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패배
에마뉘엘 토드 지음, 권지현 옮김 / 아카넷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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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서방의 패배]를 읽기 전까지 우크라이나 전쟁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았다. 뉴스에서 반복적으로 보던 장면이 떠오른다. 러시아가 침공했고 우크라이나는 저항하고 있으며 서방은 그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정도의 구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전쟁의 배경이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이 보였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충돌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형성된 사회 구조와 역사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문제처럼 느껴졌다. 저자의 설명은 전쟁의 진행 상황을 보여주기보다, 그 전쟁이 어떤 배경에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는 데 더 가까웠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나라를 떠올리면 비슷한 문화권이라는 인상이 먼저 생긴다. 같은 슬라브 문화권에 속해 있고 역사적으로도 오랫동안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에서는 두 사회의 생활 방식이 생각보다 다른 방향으로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가족 구조에 대한 설명이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가족 공동체의 결속이 강한 사회였다고 한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개인 단위가 조금 더 독립적인 형태에 가까웠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보다 가족 규모가 작은 편이었고 여성의 사회적 위치도 더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집의 구조나 마을 형태 같은 생활 환경에서도 이런 차이가 나타난다는 사례가 함께 소개된다.








전쟁을 다루는 책에서 가족 이야기부터 등장하는 장면은 처음에는 조금 의외였다. 전쟁 이야기라면 보통 군사나 외교 이야기가 먼저 나올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화가 정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설명 자체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다만 가족 구조만으로 정치 체제나 민주주의 성향까지 연결하는 해석은 조금 넓게 잡은 해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시각은 뉴스에서는 거의 접하기 어려운 접근이라 신선했다.



또 하나 눈에 남았던 부분은 우크라이나 내부의 지역 차이에 대한 설명이다. 책에서는 우크라이나를 하나의 단일한 성격을 가진 국가라기보다 서로 다른 역사와 정치 경험을 가진 지역들이 모여 있는 사회로 바라본다. 서부, 중부, 동부는 정치적 성향과 문화적 배경이 상당히 달랐다고 한다.



서부 지역은 강한 민족주의와 우크라이나어 중심 문화가 자리 잡은 곳으로 설명된다. 중부 지역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동부와 남부는 러시아어 사용자가 많고 친러시아 정치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나타난다. 실제 선거 결과에서도 이런 차이가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이 부분을 읽다 보니 전쟁 상황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뉴스에서는 우크라이나가 하나의 방향으로 단결해 있는 모습이 강조된다. 전쟁 상황이라면 그런 서사가 자연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역사와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하지만 저자 토드의 진단은 여기서부터 꽤 냉정하게 흘러간다. 토양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우크라이나는 결국 하나의 안정된 ‘국민국가’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2014년에 큰 정치적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로 우크라이나 정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에 우호적이던 지역들의 정치 영향력이 이전보다 약해졌다는 설명이다. 그러다 보니 나라 전체의 정치 흐름도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역사에서도 낯선 장면은 아니다. 큰 사건이 지나가면 정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부분은 중산층이 사라졌다는 분석이었다. 러시아가 소련이었던 시절, 첨단 산업을 이끌던 도시의 중산층들이 전쟁과 경제 쇠락을 피해 유럽으로 대거 떠났다. 나라의 허리가 통째로 빠져나간 셈이다. 저자는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서쪽의 국수주의와 중부의 무정부주의, 그리고 동쪽의 혼란이 뒤섞인 상태로 묘사한다. 서방의 지원에 기대어 겨우 버티고 있는 <떠 있는 나라>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한때 산업 강국이었던 나라가 이런 상황까지 밀려났다는 설명은 솔직히 씁쓸하게 느껴진다.







책은 서방 세계에 대해서도 꽤 강한 비판을 내놓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 역시 기대만큼 효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제시된다.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을 바탕으로 중국이나 인도 같은 국가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고립되기는 쉽지 않다는 논리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서방 사회 내부의 문제도 이야기한다. 미국의 기대수명이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나 마약과 자살 같은 이른바 ‘절망의 죽음’이 늘어나고 있다는 연구가 소개된다.



저자가 통계 수치를 하나씩 제시하며 서방 사회의 ‘허무주의’를 설명하는 장면은 꽤 강하게 다가왔다. 미국의 기대수명이 낮아지고 갓난아기 사망률이 선진국 가운데 높은 수준이라는 사실도 언급된다. 의료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는 나라지만 동시에 마약성 진통제나 자살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서방 사회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문제를 안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니 미국이라는 나라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됐다. 보통 미국을 떠올리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책에서는 그 안에서도 여러 사회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했을 때 건강과 관련된 지표가 좋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세계 정치의 중심에 있는 나라라고 해도 내부적으로는 여러 문제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남았다.



물론 저자의 시각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토드는 서방이 이미 완전히 쇠퇴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 해석이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의 ‘안정’을 강조하는 부분에서는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푸틴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가 단순히 국가 역량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반대 세력을 강하게 억누르는 정치 구조도 분명 존재한다.



우크라이나를 ‘실패한 나라’라고 단정하면서 러시아를 상대적으로 안정된 나라처럼 묘사하는 시선은 조금 위험하게 느껴졌다. 인류학자의 냉소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자유를 제한하는 체제를 너무 가볍게 바라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서방 사회가 흔들린다고 해도 최소한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유가 남아 있는 사회라면 아직 패배를 단정하기는 이르지 않을까.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도 긴장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을 보고 있으면 지금의 국제 질서가 이전보다 훨씬 불안정한 시기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진다.



한반도 역시 이런 흐름과 완전히 떨어져 있는 공간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놓여 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은 경제와 문화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나라로 성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정학적 위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국제 질서가 크게 흔들리는 시기에는 외교적 선택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은 뒤 머릿속에 남은 것은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오랜 역사와 사회 구조가 겹겹이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뉴스 화면 속 장면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전쟁을 이해한다는 일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새삼 느껴졌다. 이런 부분은 역시 책을 통해 천천히 살펴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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