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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사제간(師弟間)의
인연이 두 가문의 관계로 이어진 도타운 우의(友誼))
-‘삶을
바꾼 만남’을
읽고-
한양대
국문학과 정민 교수의 저서로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서 만난 황상과의 사제(師弟)
간의
정을 그린 ‘삶을
바꾼 만남’을
읽기 시작하다.
2011년
12월에
초판 발행에 2014년
5월
초판 12쇄판의
구입이었다.
나는
책을 선택할 때 저자에 비중 둔다.
한문학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 방면의 전공자였는지를 보고 학계의 정평을 얻은 저작이 있는지를 살핀다.
정민
교수는 그 방향의 글을 재미있게 엮어 젊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것 같았다.
그리고
최근 저작의 동향을 살핀다.
정민
교수는 ‘현대시학’의
연재 글을 보충하여 ‘한시
미학 산책’이란
책을 낸 이후 인기작가 반열에 오른 듯하다.
이제
생명이 다해 전공자 아니면 주목을 받지 못하던 한시를 동서고금의 문학 이론과 예화를 소개하며 재미있게 소개했다.
그리하여
하물며 어린이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로
한문학에 입문하는 초학자에게도 권할만한 책이었다.
조선
중기 권필이란 문인을 추적하더니 그 후 18세기
학자들의 탐구한 이야기를 내어 재미있게 읽었다.
한창
다산의 학문적 업적을 천착하더니 19세기의
추사와 초의 다산의 제자들로 연구의 폭을 넓힌다.
지난번
이 책보다 뒤늦게 나와 읽은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란
책을 구하면서 같이 입수한 책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정약용의 강진 유배 18년
동안 제자가 수없이 많지만 이들 중 끝까지 진심으로 스승을 한결같이 교류하며 섬긴 제자는 황상(黃裳‘1788~1870)
한
사람뿐이었다는 사실이다.
1801년
11월
다산 일가는 나주에서 흑산도로 유배가는 형 약전과 헤어져 다산의 유배지 강진 고을로 향한다.
다산은
서문 주막집에 들른 것이 주막 봉놋방에 눌러앉은 것이다.
유배
온지 1년만인
1802년
10월
적막감을 덜 겸 서당을 열어 자주 들르는 안면이 있는 아전들의 자식들을 받아 가르친다.
그
중 질박하고 명민한 황상이란 아이를 남겨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
때 다산이 준 가르침이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 하라‘란
삼근계(三勤戒)를
받는다.
서당이
있는 집을 사의재(四宜齋)라
하고 여러 제자들을 받아 길러내나 끝까지 제자의 도리를 다한 사람은 황상 형제와 저작에 많은 도움을 준 이청이 있으나 이청은 마지막 스승과
개인문제로 틀어졌다.
황상은
다산 밑에서 낡은 학습방법을 물리치고 다산 스스로 개발한 대안의 새로운 방법으로 기초를 익히고 우리 역사책도 곁들여 학습케
했다.
끊임없이
초서(抄書)하고
메모하게 하며 황상 형제는 문예를 공부하여 일정 수준이 오른 뒤에는 일과를 주어 이들의 작품에 평을 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특히
다산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애절양(哀絶陽)은
황상이 1803년
봄 칼로 제 남근을 잘라버린 참혹한 사건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해 아전의 포악을 고발한 내용의 시를 다산이 보고 공분을 느껴 다시 지은 시로 당시
시대상과 위정자의 심각한 반성을 요청하였다.
학질의
고통을 앓는 제자에게 학질이 뚝 떨어지라고 지어준 시에 보답하는 시를 보고 다산은 중국의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부끄럽지 않은 시라고 격려하였다.
그렇게
안정적 삶을 일군 다산과 황상은 대둔사의 학승 아암 혜장과 교류를 갖고 근친을 온 아들 학연과 서간을 통해 황상과 문예의 교류는 자연적
이어진다.
그리고
무료한 유배생활의 활력소로 채마 밭을 가꾸는데 다산답게 제자들에게 선진적 영농,
양계의
방법을 파급시킨다.
1804년
가을,
다산은
동문 밖 주막을 떠나 제자 이학래의 집 묵재에서 1년
반을 보냈으나 그 때 남은 기록은 없다.
이학래는
스승의 작업에 끝까지 조력하지만 과거에 집착하여 끝내 뜻을 못 이루어 스승 떠났고 비극적 말년의 생을 마감한다.
황상의
아버지 황이담은 이름난 술꾼으로 살아생전에 취옹재기를 지어 주기도 했고 봄 술병으로 세상을 떠 유언대로 간략하게 처리 한 황상을 나무라며 두 달
동안 시묘살이를 하도록 최소한의 예를 차리도록 한다.
