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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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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려하다( 글이나 말, 곡선 따위가 거침없이 미끈하고 아름답다)는 말이 너무나 어울리는 작가 캐럴라인 냅, 그녀의 글은 "명랑한 은둔자" 를 처음 접하고,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두 번째로, 2003년 적품이 근 20년이 지나 한국어 판으로 출간되었다. '명랑한 은둔자' 속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다음 작품이 나온다면 꼭 첫 번째로 읽어봐야겠다 마음 먹었더랬다. 그래서 온라인 서점에 알림 문자도 신청해 놨는데, 이렇게 반가울수가!!
그녀의 작품 제목은 [욕구들] 이다. 무슨 욕구를 말하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면, "식욕은 내 모든 부수적 괴로움을 끌어다가 걸어두는 걸이이며 ( 나 자신과 수 많은 여자들의) 내면에 흐르는 모든 강의 출발지인 바다다." 라는 표현이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굶기 강박으로 사흘 내리 다른 것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직 그것, 코티지 치즈와 쌀 뻥튀기 만을 먹었던 캐럴라인 냅, 타고나기를 마른 체형이었음에도 거식증의 식사 장애가 생겨나기까지 ,, 그런데 나는 왜 그녀가 치즈를 표현한 말에서 김치생각이 났을까.
속살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도록 구운 두꺼운 브리치즈나 진하면서도 실크처럼 부드럽게 발리는 크림치즈 같은 것, 우리 문화권에서 치즈와는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빨간 고추 가루 양념에 배추의 가장 맛있을 때 나는 그것, 김치는 어쩌면 캐럴라인 냅이 말하는 배고픔을 초월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음식을 섭취할 때 치즈가 생각나듯, 나에게는 그것이 김치였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그녀의 굶기와 소량으로 먹는 음식 이야기는 "나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녀가 최대한 적게 먹거나 굶기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여성들의 다이어트는 숙명 이라고는 하지만, 24살에 41KG이라니 , 이후에 그녀의 몸무게는 가히 놀라울 정도로 줄어든다. 배고픔을 초월할 수 있었던 그녀의 강박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 그녀는 천천히 생각해 본다. 어쩌면 쌍둥이 언니보다 600그램 가벼웠음에도 인큐베이터 안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했으며, 유모가 아프고 약한 존재였던 자신에게 우유를 묽게 탄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볼 정도로 그녀의 몸무게에 대한 강박은 생애 초기의 이런 경험이 얼마나 성인이 되어서 변화를 주게 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릴 적 경험은 충분히 심리적 결함 혹은 트라우마로 연결된다는 것을 우린 이미 많이 알고 있다.
page.78.79
조용하지만 끈질긴 이런 불안, 모기의 잉잉거림처럼 성가신 내면화 된 경고가 그날 호텔 브런치의 기억이 내게 그렇게 오랫동안 들러붙어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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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녀의 유려한 글은 정신의학자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의 예술성과 심리학적 생각을 반반씩 닮은 듯 하다. 그림을 그리는 손이 글을 쓰는 손이 되고, 정신학적인 지식이 내면화된 심리로 발현한 것 같다고 할까. 서로 싸우진 않았지만 포옹하지도 않았던 무던한 가족들. (어쩌면 무던한 가족이 더 편안할 지도 모른다.)
소설을 쓰며 글의 주인공들을 엮어 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다르게, 자신의 생리적 욕구 (이 책에서는 당연히 먹는 것) 를 이렇게나 심오한듯, 덤덤하게 표현하기란 쉬운 게 아닐 것이다. 우울한 마음이 배고픔으로 연결되어 폭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먹지 않고 굶는 것으로 발현되는 작가와 같은 사람도 있다. 나는 전자이긴 하지만, 누군가와 이별하거나 이상과 현실에서의 괴로움으로 음식을 거부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캐럴라인 냅은 확실히 글을 잘 쓰는 작가다. 의식의 흐름대로 연결되는 글들은 어렴풋하게 상기되는 기억들을 꺼내주기도 하고, "나도 그랬었는데" 하는 동질감을 느끼게도 해준다. 단순히 "굶기"를 원하는 그 "욕구"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여성들의 고민들과 사회문제는 여성들에게 자신이 있는 이 자리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해준다는 점에서도 책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더 넓어진 생각과 주제에 대한 발상은 여성의 관계에서 오는 부재와 함께 심리를 읽어볼 수 있도록 해준다. 역시 이 책을 읽길 너무 잘했다. 나에게 몇 명 안되는 꼭 읽어야 할 작가의 이름을 뽑으라면 단연 캐럴라인 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