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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세익스피어, 독일에 괴테가 있다면 우리에겐 박지원이 있다는 박희병 교수)
 

영남대의 박지원 산문 연구가 김혈조 교수가 번역한 열하일기’ 1권이 이어 2권을 구입코자 인터넷 서점을 통해 열하일기를 검색하니 같은 박지원 연구자 박희병 교수의 연암을 읽는다가 뜨게 되어 몇 년 전 구입하여 둔 것이 생각 나 책장 서가를 일별해 보니 눈에 띄었다. 책을 펴보니 2006년에 발행된 서적으로, 목차를 살펴보니 연암의 산문 중 널리 알려진 문장 20편을 뽑아 주해와 평설 그리고 마지막에 총평으로 문장을 마무리한 책이다.

   그러고 보니 연암 박지원의 산문에 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되었지만 꾸준히 깊이 있게 독서하진 못한 것 같다. 그저 역사에 등장하는 북학파의 종장으로 또는 정조대의 이용후생학파를 이끈 인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1980년대 초 한국학에 관심을 가져 민조문화추진위원회 부설 국역연수원을 청강할 무렵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추에서 발행하는 도서를 할인 판매하여 그 때 구입해둔 동문선’ 12권과 이가원 선생이 번역한 열하일기’2권을 구입하여 오늘날까지 보관하고 있다. 1977년 수정3판에 가격이 3,250원 이었으니 당시 교직경력이 짧았던 나의 보수로는 무리한 액수였으나 필요시 꺼내 참고하며 열하일기는 상권을 인내하며 읽다 워낙 방대한 책이라 중지한 것으로 기억된다.

   서울대 박희병 교수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나의 아버지 박지원으로 번역 하면서 서문 첫머리에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朴趾源)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터이다.’ 라고 설파하였다. 박교수는 이어 연암을 읽는다.’에서 그 때 어느 기자에 대한 질문에 답변이 부족함을 느껴 그 뜻을 포함하여 이 책을 냈다고 소개했다. 과연 세계가 인정하는 문학가와의 어깨를 겨눌 수 있다는 자부심이 묻어나는 문장인가 관심을 가지며 다시 읽어보았다. 한편으로 우리도 이런 한문학인이 있음에 자긍심을 느끼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혈조 씨가 옮긴 박지원 산문집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란 서문에서 원로 한문학자들은 우리의 한문학이 연암 박지원에 이르러서 망했다.’는 말을 소개하며 연암의 한문학 작품이 역사상 최고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연암 이후에는 그러한 수준의 작품이 더 이상 나올 수 없으리라는 뜻을 역설적 찬탄한 표현으로 보고 있다. 한양대 정민 교수는 비슷한 것은 가짜다.’란 주제로 연암의 글을 소개하며 서늘함은 사마천을 닮았고 넉살 좋음은 장자에게서 배운 솜씨다. 소동파의 능청스러움, 한유의 깐깐함도 있다. 불가에 빠진 사람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노장으로 압도하고, 다시 유자의 근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고 연암의 글의 깊고 폭 넓음을 기리고 있다. 정민교수와 박희병교수는 연암의 글을 번역소개하고 평설을 넣었다.

   그러한 박지원의 글은 잘 알려진 대로 <열하일기><연암집>에 있는 글들 중 가려 뽑아 번역하여 펴낸 것이다. 번역자들은 하나같이 연암의 문학의 위대성에 감탄하면서 번역의 어려움 실토한다. 연암의 글속에 현실의 세계에 대한 사색과 비판을 통해 우리가 실현해야할 세계로의 모색과 지향점을 제시 하는 것은 오늘날 읽어도 살아있어 민족의 고전을 값한다고 역설한다. 연암은 당시 유행하는 패관소품 체를 써 문체반정의 와중에서 정조로부터 순정 고문으로 된 반성문을 지어 제출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는 고문가이면서 새롭게 표현하는 법고이창신(法古而創新)으로 살아있는 글을 썼기에 후대의 칭송을 받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날은 한글이 일상화된 사회이다. 이제 공은 한문학자들이 원문의 훼손 없이 그뜻을 살려 잘 번역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널리 읽게 할 책임이 있다. 지금 나는 한문학에 관심이 있고 그 방면에 관심이 있지만 대중들은 취향이 다를 수 있다. 유능한 번역자가 나와 재미있고 즐겁게 연암의 산문을 많이 읽고 그의 위대성을 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박지원의 글을 그저 무심코 읽었지만 세 권의 책을 통해 관심을 갖고 읽은 글은 홍대용의 삶을 기록한 홍덕묘지명과 초정 박제가의 문집 머리말 격인 서문의 글 초정집서(楚亭集序)‘를 새겨 읽으며 홍대용의 삶과 연암 문장론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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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된 희망 - 이문구 문학에세이
이문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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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명천 이문구의 수필집 <외람된 희망>)

