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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1주년 한정 리커버 특별판) - 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텅 빈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무언가로 가득 차 있으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텅 비었다고 말할 수밖에. 다른 존재가 공존해야 나는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삶이 삶으로 가득 차 있으면 삶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내 삶에는 중요한 몇 개의 마디가 있다. 그때마다 내 삶에 새로운 카테고리가 추가되었다. 가장 중요한 마디는 아버지의 죽음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 나는 이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리되지 않았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잊히지 않는 사건이 마디가 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에게 새롭게 추가된 카테고리는 ‘죽음’이다. 어린 시절 나의 카테고리는 [엄마, 아빠, 언니]-[친구들-선생님] 정도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의 카테고리는 [삶, 죽음]이 되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그는 나를 항상 불안해했다. 내가 땅에 서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사람이라는 걸 그는 어린 나이에 간파했다. 친구에게 물었다. 내가 그런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 친구는 말했다. 너를 보면 누구나 알 거라고. 아.. 그런가. 잘 숨기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중학생 시절 친구는 나에게 종종 고민을 털어놓았다. 부모와의 갈등, 다이어트 문제, 교우 관계, 왜 사는 걸까 등등. 그럴 때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 하고 말았다. 친구는 갑갑해 했다. 너는 왜 너의 고민을 말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럼 나는 고민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민이 없었다. 왜냐하면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고민인 줄도 몰랐으니까. 경제적, 문화적 궁핍과 폭력. 미성숙. 그것이 나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게 문제인 줄 인지하지도 못했다.
요즘 종종 거울 앞에서 늙은 나의 얼굴을 생각한다. 동영상을 빨리 재생시키는 것처럼 몸의 시간을 막 돌린다. 그럼 쪼끌쪼글 늙어버린 나의 얼굴을 마주한다. 건넛방에 있는 남편도 덩달아 쪼글쪼글 늙는다. 늙음이 있으면 나의 젊음도 생각할 수 있다.
저자는 독자에게 무엇으로 태어날 계획인지를 묻는다. 질문이 잘못 되었다. 전생에 무엇이었고 현생에 무엇이고 다음 생에 무엇이 되는가가 순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이 몸을 타고 있는 나와 여러 내가 공존한다. 전생의 나는 사자이다.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한 사슴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내장을 먹는다. 다음 생의 나는 이름 모를 깊은 산골에 흐르는 작은 냇물에 사는 물고기이다. 은색으로, 초록색으로 빛난다. 살다가 어느 순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은 틀림없이 그렇다고 생각하며 산다.
어린 시절부터 했던 고민. 눈을 감으면 앞이 깜깜하다. 나는 내 눈꺼풀을 보는 것인가, 광활한 공간을 보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