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왜 상처받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까 - 불편한 기억 뒤에 숨겨진 진짜 나를 만나다
강현식 지음 / 풀빛 / 2022년 2월
평점 :

누구나 잊혀지지 않는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은 머릿 속에 꽤 오래 남는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거나, 큰 상처가 되는 경험을 하면, 뜨문뜨문 그 기억이 떠오른다. 내 머리속에 지우개가 있어, 최악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꼭 직접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끔찍한 기억이 있다면, 누구나 지워버리고 싶을 것이다.
저자는 '누구나 잊히지 않는 힘든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다'라는 제목의 서문을 시작으로, 본인의 성폭력 경험을 첫 장에 적어 놓았다. 저자는 군생활 2년동안 원치않는 성추행을 당했다. 군을 제대하고 나와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기억 지우기 방법에 관해 찾아보았지만, 방법은 결국 없었고, 다만, 기억에 압도되지 않고,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택했다.

의도적이든 자연스러운 방법이든 수백명의 사람과 만나 그들의 아픈 경험을 서로 공유하며 위로받고 나니 저자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 쓸 용기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저 학문적인 목적으로 심리를 공부하고 쓴 것이 아니라, 추악한 사람에게 고통을 경험한 피해자 중 한 사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글을 썻다는 점에서 놀라움과 함께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스터디 모임에서 저자의 성폭력 경험담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성폭력 경험들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치, 성폭력 피해자 모임과 같이 성폭력 경험담을 이야기 하는 시간이 되었고,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워낙 성 관련 동영상을 토렌트나 유튜브 등 5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도 쉽게 접할 수 있어 그 만큼 성 관련 교육의 필요성이 크다는 것을 더더욱 느꼈는데, 과거의 성폭력이 그만큼 많았다면, 지금은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났을 뿐, 숨어있는 피해자들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결혼에 대한 장단점을 말할 수 없는것과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이 부모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을 다친 저자가 동일하게 마음을 다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상담해 준다는 점에서 저자가 쓴 글이 크게 와 닿는다. 읽으면서 가슴 먹먹한 이야기도 있었다. 감정 이입이 되는 글이 있어 자연스럽게 읽다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 기억의 깊이가 조금은 다를 수 있지만, 나쁜 기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성폭행의 기억으로 그 날의 지옥에 갇혀 사는 사람의 이야기, 맞는 사람만 있고 때린 사람은 없는 부모의 학대, 첫사랑이 오래 가는 이유와 머릿 속의 의식 구조, 애도에도 단계가 있는 이유, 죽음의 공포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불안과 친해지기 위한 방법, 오염 강박 외 가스라이팅까지 우리가 흔히 봐왔을 수도 있지만, 때론 경험하지 말아야할 사건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담고 있다.
저자의 경험담을 시작으로, 각 문제점에 대한 사례를 말하고, 사례 속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응어리진 마음으로 위로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적고 있는 책이다. 기.승.전.결 모두 잘 만들어진 책이었다. 목차 속에 소제목과 같은 경험을 가진 모든 이들을 비롯해 마음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책이라 꼭 읽어보기를 강권한다.

< 사랑하는 만큼의 아픔 >
슬픔의 크기와 죽은 상대가 자신과 객관적으로 어떤 관계인가보다 심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웠는지가 더 중요하다. 즉 심리적으로 가까웠다면, 많이 사랑했고 의지했으며 좋아했던 대상이 죽었다면 슬픔의 크기도 클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감정의 크기가 비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동기의 대립 과정이론' 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감정의 욕구를 비롯해 우리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심리상태를 심리학에서는 '동기'라고 한다. 감정 역시 동기의 일종이다.
그런데 동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이런 변화에 패턴이 존재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대립 과정이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처음 상태와 반대의 상태로 변한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곧바로 중립으로 가지 않고 기대의 반대인 실망감으로 채워진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슬픔이나 고통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p. 129)
< 애도에도 단계가 있다 >
마음 깊이 사랑했던 대상이 떠났을때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 사랑했던 만큼 슬프로, 또 사랑했던 만큼 미안한 마음이 커서 자책하기도 한다. 이런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경험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평소 감정표현에 인색했던 사람은 감정을 잘 느끼지도 못하고,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한다. 이럴 경우 슬픔과 고통은 지나치게 커져서 이별 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다. 회복이 늦어지면 심각한 우울증으로 연결된다. 그러면 사랑했던 대상과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이 끔찍한 고통의 기억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애도의 과정을 잘 거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심리학으로 유명한 영국 심리학자 볼비는 이별했을때 겪는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애착과 이별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주제라고 말한다. 애착이 생겼다는 증거는 애착 대상과 분리되었을때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면 그 대상과는 애착이 형성되지 않은 거다. 대상에게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면 대상이 사라졌을때 큰 슬픔을 느낄수밖에 없다. (p. 133)
- 애착대상이 사라졌을때 겪게되는 애도반응
1. 충격을 받고 무감각해진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힘든 일을 겪으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순간 멍해지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현실감을 못 느낀다. (넋을 놓는다)
2. 더이상 만날수 없는 대상을 보고 싶어 찾아 헤매는 행동을 보인다.
위 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다음단계로 넘어갈수가 없다.
지금 당장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고 어떤 식으로든 재회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평생 남을 수 있다. 또한 생각과 판단, 감정과 욕구 같은 마음의 여러 기능이 잠식될수 있다.
3. 애착의 대상이 떠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단계다.
무력감과 우울감을 느끼면서 빈자리를 실감한다.
이단계의 울음은 분노보다 체념에 가깝다. (입맛이 없고, 불면증으로 고생한다.)
이 단계에서 자신을 향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 사랑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 = 자살 시도)
-> 두번째 단계에서 충분한 감정을 느끼고 행동하고 아무리 애써도 재회할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게 일반적이다. 2번의 과정을 모두 경험하고 나야 자살시도를 하지 않는다.
결국, 두번째 단계에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회복
사랑하는 상대가 떠나는 순간의 고통스러운 기억, 상대에게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던 기억보다 더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일상을 잘 살아가게 된다. (p. 138)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