 

내가 이문구란 소설가를 대하게 된 것은 뒤늦은 1995년 어디선가 읽은 소설가 김주영의 대담 글 중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 가운데 관촌수필(冠村隨筆)’을 추천한데 자극되어서다. 아니 그게 아니라 광복 후 가장 추천하고 싶은 소설인가 보다. 가끔 틈날 때 마다 문학작품인 소설과 시집을 뒤적이며 읽던 때였었다. 소설가가 얼마나 문제의 작품이면 같은 동년배의 작가 작품을 추천할까에 생각이 미치자 바로 구입하고 싶었다.

 

개포동에 거주할 때인데 바로 연금매점 애호당으로 달려가 손에 넣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1977년 말 초판발행에 90년에 11쇄로 끝을 맺고 19917월부터 재판을 발행해 947쇄 발행이니 그 사이 소설치고 많은 발행 횟수로 보아 인기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었다. 베스트셀러 작인지는 모르지만 꾸준히 팔리고 있는 소설이었다.

 

<관촌수필(冠村隨筆)>은 일락서산(日落西山), 화무십일(花無十日), 행운유수(行雲流水), 녹수청산(綠水靑山), 공산토월(空山吐月), 관산추정(關山芻丁), 여요주서(與謠註序), 월곡후야(月谷後夜)라는 사자성어로 된 제목의 연작소설로 되어있다. 이문구 선생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바탕으로 유년시절의 농촌풍경을 묘사한 모습이 우리들의 모태(母胎)처럼 친근했고 도시화로 인한 고향의 황폐화는 농촌이 어떻게 어렵게 변하고 있는가를 그린 소설이었다. 작가는 후기에서 유년 시절부터 몸에 밴 조부의 훈육과 그 자리에 살고 있는 동창생이나 친척의 이야기와 한마당에서 자란 동네 아이들 옹점이, 대복이, 복산이가 그들이다. 거기다 이문구 특유의 순 우리말과 토속적인 어휘의 풍부한 구사로 이루어진 충청도 대천지방의 독특한 사투리를 구사한 문체는 차라리 그 시대에 폭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표현된 농촌 아낙네의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와 김원일의 불의 제전에 나오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와 대비된다할까. 잃어버린 고향의 사투리가 되살아나는 친근한 표현이다.

 

그 이후 나는 이문구의 소설에 눈이 자주 가 <우리동네>, <유자소전>,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매월당 김시습>을 구입하여 읽거나 그저 장식품으로 꽂아둔 채 있다.

 

최근 발간된 이문구 문학에세이 <외람된 희망>은 문단생활 중간 중간에 쓴 문단이면사와 문인들과의 교류, 문학의 출발과 본인 소설 속의 등장인물과의 관계 등을 재미있게 소개 하였다. 이문구 문학을 평론한 글을 보면 서영채 문학평론가 겸 한신대교수는 충청도의 힘이란 주제에서 이문구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충청도 사투리로 구성되는 농투성이들의 마음의 풍경이다. 괴팍하고 뒤퉁 맞으면서도 세상의 범사에 있어 자기 주견이 뚜렷한 사람들... ’ 등 주인공들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고 그의 독특한 문체에 있다고 하였다.

