다.
그만큼 파급력 있고 또래에게는 매력적인 인물인데 그런 린지가 사만사에게 말을 걸어주면서 사만사는 원 밖의 계급에서 원 안의 인기인으로 거듭났고 린지와 어울리며 행복함을 느낀다.
주인공 무리가 따돌리는 인물은 줄리엣으로 귀신처럼 긴 머리를 늘어뜨려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가까이 가면 구린내가 난다는 소문 때문에 전교생이 가까이하지 않는데 린지들만이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사이크스라는 성을 따 싸이코라고 부르고 영화 싸이코의 장면을 흉내내며 놀린다.
또한 마음에 드는 인물에게 장미를 주는 큐피트데이에 매년 줄리엣에게 장미를 선물하며 `내년엔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만`이라는 메모를 남긴다.

2월 12일 큐피트데이 당일 사만사는 남자친구 롭과 특별한 밤을 보내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저녁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네 명은 큐피트데이에 흔히 그렇듯 똑같은 옷으로 맞춰입고 린지의 차를 타고 등교했고 사만사는 화학 쪽지시험에서 로렌의 답을 베꼈고 수학 시간 잘생긴 데임러 선생님께 추파를 날렸으며 천사분장을 한 2학년에게서 소꿉친구였던 켄트의 아름다운 장미를 건네받고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중 지나가던 줄리엣을 놀렸고 저녁에 열리는 켄트네 파티에 가기로 했다.
린지와 함께 오후 수업을 빼먹고 요거트집으로 가던 길에 안나와 알렉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왔고 학교가 마친 뒤 앨리네 집에서 단장을 하고 보드카 한 병을 챙기고 켄트네 집으로 향했다.
약속을 잊은 듯 술에 취한 롭을 보며 실망했고 넷이 모여있다 머리를 묶고 예쁜 얼굴을 드러낸 줄리엣이 다가와 넷에게 못된 년이라고 욕하자 넷은 화를 내며 줄리엣에게 맥주를 부었다.
파티가 끝난 후 린지는 술을 마신 채 운전대를 잡고 사만사는 조수석에 앉았으며 엘로디가 음악을 바꾸라며 아이팟을 들고 앨리와 옥신각신하다 린지가 물고 있던 담배를 허벅지로 떨어트렸던 12시 39분, 무언가와 부딪히며 차는 수풀 속으로 고꾸라지고 사만사는 죽음을 경험한다.
어딘가로 떨어지는 꿈을 꾸던 사만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죽음도 모두 없던 일이 되었고 다시 2월 12일 큐피트데이로 돌아왔음을 알게 된다.

하루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전형적인 타임루프물이다.
그 날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를 바꿔보려고도 하고 포기도 해보지만 결국 꿈을 꾸고 난 뒤 사만사는 총 일곱 번의 2월 12일을 맞는다.
십대들의 언어나 은어 같은 게 있음에도 번역은 그럭저럭이라 읽을 만 한데 문제는 가장 중요한 제목이 가장 큰 오역이라는 점이다.
일곱 번의 큐피트데이에서 사만사가 죽음을 맞이한 건 처음 두 번 뿐이고 그 외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줄리엣의 자살 소식을 듣거나 줄리엣의 죽음을 막지 못한 적은 있었지만 꼭 죽어서 하루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제목 자체는 괜찮아서 영화에도 똑같은 제목을 쓴 것은 좋은데 총 일곱 번의 타임루프도 어찌 보면 스포일러고 사만사는 일곱 번 죽지도 않았다.
원제인 `Before I Fall`은 죽음보다 2월 12일로 돌아갈 때 꾸는 떨어지는 꿈을 나타내고 떨어지기 전 자신이 보낸 하루를 뜻하는 제목이라 훨씬 와닿는다.

제목은 둘째 치고 캐릭터도 사실 따지고 보면 가해자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만사에게 린지는 정말 소중했기에 린지가 숨기고 있던 추악한 진실이 자신이 품고 있던 그 마음과 동일한 걸 알고 결국은 이해하고 포용한다.
사만사는 결국 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사죄했지만 사만사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기에 과연 린지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지는 열린 결말로 느껴진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쓰여지긴 했지만 왕따와 사춘기 시절의 방황, 열등감, 불안함, 숨기고 싶은 비밀 같은 것들이 너무나도 잘 드러나서 비록 국가는 다르지만 공감하게 된다.
또한 주인공이 타임루프에 쉽게 적응해 여러 가지 상황을 조작해 매일을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켜서 좋았다.
그리 긍정적이거나 총명하고 용기있는 성격은 아닌 듯한데도 자신의 인생만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행동하는 점이 마음에 든다.
책을 보고 영화보는 걸 더 좋아해서 책을 먼저 읽기로 했는데 장면들이 영화로는 어떻게 그려졌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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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문 인 파리
조조 모예스 지음, 이정임 옮김 / 살림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4.1
말 그대로 파리에서의 허니문을 담은 이야기.
1912년의 에두아르, 소피 커플과 2002년의 리브, 데이비드 커플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100년여의 시간차를 두었지만 소피와 리브는 똑같이 달콤해야 할 허니문에서 남편 때문에 힘들어한다.
100년 전 소피에게는 제대로 된 조언 상대가 도움을 주었고 100년 후 리브에게는 화가 에두아르가 남긴 화가 난 아내 그림이 도움을 준다.