황상은
초야에 숨어 사는 유인(幽人)의
삶을 동경해 다산에게 묻자 주역을 인용하여 대답한대로 격에 맞게 구현해 내어 스승을 흡족하게 한다.
1808년
봄 다산은 귤동(橘洞)의
외가쪽 먼 친척 윤종하 소유의 산정(山亭)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옮겨 경영을 시작하여 꾸민다.
1801년
11월
강진에 내려간 다산은 1810년
장남 정학연의 격쟁(擊錚)으로
곧 사면되는 줄 알았으나 방해세력의 집요한 공작으로 막상 해배 명령서는 8년이
지난 1818년
8월이었다.
그간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두 아들을 포함 18명이
모여 선생의 해배소식을 축하할 겸 십시일반 계금을 갹출하여 다신계를 조직한다.
그
후 초기 읍내 제자6명이
추가로 가입하고 스님 제자들도 전등계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나 다산과 과거에 도전하여 입신양묭 하려는 제자들을 도와주지 못한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830년대
중반 흐지부지 되고 만다.
황상은
유인(幽人)의
삶을 살 것을 결심하며 선생의 가르침대로 살 것을 약속한다.
또
다산은 다산초당에 거처할 때 살림을 도와 줄 후처를 들인다.
그사이에
딸이 있어 홍임 모녀라 불렸다.
그러나
해배 후 마재 본가로 따라 갔으나 잘 적응치 못하고 강진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사연을 다산이 지은 것으로 추축하는 남당사(南塘詞)
16수가
전한다.
그
후 황상과 다산과의 연결 서신이 나타나지 않으나 1828년
12월
스승이 다녀가라는 간곡한 편지를 받는다.
1836년
2월
중순 스승의 회혼연과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마흔 아홉의 제자는 일흔 다섯의 노환중의 스승을 여흘넘게 걸어 마재의 스승 부자를 방문하여
극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바로19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서울에 들러 잠깐 구경하며 고향으로 내려가던 참에 스승의 서거 소식을 풍문으로 듣고 다시 마재로 향해 장례의 모든 절차를
자식처럼 상복을 입고 지켰다.
10년
후인 1845년
3월
황상은 두 번째 상경 마재를 방문하여 정학연과 반갑게 만난다.
정학연의
제의로 두 집안 간 우의를 이어나가기 위한 정황계를 맺기로 하고 계안에 집안 자손을 기록하고 두 집안 후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신의를 맺고 우의를
다지는 계로 삼고자 한다.
이에
정학유와 황상은 더욱 우의가 돈독해져 함께 송도기행을 다녀오며 정학연의 소개로 황상은 장안의 주앙 시단 명류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황상의
시를 보고 높이 평가한 사람은 추사 김정희였다.
정학연을
통해 시격을 알고 있는 추사는 1848년
12월
초 추사가 제주도에서 해배(解配)되어
상경하는 길에 강진 백적동으로 황상을 찾았으나 아쉽게도 황상이 세 번째 상경차 두릉으로 막 올라간 직후였다.
서로
만나 시평을 듣고 인정받고 싶었으나 길이 엇갈려 회면은 몇 년 뒤로 미루러진다.
1849년
4월
황상은 정학연의 편지를 전할 겸 대둔사로 초의 스님을 찾아가 우의를 다진다.
그때
오늘날 까지 추사의 명품으로 잘 알려진 명선(茗禪)과
죽로지실(竹爐之室)
두
작품을 감상한다.
1853년
9월
가을걷이를 끝내자 네 번째 상경을 결행하여 추사를 꼭 만나리라 다짐한다.
이듬해
3월까지
근 반년동안 머물렀던 황상은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즉
과지초당에서 추사와 형제들을 만나고 당대 최고 명류들과 수작하게 되어 기꺼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같이 다산 밑에서 공부한 이학래가 과거에 실패하고 허름한 차림에 실의의 모습으로 추사의 식객이 되어 떠도는 것을 보는 슬픈 해후도 한다
1855년
8월
다섯 번째 마지막을 상경하여 1856년
봄에 낙향할 때까지 추사형제의 서문을 받는 등 인가를 받고 기뻐한다.
그러나
자신을 아껴준 지인들의 세상을 하직함에 한 시대를 마감하는 비감에 젖는다.
황상은
1870년
12월
22일
여든 세 살을 살았지만 지음들이 떠나자 득의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지은이가
퇴고할 무렵 만년 10년간을
채워줄 ‘치원소고’가
발견되어 시가 무려 315제365수나
된다니 죽을 때까지 초서하며 시를 지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처음과 끝을 이렇게 한결같은 지킨 사람은 드물다.
이런
인물을 발견해 인생의 길잡이로 안내케 한 옛사람의 뜻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