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일단 나는 예쁜 책을 좋아한다.
표지가 예쁘고 폰트가 깔끔하게 어우러지면 눈이 가고, 손에 뽑아 든 이상 이미 반쯤 넘어 간 상태로 홀린 듯 읽게 된다.
제목의 어감이나 문맥도 중요하지만 그 만큼 표지와 어울리는 지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의미로 양장본은 무거워서 싫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잡히는 느낌이 있어서 좋고 가름끈이 저마다 다른 색깔로 달려 있는 것도 마음에 든다.
여하튼 양장본은 아니지만 이 책도 예뻐서 읽고 싶었다.
이제껏 예쁜 책들이 내게 줬던 느낌들을 생각하며 빳빳한 새 책을 기분 좋게 모셔왔다.

연작 미스테리 `나의 오컬트한 일상`은 봄/여름편 한 권, 가을/겨울편 한 권 해서 총 2권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다.
오컬트라는 말을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았기에 일단 좋다고 빌려오긴 했는데 무슨 내용인지 감이 안 왔다.
그런데 속지까지 책이 너무 예쁘고 한 권당 3장씩 있는 영어 달린 부제도 좋고 프롤로그, 에필로그 빼먹지 않는 구성이며 각 장마다 시작을 여는 하나의 문장과 중심이 되는 인물의 이야기까지 다른 글꼴로 쓰여진 점, 또 이야기마다 끝을 담은 일러스트도 전부 다 마음에 쏙 들어서 천천히 아껴 읽느라 정말 힘들었다.

첫 장을 읽기 시작했을 땐 인물들을 맞추느라 조금 헤맸지만 생각보다 문체가 담백해서 읽기 좋았고 그렇기에 오컬트가 어울리기나 할 지 미심쩍었다.
별에 씌어 있는 것,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 오 너 미친 달이여, 천사의 눈, 크리스마스에는 집으로 돌아온다, 낙원의 낯선 사람 총 6개의 이야기가 담긴 책은 서장인 전해 3월부터 종장인 이듬해 3월까지 2년 간의 시간을 담고 있다.
주인공 재인과 상현, 그리고 각종 주변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이 책의 전부다.
두 남녀는 우연인 듯 계속해서 마주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 사건들은 보통 미스터리와는 다르게 주술적이고 토속적인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별자리, 료안지 정원, 루나틱, 나자르 본주, 폴터가이스트, 도플갱어 같은 일상과 초자연의 경계에 있는 소재들이 과하지 않고 딱 꺼림칙한 정도로만 각 장의 미스터리를 꾸며준다.

주술에는 관심이 없어 혹시라도 너무 과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운명 뒤에는 사람이 있듯 각 이야기에서 주술 또한 그저 사건 현장에 떨어진 하나의 낱말에 지나지 않아서 정말 좋았다.
그 각자의 오컬트 역시 주술에 친숙한 누군가가 아닌 사람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고 또 잡지 취재라는 컨셉에 맞춘 원고를 넣기 위함도 있겠지만 어쨌든 정확하고 깔끔하게 부연되는 관련된 미신이나 설화같은 것들이 상당한 고증을 거친 것임이 여실히 드러나서 감동스러웠다.
정말 애써 분배하고 가다듬은 결과물을 마주한 것 같아 종장에 이르러서는 싫어하는 열린 결말도 괜찮게 느껴졌다.
오컬트 미스터리 로맨스에서 어느 하나 빠짐 없이 골고루 지분을 나눠주는 안배는 작가가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은 이 이야기의 주인임을 증명한다.
이야기가 살아 움직여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느낌의 여러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철저히 작가에 의해 통제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야기가 뛰놀게 이야기의 힘을 펼쳐놓는 글도, 이야기가 적당한 곳으로 가도록 힘을 부리는 글도 둘 다 얼마나 대단한 작가들인지 깨닫는다.
내용과 작품성을 떠나 데뷔작을 이렇게 과하지 않고 적당하게 써내려 간 게 대단하다.
덧붙여진 오컬트 스폿 지도와 참고 문헌들이 완성도를 더한다.
실로 완성된 책이었고 완전한 이야기였다.
역시 엘렉시르는 취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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