 

 

이 에세이집은 특히 이미 고인이 된 저자의 문학적 발자취를 더듬는 글이 많아 흥미로웠다. 특히 한산 이씨

가정 이곡 선생의 23대손 후예로 남로당 보령군 책을 맡은 선고(先考)6.25때 예비검속으로 잃고 위로 세분 형은 시대를 잘못타고 났거나 아버지에 연루되어 비명횡사했으며 뒤늦게 넷째 아들로 태어나 장남이 되어버린 작가는 신산고초를 겪던 어머니마저 50년대 중반에 여의었다. 어린 시절 선비적 삶을 산 할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한자의 기본교육서인 천자문동몽선습을 익히고 뒤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중학교에서 소설가의 꿈을 키운다. 친구 집의 서재에 있는 춘원 이광수의 <>을 읽고 춘원이 이 소설을 쓴 나이면 나도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꿈을 키운다. 또 읽은 수필 중 난리 속에 검거된 시인이 죽게 되었는데 문인들의 대통령에게 탄원하여 경무대 비서인 이산 김광섭이 힘써 주어 살게 됐다는 내용인데 문학가만 되면 개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작용하였다. 그 즈음 김동리 선생의 단편 역마(驛馬)’를 읽고 큰 영향을 받아 문단 우익의 거두 그늘에서 있으면 보신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작용하였다, 그렇게 중학교만 졸업하고 593월에 농사를 짓다 집과 농토를 처분하고 손가락질 받던 고향을 등지고 상경한다.

 

서울로 올라온 작가는 생활일선에서 상업, 노동, 잡일 등을 전전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대학을 갈 수 있기에 지인의 권유로 졸업장을 매입하여 꿈에 그리던 서라벌 예대에 진학하여 김동리의 제자가 된다. 아직 6.25이후 체제가 어수룩하여 가능한 사회였다. 면접시험에 운인지 관상이 좋아 합격과 함께 을류 장학생으로 졸업하게 된다. 특히 <소설론>은 동리 선생의 배려로 명천의 습작소설을 듣고 평하는 평소의 활동이 시험이라 우수히 졸업을 한다.

 

졸업 후에도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 되어 문인협회일을 보면서 월간문학한국문학등 창간을 도우면서 신춘문예로 등단하고자 하나 선생 자네의 그런 문장으로는 어디에 투고해봤자 예선통과도 어려울 거야. 그런 문장 알아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노. 자네 문장은 두서너 번 뒤집어야 겉이 보인단 말야즉 이문구 선생의 독특한 문장을 이해할 사람은 김동리 선생뿐이란 뜻을 간파한다. 그리 알고 해인사 말사에 들어가 한 달 동안 습작을 열심히 하여 <다갈라불망비(不忘碑)>로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발표되어 등단한다.

 

선생은 70년대에는 경가도 화성군 발안으로 80년대엔 보령으로 낙향하여 겪은 낙수(落穗)를 선보였다. 그 중 <개구장이 산복이> 이란 동시집을 낸 것이 발안시절이었다. 이 때 연년생으로 남매를 얻었다.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다고 하는 작가는 응모와 투고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오직 쓰고 싶어서 썼지만 4년 후 이 마을을 떠나 다시 찾았을 때 그렇게 어울려 놀던 애들이 낯설어 하는 모습을 보며 실망하여 그 구제책으로 써 본 것을 동료 문인들에게 보여주어 그 권고로 책을 낸 것이다. 그 중 많이 읽히는 동시 한 편을 소개한다.

 

산 너머 저쪽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젊어 문학단체의 대표나 임원을 지내면서 문우들과의 교유와 활동을 회고하며 2000년에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제31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다. 평생을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고인이 대해 보수 언론이 주는 상을 받은 것을 두고 항간의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19985<조용히 살 수 없었던 시절>이란 글에서 나는 당연히 조용히 살고 싶다는 주문(呪文)과 함께 항의와 반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하필이면 내가왜?’하고 반발한 이유는 분명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옥살이와 떼거지 예방, 그리고 갈수록 민중을 성역화하는 민주지상주의, 무조건 통일지상주의, 소아병적인 민족주의, 반인민적으로 신격화된 김일성 인정주의, 민주화운동으로 위장한 정치적 출세주의, 투쟁을 가장한 경력 관리주의 등 좋은 말로 진보화 했거나, 나중에 무슨 꼴을 보면서 살는지 모르게 변질된 각종 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혐오감과 경계심에서 우러난 반발이었던 것이다.’라며 평생 문단의 민주화와 반독재 투쟁을 해온 것을 되돌아본다.

