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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된 희망 - 이문구 문학에세이
이문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명천 이문구의 수필집 <외람된 희망>)
내가 이문구란 소설가를 대하게 된 것은 뒤늦은 1995년 어디선가 읽은 소설가 김주영의 대담 글 중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 가운데 ‘관촌수필(冠村隨筆)’을 추천한데 자극되어서다. 아니 그게 아니라 광복 후 가장 추천하고 싶은 소설인가 보다. 가끔 틈날 때 마다 문학작품인 소설과 시집을 뒤적이며 읽던 때였었다. 소설가가 얼마나 문제의 작품이면 같은 동년배의 작가 작품을 추천할까에 생각이 미치자 바로 구입하고 싶었다.
개포동에 거주할 때인데 바로 연금매점 애호당으로 달려가 손에 넣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1977년 말 초판발행에 90년에 11쇄로 끝을 맺고 1991년 7월부터 재판을 발행해 94년 7쇄 발행이니 그 사이 소설치고 많은 발행 횟수로 보아 인기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었다. 베스트셀러 작인지는 모르지만 꾸준히 팔리고 있는 소설이었다.
<관촌수필(冠村隨筆)>은 일락서산(日落西山), 화무십일(花無十日), 행운유수(行雲流水), 녹수청산(綠水靑山), 공산토월(空山吐月), 관산추정(關山芻丁), 여요주서(與謠註序), 월곡후야(月谷後夜)라는 사자성어로 된 제목의 연작소설로 되어있다. 이문구 선생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바탕으로 유년시절의 농촌풍경을 묘사한 모습이 우리들의 모태(母胎)처럼 친근했고 도시화로 인한 고향의 황폐화는 농촌이 어떻게 어렵게 변하고 있는가를 그린 소설이었다. 작가는 후기에서 유년 시절부터 몸에 밴 조부의 훈육과 그 자리에 살고 있는 동창생이나 친척의 이야기와 한마당에서 자란 동네 아이들 옹점이, 대복이, 복산이가 그들이다. 거기다 이문구 특유의 순 우리말과 토속적인 어휘의 풍부한 구사로 이루어진 충청도 대천지방의 독특한 사투리를 구사한 문체는 차라리 그 시대에 폭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표현된 농촌 아낙네의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와 김원일의 ‘불의 제전’에 나오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와 대비된다할까. 잃어버린 고향의 사투리가 되살아나는 친근한 표현이다.
그 이후 나는 이문구의 소설에 눈이 자주 가 <우리동네>, <유자소전>,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매월당 김시습>을 구입하여 읽거나 그저 장식품으로 꽂아둔 채 있다.
최근 발간된 이문구 문학에세이 <외람된 희망>은 문단생활 중간 중간에 쓴 문단이면사와 문인들과의 교류, 문학의 출발과 본인 소설 속의 등장인물과의 관계 등을 재미있게 소개 하였다. 이문구 문학을 평론한 글을 보면 서영채 문학평론가 겸 한신대교수는 ‘충청도의 힘’이란 주제에서 ‘이문구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충청도 사투리로 구성되는 농투성이들의 마음의 풍경이다. 괴팍하고 뒤퉁 맞으면서도 세상의 범사에 있어 자기 주견이 뚜렷한 사람들... ’ 등 주인공들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고 그의 독특한 문체에 있다고 하였다.
이 에세이집은 특히 이미 고인이 된 저자의 문학적 발자취를 더듬는 글이 많아 흥미로웠다. 특히 한산 이씨
가정 이곡 선생의 23대손 후예로 남로당 보령군 책을 맡은 선고(先考)는 6.25때 예비검속으로 잃고 위로 세분 형은 시대를 잘못타고 났거나 아버지에 연루되어 비명횡사했으며 뒤늦게 넷째 아들로 태어나 장남이 되어버린 작가는 신산고초를 겪던 어머니마저 50년대 중반에 여의었다. 어린 시절 선비적 삶을 산 할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한자의 기본교육서인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익히고 뒤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중학교에서 소설가의 꿈을 키운다. 친구 집의 서재에 있는 춘원 이광수의 <흙>을 읽고 춘원이 이 소설을 쓴 나이면 나도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꿈을 키운다. 또 읽은 수필 중 난리 속에 검거된 시인이 죽게 되었는데 문인들의 대통령에게 탄원하여 경무대 비서인 이산 김광섭이 힘써 주어 살게 됐다는 내용인데 문학가만 되면 개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작용하였다. 그 즈음 김동리 선생의 단편 ‘역마(驛馬)’를 읽고 큰 영향을 받아 문단 우익의 거두 그늘에서 있으면 보신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작용하였다, 그렇게 중학교만 졸업하고 59년 3월에 농사를 짓다 집과 농토를 처분하고 손가락질 받던 고향을 등지고 상경한다.