정말 별 다른 내용 없이 짧고 읽기 쉽다.
다만 한국어판에는 실제 파리에서 허니문을 보낸 부부가 찍은 100개의 사진이 페이지마다 들어가 있어 넘기는 데 시간이 걸린다.
내용도 가볍고 큰 갈등 없이 넘어가는 사랑 이야기에다 에두아르라는 실존 인물을 이용한 픽션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허니문을 다루고 있으니 묘하게 설레인다.
물론 에두아르 마네는 1883년 사망했기에 책에서 나오는 에두아르는 이름만 빌린 허구의 인물이고 파란 소파 위의 에두아르 마네 부인의 초상이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긴 하지만 화가 난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정말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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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31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1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1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1 00:06   좋아요 0 | URL
아하 기원까지 알게 됐네요! 좋은 말이네요. 감사합니다!^^
 
당신의 완벽한 1년
샤를로테 루카스 지음, 서유리 옮김 / 북펌 / 201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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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요나단. N. 그리프는 함부르크에서 가장 큰 출판사의 대표이며 사소한 실수도 그냥 넘기지 못해 오탈자를 발견하는 재미로 신문을 읽고 체크해 메일을 보내는 융통성 없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이탈리아로 날아가버린 어머니에게 애증의 마음을 갖고 있고,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모신 아버지는 아직도 불편하고 무섭고, 친구와 바람나 결혼한 전처 티나는 여전히 원망스럽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불평과 함께 시작된 새해, 쓰레기로 쌓인 도로에 대해 구청에 민원을 넣을까 생각하던 중 그의 자전거에 걸린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발견하게 된다.
당신의 완벽한 1년이라는 말로 시작된 다이어리에는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모든 계획이 짜여져 있었고 자신 혹은 주변 사람과 전혀 관계 없는 다이어리의 글이 어머니 소피아의 글씨와 비슷했기에 요나단은 주인을 찾기로 한다.

한나 마르크스는 지몬과 5년째 연애중이며 지몬이 어서 청혼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에 행동주의자인 자신과는 다르게 내향적이고 조금은 비관적인 지몬이 항상 미래를 걱정해주고 불안해하기에 한나는 마음껏 행동하며 꾸러기 교실까지 성공시켰다.
한나는 독감에 걸린 지몬을 꾸러기 교실에서 어릿광대로 부려먹다가 결국 지몬이 쓰러져 병원으로 향하게 되고 재검을 요하는 검사 결과로 인해 지몬은 퇴원 후 다시 병원을 찾는다.
결과를 기다리는 한나에게 연락 한 통 없던 지몬은 저녁이 되어서야 대뜸 원피스를 입고 나오라고 한 뒤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는데, 청혼을 기대한 한나에게 지몬은 작별을 말하며 자신의 몸에 암이 있고 길어야 1년 밖에 살지 못할 거라 이야기한다.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 슬퍼하던 한나는 지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고민하다 버킷리스트처럼 지몬에게 완벽한 1년을 선물해주기로 한다.

책은 주인공인 요나단과 한나의 상황을 번갈아가면서 보여주며 진행된다.
요나단이 다이어리의 주인을 찾으려다 다이어리에 적힌 내용을 따라가게 되는 과정과 한나가 사라진 지몬을 찾아다니는 과정은 당연히 겹치게 된다.
생각보다 요나단과 한나와 만나게 되는 순간은 더디게 찾아온다.
겨우 책의 10분의 1 정도를 남기고서야 둘은 만나고 그 이후 사건들은 꽤 중요함에도 금방 지나가고 만다.
갑자기 반해버리는 건 좀 억지스러웠고 만나는 장면부터가 이제야 흥미진진해진다 싶었는데 남은 80페이지에 사랑과 오해와 진실 같은 걸 다 집어넣고 나니 결말이 너무 허무해진다.