 

바로 서세하기 얼마 전의 글이다. 문단에 큰 자취를 남긴 명천 이문구 선생은 61년 가까이를 살다 갔다. 그는 우리 문단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는 찬사를 받았다. 조부에게서 받은 온축된 한학과 충남 보령지방 특유의 사투리로 쓴 그의 글이 고향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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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를 읽고)

정치인이자 대표적 진보지식인이며 집필가인 유시민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전장관의 최근저서 나의한국현대사를 완독하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부터 읽고 싶은 것은 사실 나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어서 진보 지식인이 겪은 현대사와 내가 겪고 느낀 우리 현대사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다. 유시민 씨는 잘 알려진 바와같이 인기있는 방송토론 사회자로 성가를 얻은데다 정치, 경제 및 우리 사회문제를 아우르는 많은 저작을 가진 이 시대 베스트 셀러 작가다. 거기에다 국민적 스타 정치인으로 발탁되어 일산에서 쉽게 당선된 재선국회의원에다가 노무현 참여정부의 보건복지부장관 출신으로 보수진영의 비판도 많지만 보건복지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일정부문 공적을 인정하는 글을 읽은듯하다.

 그는 1959년생으로 49년생의 나와는 10년의 차이뿐 아니라 경북 경주라는 고도 출신에 나는 청소년기를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초중등 교육을 배웠다. 그의 화려한 스펙에 언감생심 도전하기보다 순응적이고 평범한 생활인의 편협된 사고에 같은 또래의 친지들과 어울리다보니 생각이 경직되어 가는 느낌이라 도대체 자칭 진보라며 애국가도 부르지 않고 화려한 입담을 과시하는 그들의 사고를 엿보고 싶었다.

 우선 그의 글쓰기가 누구나 읽기 쉬운 평이한 언어로 쓰여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화려한 지식을 아우르는 필담의 소유자라 혹 어려운 정치, 경제의 용어에다 논리를 비틀어 무슨 소리인지 모를 내용을 접한 기억이 있어서다. 책 앞표지 프티부르주아(소시민) 리버럴의 위험한 현대사읽기, 나는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번민하는 당사자로서 우리 세대가 살았던 역사를 돌아보았다. 로 보아 필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 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책 서문에서 한국사 교과서가 일으킨 역사논쟁의 실체를 치열한 정신적, 정치적 내전이라 해석하며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으로 현대사 논쟁은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하여 이야기하기엔 위험이 따른다고 말하며 자신의 출생년도인 1959년부터 2014년까지 55년을 다루어 현재사, 당대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 현대사에서 자부심을 느낀다며 그것을 빛과 어둠이 뒤섞여 명암이 있기 때문이란다. 자학적 역사인식과 더불어 자아도취적 역사인식을 불식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대한민국 55년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더욱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전체적인 내용은 염려했던 편향적이고 왜곡된 역사인식은 없었다. 다만 언어의 자극적인 표현이이 몆 군대 거슬린다. 장삼이사로 살아온 나로서 사회적 사건의 관심은 적었으나 엄혹한 시대에 조차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3선 개헌, 10월 유신, 12,12 사태, 5.18광주민주항쟁, 6.10민주항쟁 등 고비마다 살아오며, 한 편으로 그게 아닌데 하며 의식을 가지면서도 소시민으로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며 권력에 순응하며 산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남북문제 등 북한과의 관계에서 그와 관점을 달리한다. 지식인들은 최고의 이상을 민주화에 두면서 잘못 처리된 국가권력에 의해 많은 희생이 된 면이 있겠으나 정권 교체를 통해 민주화 세력의 집권으로 많이 신원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국가 안보는 뒤로한 채 지나치게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을 두둔하는 데는 동의 할 수 없었다. 가령 천안함사태의 진상규명을 아직도 믿지 못한다든지. 김현희의 대한항공 폭파사건을 조작했다는 둥, 특히 작곡가 윤이상을 피해자로만 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야당 생활에 젖어 아마 을에의 위치에 있으면서 체제에 반항하는 삶이 내심 안보에 위협을 준다는 당국에 발표에 나는 따라가게 되었다. 유시민의 사회학적 지식이 실체적 진실에 가깝게 진술했으나 혁신인사의 구속과 탄압에는 날을 세워 비판하며 옹호한다.