서울로 올라온 작가는 생활일선에서 상업, 노동, 잡일 등을 전전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대학을 갈 수 있기에 지인의 권유로 졸업장을 매입하여 꿈에 그리던 서라벌 예대에 진학하여 김동리의 제자가 된다. 아직 6.25이후 체제가 어수룩하여 가능한 사회였다. 면접시험에 운인지 관상이 좋아 합격과 함께 을류 장학생으로 졸업하게 된다. 특히 <소설론>은 동리 선생의 배려로 명천의 습작소설을 듣고 평하는 평소의 활동이 시험이라 우수히 졸업을 한다.
졸업 후에도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 되어 문인협회일을 보면서 ‘월간문학’과 ‘한국문학’ 등 창간을 도우면서 신춘문예로 등단하고자 하나 선생 “자네의 그런 문장으로는 어디에 투고해봤자 예선통과도 어려울 거야. 그런 문장 알아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노. 자네 문장은 두서너 번 뒤집어야 겉이 보인단 말야” 즉 이문구 선생의 독특한 문장을 이해할 사람은 김동리 선생뿐이란 뜻을 간파한다. 그리 알고 해인사 말사에 들어가 한 달 동안 습작을 열심히 하여 <다갈라불망비(不忘碑)>로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발표되어 등단한다.
선생은 70년대에는 경가도 화성군 발안으로 80년대엔 보령으로 낙향하여 겪은 낙수(落穗)를 선보였다. 그 중 <개구장이 산복이> 이란 동시집을 낸 것이 발안시절이었다. 이 때 연년생으로 남매를 얻었다.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다고 하는 작가는 응모와 투고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오직 쓰고 싶어서 썼지만 4년 후 이 마을을 떠나 다시 찾았을 때 그렇게 어울려 놀던 애들이 낯설어 하는 모습을 보며 실망하여 그 구제책으로 써 본 것을 동료 문인들에게 보여주어 그 권고로 책을 낸 것이다. 그 중 많이 읽히는 동시 한 편을 소개한다.
‘산 너머 저쪽’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젊어 문학단체의 대표나 임원을 지내면서 문우들과의 교유와 활동을 회고하며 2000년에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제31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다. 평생을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고인이 대해 보수 언론이 주는 상을 받은 것을 두고 항간의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1998년 5월 <조용히 살 수 없었던 시절>이란 글에서 ‘나는 당연히 ‘조용히 살고 싶다’는 주문(呪文)과 함께 항의와 반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하필이면 내가왜?’하고 반발한 이유는 분명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옥살이와 떼거지 예방, 그리고 갈수록 민중을 성역화하는 민주지상주의, 무조건 통일지상주의, 소아병적인 민족주의, 반인민적으로 신격화된 김일성 인정주의, 민주화운동으로 위장한 정치적 출세주의, 투쟁을 가장한 경력 관리주의 등 좋은 말로 진보화 했거나, 나중에 무슨 꼴을 보면서 살는지 모르게 변질된 각종 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혐오감과 경계심에서 우러난 반발이었던 것이다.’라며 평생 문단의 민주화와 반독재 투쟁을 해온 것을 되돌아본다.
바로 서세하기 얼마 전의 글이다. 문단에 큰 자취를 남긴 명천 이문구 선생은 61년 가까이를 살다 갔다. 그는 우리 문단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는 찬사를 받았다. 조부에게서 받은 온축된 한학과 충남 보령지방 특유의 사투리로 쓴 그의 글이 고향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