<미비포유>와 비교하는 광고를 보고 당연히 빌려왔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고 무엇보다 장르가 다른 느낌인데 싶다.
무엇을 보고 <미비포유>를 떠올릴 수 있다는 건지 출판사의 상술이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절절한 멜로는 오히려 한나와 지몬 쪽인데 주인공은 요나단이고 한나보다 친구인 리자가 더 매력적인데 심지어 그런 뉘앙스를 처음에 풍겨놓고 굳이 왜 지몬도 있었던 한나와 요나단이 이어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요나단도 한나도 둘 다 크게 매력이 없는 캐릭터이고 다이어리 자체의 설정도 조금 억지스럽다.
괜찮은 로맨스를 기대했는데 영 아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뭔가 잘못된 듯 하다.
아무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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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일단 나는 예쁜 책을 좋아한다.
표지가 예쁘고 폰트가 깔끔하게 어우러지면 눈이 가고, 손에 뽑아 든 이상 이미 반쯤 넘어 간 상태로 홀린 듯 읽게 된다.
제목의 어감이나 문맥도 중요하지만 그 만큼 표지와 어울리는 지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의미로 양장본은 무거워서 싫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잡히는 느낌이 있어서 좋고 가름끈이 저마다 다른 색깔로 달려 있는 것도 마음에 든다.
여하튼 양장본은 아니지만 이 책도 예뻐서 읽고 싶었다.
이제껏 예쁜 책들이 내게 줬던 느낌들을 생각하며 빳빳한 새 책을 기분 좋게 모셔왔다.

연작 미스테리 `나의 오컬트한 일상`은 봄/여름편 한 권, 가을/겨울편 한 권 해서 총 2권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다.
오컬트라는 말을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았기에 일단 좋다고 빌려오긴 했는데 무슨 내용인지 감이 안 왔다.
그런데 속지까지 책이 너무 예쁘고 한 권당 3장씩 있는 영어 달린 부제도 좋고 프롤로그, 에필로그 빼먹지 않는 구성이며 각 장마다 시작을 여는 하나의 문장과 중심이 되는 인물의 이야기까지 다른 글꼴로 쓰여진 점, 또 이야기마다 끝을 담은 일러스트도 전부 다 마음에 쏙 들어서 천천히 아껴 읽느라 정말 힘들었다.

첫 장을 읽기 시작했을 땐 인물들을 맞추느라 조금 헤맸지만 생각보다 문체가 담백해서 읽기 좋았고 그렇기에 오컬트가 어울리기나 할 지 미심쩍었다.
별에 씌어 있는 것,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 오 너 미친 달이여, 천사의 눈, 크리스마스에는 집으로 돌아온다, 낙원의 낯선 사람 총 6개의 이야기가 담긴 책은 서장인 전해 3월부터 종장인 이듬해 3월까지 2년 간의 시간을 담고 있다.
주인공 재인과 상현, 그리고 각종 주변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이 책의 전부다.
두 남녀는 우연인 듯 계속해서 마주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 사건들은 보통 미스터리와는 다르게 주술적이고 토속적인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별자리, 료안지 정원, 루나틱, 나자르 본주, 폴터가이스트, 도플갱어 같은 일상과 초자연의 경계에 있는 소재들이 과하지 않고 딱 꺼림칙한 정도로만 각 장의 미스터리를 꾸며준다.

주술에는 관심이 없어 혹시라도 너무 과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운명 뒤에는 사람이 있듯 각 이야기에서 주술 또한 그저 사건 현장에 떨어진 하나의 낱말에 지나지 않아서 정말 좋았다.
그 각자의 오컬트 역시 주술에 친숙한 누군가가 아닌 사람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고 또 잡지 취재라는 컨셉에 맞춘 원고를 넣기 위함도 있겠지만 어쨌든 정확하고 깔끔하게 부연되는 관련된 미신이나 설화같은 것들이 상당한 고증을 거친 것임이 여실히 드러나서 감동스러웠다.
정말 애써 분배하고 가다듬은 결과물을 마주한 것 같아 종장에 이르러서는 싫어하는 열린 결말도 괜찮게 느껴졌다.
오컬트 미스터리 로맨스에서 어느 하나 빠짐 없이 골고루 지분을 나눠주는 안배는 작가가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은 이 이야기의 주인임을 증명한다.
이야기가 살아 움직여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느낌의 여러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철저히 작가에 의해 통제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야기가 뛰놀게 이야기의 힘을 펼쳐놓는 글도, 이야기가 적당한 곳으로 가도록 힘을 부리는 글도 둘 다 얼마나 대단한 작가들인지 깨닫는다.
내용과 작품성을 떠나 데뷔작을 이렇게 과하지 않고 적당하게 써내려 간 게 대단하다.
덧붙여진 오컬트 스폿 지도와 참고 문헌들이 완성도를 더한다.
실로 완성된 책이었고 완전한 이야기였다.
역시 엘렉시르는 취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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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 제5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희주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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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누군가는 끝까지 부정하며 이해하지 못해도 누군가는 끝끝내 사랑이라 외치는, 빠순이로 대변되는 팬질의 최하층민.
아이돌 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은 작년 여러 커뮤니티를 흔들며 뭇 팬들의 심금을 울린 화제작이었다.
책 소개와 함께 인터뷰가 실린 기사를 읽으며 그 소재에 조금 들떴고 궁금했다.
`씨발, 죽어도 좋다`라는 말의 임팩트가 한 번 쿵 치고 난 뒤에야 빠순이의 소설이라는 책 제목이 <환상통>이라는 사실이 와닿았고 읽고 싶어졌다.