유시민씨는 지금은 쉬고 있지만 누가 뭘해도 정치인이다. 역사의 고비를 지나올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권력 투쟁과 정당한 방법이던 그른 투쟁이던 엄혹한 승패가 갈려 역사를 써 왔다. 그 싸움에서 이긴 정치집단이 산물로서 시대를 안고 정권을 책임져왔다. 민주화 세력이나 진보세력은 우리정부의 탄생을 바르게 보고 있지 않지만 역사는 지나왔다. 그늘진 부분도 얼룩진 역사도 내 역사로 끌어 안아야한다. 건전한 보수와 진보의 건전한 정책적 논쟁으로 역사가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젠 여야의 이전투구와 큰 소리에는 신물이 난다.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는 광복 후 최근 세계가 부러워 한 우리의 경제성장과 민주화 정착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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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남한강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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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남한강편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를 읽다)

 

유홍준의 답사기 8권 남한강 편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고 바로 구입 신청을 하였다. 사실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엮은 시리즈 7<경기 남부와 남한강>편을 참고하여 주요 답사처를 여러 번 다녀 온 경험이 있어 내가 남한강유역의 문화유산을 찾아 본 것과 어떤 차이가 있나 살펴보고 풍부한 식견을 가진 미술사학자가 본 시각을 엿보고 싶었다. 이제 눈도 침침하고 능률도 떨어져 하루에 힘든 일이지만 100쪽을 목표로 읽기 시작하였다. 워낙 검증된 미문에 되도록 쉽게 써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배려한 글이라는 저자의 안내 글을 읽으니 예상외의 속독이 되었다.

 1부 영월 주천강과 청령포에서는 중앙고속도로의 신림나들목을 나와 시원하게 전개되는 강원도의 자연경관에 찬탄하며 찾던 때가 아련히 떠오른다. 경관이 뛰어난 주천강변의 요선정에서 만난 뜻밖의 품격있는 어제 어필을 보고 흥분했던 감격이 숙종, 영조, 정조의 3대에 걸친 배려였다니 있을 만한 곳에 자리했음을 깨닫는다. 곧 계곡을 따라 올라 가는 법흥사가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흥녕사 였음에 산문을 연 징효대사 절중의 승탑과 비의 내력, 비문을 쓴 나말의 지식인 최언위의 활동을 알게 되었다.

 영월은 비운의 임금 단종의 혼이 서린 고장이다. 보호를 받아 오늘까지 청령포의 관음송과 장릉 주변의 늘씬한 소나무들이 단종이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는 서러움을 위무하는 것 같다. 김삿갓의 유적에서 얻은 시비(是非) 두 자로 지은 한시가 귓가에 맴돈다.

 2부 충주호반에선 청풍과 제천, 단양과 영춘의 사군(四郡)의 명당과 산수미를 꾸준히 찬미한 자취를 살폈고 특히 미술 사학자답게 단원과 능호관, 단릉의 자취를 추적하였다. 단양부사 황준량의 강직한 상소로 이 지역의 민생을 살린 고마운 뜻을 담기도 했다. 단양 적성비를 찾아 산성에 오르면서 땅이 유독 붉은 황토로 되어 있어 지명의 붉을 단()자가 쓰였음을 추측하였다. 단양을 사랑한 시인 신동문 선생이 고향을 버리고 이곳에서 보내 단양 땅에 묻혔으며 조선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의 호(號)가 도담삼봉 보다 삼각산이 연원임을 짐작케 했다.

 상류 남한강변에 위치한 영춘을 찾아 통일신라 정형의 석탑인 향산리 삼층석탑을 살폈고 온달산성과 소백산 연봉들의 아름다움을 영화 세트장에 비유했다. 기원 유한지, 희원 이한철과 소림 조석진이 이곳의 현감을 지냈음은 저자만이 추측할 수 있는 기계 유씨 선조 관계와 어진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벼슬을 얻었음을 밝힌다.

 제천의 첫 무화유산으로 깊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덕주사 마애여래입상과 사자빈신사지 4사자 구층이형석탑은 사진으로만 소개 되었고 시내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훤칠한 키에 안정감이 있어 도심에 있어서도 어울리고 삼국시대 인공수리시설로 알려진 의림지는 너무 정리되어 공원이 된 것을 우려하지만 이 지방이 호서지방이라 불린 설도 이 호수의 연원임을 소개한다. 원주에서 제천으로 오는 길에 탁사정이란 멋진 이름의 계곡도 제천이었다. 구한말 유인석이 제천지방에서 의병 투쟁한 것은 교과서를 통해 알았지만 그 진원지인 자양영당에서 위정(衛正:성리학 질서를 확고히 하고)척사(斥邪: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는 배격하는)운동을 일으킨것이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어 선 그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황사영이 백서를 썼다는 배론 성지도 제천에 있어 찾아 볼 것이다.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이 신유박해 때 도움을 요청한 작고 흰 비단에 13,311자를 백서를 썼던 토굴모형을 재현하여 한 종교인의 신심을 기렸지만 종교적 신념과 나라 안녕을 저버린 일탈을 어찌 물을까.

 중원 땅이 신라, 고구려, 가야의 역사적 흔적으로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 탄금대는 배수진의 실책으로 임진왜란 때 불명예를 안은 신립의 안타끼움을 읽을 수 있었다. 남한강 상류에 있던 가흥창은 세곡을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곳으로 북쩍이던 인마(人馬)는 사라지고 이제 그곳은 푯말로 남아있다. 이곳은 또 농무목계나루로 유명한 신경림 시인의 고향이다.

 3부 남한강변의 폐사지는 청룡사로 시작하여 거돈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 고달사지로 이어진다. 이 곳 폐사지에 남아있던 석조유물 승탑과 탑비는 조형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일제시대 일본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어 일본을 갔다 와 제자리를 못 찾아 국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대부분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복잡한 신륵사 입구와 나한강변의 백사장이 사라져 자연의 훼손을 어찌한단 말인가..

다만 읽으면서 오자(誤字) 눈에 띠어 뜻밖이란 생각이었다. 100쪽의 조병준은 송병준의 오자로 보이고 101쪽의 동강은 서강으로 238쪽의 1845년은 조선 현종이 아니라 헌종연간으로 보인다. 이 답사기는 교통이 사통팔달로 뚫려 수도권에서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한반도의 젓줄 남한강 주변 삶의 두께를 살필 수 있는 누에게나 읽어야할 인문교양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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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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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간(師弟間)의 인연이 두 가문의 관계로 이어진 도타운 우의(友誼))
                                                                            -‘삶을 바꾼 만남을 읽고-

한양대 국문학과 정민 교수의 저서로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서 만난 황상과의 사제(師弟) 간의 정을 그린 삶을 바꾼 만남을 읽기 시작하다. 201112월에 초판 발행에 20145월 초판 12쇄판의 구입이었다.

 