책은 N그룹의 팬인 m과 만옥이 민규를 좋아하는 이야기다.
3부로 나뉘어진 구성 속에 m과 만옥, 민규는 각각 화자가 되어 각자의 감정을 허물없이 나열한다.
특별한 사건 없이 그저 그 감정의 본질만을 담담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이렇다 할 내용 없이 그저 아이돌, 팬이라는 소재만으로 이루어진 글이고 그렇기에 누군가에겐 결코 공감 못 할 그 소재로 수상한 작품이라는 데 의의를 둔다.
그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어떻게 느껴질 지 궁금하지만 두 말 할 필요 없이 그 마음을 아는 사람들은 읽고야 말 책이다.

`걔네가 밥 먹여 주냐`라는 말로 어린 날의 치기라 치부되던 아이돌 팬질은 학창 시절의 전반을 차지할 만큼 많은 학생들의 삶에 깊숙히 파고들어 있다.
그 기저에는 분명 입시나 시험 같은 우리 나라의 교육 환경이 한 몫 했음에도 그 하나의 낙조차 뺏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로 인해 폄하되고 짓밟히고 마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험은 그 자신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이라 헷갈릴 때 주변에선 모두가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반쯤 수긍하는 마음으로 인정하려 들면 한편으로는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정없이 요동치는 이 마음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있는지, 처음 맛 본 이 감정에 취해 더 빠져들기 전에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것을 사지 절단 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부위에서 아픔을 느끼는`환상통`이라 칭했다.

소설 속 m과 만옥은 이야기 속에서 빠순이로서의 상징성을 지니지만 그들이 빠순이를 대표할 순 없다.
m과 만옥이 민규를 좋아하는 방법이 다르듯 평균을 낼 엄두조차 나지 않는 무수한 아이돌 팬들은 오롯이 자신만의 마음을 갖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같기에 같은 이름으로 묶였을 뿐 그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은 별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할 말이 많아진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에게 유리를 거쳐 첫 눈에 반하고 내 모든 걸 기꺼이 내어 줄 만큼 사랑에 빠지는 일, 결코 1대 1이 될 수 없는 관계, 평생을 가도 모를 존재, 절대 낭만적이지 않은 사랑 같지 않은 사랑, 나만 놓으면 끊어질 인연.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기에 첫사랑은 기억에 남는다는 말처럼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이름과 그 목소리와 얼굴, 노래, 춤과 말투, 색깔,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쌓인 추억이 자꾸 그 때의 나를 불러오는 거다.
그 작은 것 하나에 행복해했던,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버거워 눈물 흘렸던, 현실의 무엇보다 꿈 같은 그의 말이 중요했던, 끝없이 되돌아보고 괴로워하면서도 쫓을 수 밖에 없던, 내 전부를 바쳐 열렬히 사랑했던 그 때의 어리고 순수했던 내가 너무도 소중해서 지켜주고 싶어서.

역시 빠순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빠순이 뿐이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그 과반수의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
비록 허점은 있을지라도 누군가에겐 생각이 많아지는 밤을 선물하고 그 밤 내내 추억에 잠기도록 만들 책이었다.


우리는 어째서 우리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까요. 어째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가장 천하거나 아무 것도 아닌 말로만 표현하게 될까요.
멤버들을 볼 때 내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씨발, 죽어도 좋다. 예요. 자동인형처럼 씨발, 죽어도 좋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요. 그 말을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 정신이 들 때까지 반복해요.
그러나 말하고, 또 말해도 이상하게 그 말만은 닳지 않는 것 같고 오히려 어떤 말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져요.

민규랑 가까이 있는 사람들, 저 사람들은 어째서 살아 있을 수 있는 걸까. 하구요. 저런 애를, 저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면 심장이 있는 대로 팽창해서 판막이 펑, 터져버릴 텐데.
그런데도 다들 잘 살아 있다니.
대단하다.
그러나 실은 나는 우리가 더 대단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멀리서 그들을 보며,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서도 죽지 않는 우리가.

그가 좋다고 말한 이후, 나는 거리에 벚꽃나무가 그렇게 많다는 것을, 산들바람이 그렇게 자주 분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요.
만약 내가 누군가의 팬이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은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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