나는 책을 선택할 때 저자에 비중 둔다. 한문학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 방면의 전공자였는지를 보고 학계의 정평을 얻은 저작이 있는지를 살핀다. 정민 교수는 그 방향의 글을 재미있게 엮어 젊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것 같았다. 그리고 최근 저작의 동향을 살핀다. 정민 교수는 현대시학의 연재 글을 보충하여 한시 미학 산책이란 책을 낸 이후 인기작가 반열에 오른 듯하다. 이제 생명이 다해 전공자 아니면 주목을 받지 못하던 한시를 동서고금의 문학 이론과 예화를 소개하며 재미있게 소개했다. 그리하여 하물며 어린이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로 한문학에 입문하는 초학자에게도 권할만한 책이었다. 조선 중기 권필이란 문인을 추적하더니 그 후 18세기 학자들의 탐구한 이야기를 내어 재미있게 읽었다. 한창 다산의 학문적 업적을 천착하더니 19세기의 추사와 초의 다산의 제자들로 연구의 폭을 넓힌다. 지난번 이 책보다 뒤늦게 나와 읽은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란 책을 구하면서 같이 입수한 책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정약용의 강진 유배 18년 동안 제자가 수없이 많지만 이들 중 끝까지 진심으로 스승을 한결같이 교류하며 섬긴 제자는 황상(黃裳‘1788~1870) 한 사람뿐이었다는 사실이다. 180111월 다산 일가는 나주에서 흑산도로 유배가는 형 약전과 헤어져 다산의 유배지 강진 고을로 향한다. 다산은 서문 주막집에 들른 것이 주막 봉놋방에 눌러앉은 것이다. 유배 온지 1년만인 180210월 적막감을 덜 겸 서당을 열어 자주 들르는 안면이 있는 아전들의 자식들을 받아 가르친다. 그 중 질박하고 명민한 황상이란 아이를 남겨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 때 다산이 준 가르침이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 하라란 삼근계(三勤戒)를 받는다. 서당이 있는 집을 사의재(四宜齋)라 하고 여러 제자들을 받아 길러내나 끝까지 제자의 도리를 다한 사람은 황상 형제와 저작에 많은 도움을 준 이청이 있으나 이청은 마지막 스승과 개인문제로 틀어졌다. 황상은 다산 밑에서 낡은 학습방법을 물리치고 다산 스스로 개발한 대안의 새로운 방법으로 기초를 익히고 우리 역사책도 곁들여 학습케 했다. 끊임없이 초서(抄書)하고 메모하게 하며 황상 형제는 문예를 공부하여 일정 수준이 오른 뒤에는 일과를 주어 이들의 작품에 평을 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특히 다산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애절양(哀絶陽)은 황상이 1803년 봄 칼로 제 남근을 잘라버린 참혹한 사건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해 아전의 포악을 고발한 내용의 시를 다산이 보고 공분을 느껴 다시 지은 시로 당시 시대상과 위정자의 심각한 반성을 요청하였다. 학질의 고통을 앓는 제자에게 학질이 뚝 떨어지라고 지어준 시에 보답하는 시를 보고 다산은 중국의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부끄럽지 않은 시라고 격려하였다. 그렇게 안정적 삶을 일군 다산과 황상은 대둔사의 학승 아암 혜장과 교류를 갖고 근친을 온 아들 학연과 서간을 통해 황상과 문예의 교류는 자연적 이어진다. 그리고 무료한 유배생활의 활력소로 채마 밭을 가꾸는데 다산답게 제자들에게 선진적 영농, 양계의 방법을 파급시킨다.

1804년 가을, 다산은 동문 밖 주막을 떠나 제자 이학래의 집 묵재에서 1년 반을 보냈으나 그 때 남은 기록은 없다. 이학래는 스승의 작업에 끝까지 조력하지만 과거에 집착하여 끝내 뜻을 못 이루어 스승 떠났고 비극적 말년의 생을 마감한다. 황상의 아버지 황이담은 이름난 술꾼으로 살아생전에 취옹재기를 지어 주기도 했고 봄 술병으로 세상을 떠 유언대로 간략하게 처리 한 황상을 나무라며 두 달 동안 시묘살이를 하도록 최소한의 예를 차리도록 한다.

황상은 초야에 숨어 사는 유인(幽人)의 삶을 동경해 다산에게 묻자 주역을 인용하여 대답한대로 격에 맞게 구현해 내어 스승을 흡족하게 한다. 1808년 봄 다산은 귤동(橘洞)의 외가쪽 먼 친척 윤종하 소유의 산정(山亭)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옮겨 경영을 시작하여 꾸민다.

 

180111월 강진에 내려간 다산은 1810년 장남 정학연의 격쟁(擊錚)으로 곧 사면되는 줄 알았으나 방해세력의 집요한 공작으로 막상 해배 명령서는 8년이 지난 18188월이었다. 그간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두 아들을 포함 18명이 모여 선생의 해배소식을 축하할 겸 십시일반 계금을 갹출하여 다신계를 조직한다. 그 후 초기 읍내 제자6명이 추가로 가입하고 스님 제자들도 전등계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나 다산과 과거에 도전하여 입신양묭 하려는 제자들을 도와주지 못한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830년대 중반 흐지부지 되고 만다. 황상은 유인(幽人)의 삶을 살 것을 결심하며 선생의 가르침대로 살 것을 약속한다. 또 다산은 다산초당에 거처할 때 살림을 도와 줄 후처를 들인다. 그사이에 딸이 있어 홍임 모녀라 불렸다. 그러나 해배 후 마재 본가로 따라 갔으나 잘 적응치 못하고 강진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사연을 다산이 지은 것으로 추축하는 남당사(南塘詞) 16수가 전한다.

그 후 황상과 다산과의 연결 서신이 나타나지 않으나 182812월 스승이 다녀가라는 간곡한 편지를 받는다. 18362월 중순 스승의 회혼연과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마흔 아홉의 제자는 일흔 다섯의 노환중의 스승을 여흘넘게 걸어 마재의 스승 부자를 방문하여 극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바로19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서울에 들러 잠깐 구경하며 고향으로 내려가던 참에 스승의 서거 소식을 풍문으로 듣고 다시 마재로 향해 장례의 모든 절차를 자식처럼 상복을 입고 지켰다.

 

10년 후인 18453월 황상은 두 번째 상경 마재를 방문하여 정학연과 반갑게 만난다. 정학연의 제의로 두 집안 간 우의를 이어나가기 위한 정황계를 맺기로 하고 계안에 집안 자손을 기록하고 두 집안 후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신의를 맺고 우의를 다지는 계로 삼고자 한다. 이에 정학유와 황상은 더욱 우의가 돈독해져 함께 송도기행을 다녀오며 정학연의 소개로 황상은 장안의 주앙 시단 명류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황상의 시를 보고 높이 평가한 사람은 추사 김정희였다. 정학연을 통해 시격을 알고 있는 추사는 184812월 초 추사가 제주도에서 해배(解配)되어 상경하는 길에 강진 백적동으로 황상을 찾았으나 아쉽게도 황상이 세 번째 상경차 두릉으로 막 올라간 직후였다. 서로 만나 시평을 듣고 인정받고 싶었으나 길이 엇갈려 회면은 몇 년 뒤로 미루러진다. 18494월 황상은 정학연의 편지를 전할 겸 대둔사로 초의 스님을 찾아가 우의를 다진다. 그때 오늘날 까지 추사의 명품으로 잘 알려진 명선(茗禪)과 죽로지실(竹爐之室) 두 작품을 감상한다.

 18539월 가을걷이를 끝내자 네 번째 상경을 결행하여 추사를 꼭 만나리라 다짐한다. 이듬해 3월까지 근 반년동안 머물렀던 황상은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즉 과지초당에서 추사와 형제들을 만나고 당대 최고 명류들과 수작하게 되어 기꺼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같이 다산 밑에서 공부한 이학래가 과거에 실패하고 허름한 차림에 실의의 모습으로 추사의 식객이 되어 떠도는 것을 보는 슬픈 해후도 한다

 18558월 다섯 번째 마지막을 상경하여 1856년 봄에 낙향할 때까지 추사형제의 서문을 받는 등 인가를 받고 기뻐한다. 그러나 자신을 아껴준 지인들의 세상을 하직함에 한 시대를 마감하는 비감에 젖는다. 황상은 18701222일 여든 세 살을 살았지만 지음들이 떠나자 득의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지은이가 퇴고할 무렵 만년 10년간을 채워줄 치원소고가 발견되어 시가 무려 315365수나 된다니 죽을 때까지 초서하며 시를 지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처음과 끝을 이렇게 한결같은 지킨 사람은 드물다. 이런 인물을 발견해 인생의 길잡이로 안내케 한 옛사람의 뜻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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