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남한강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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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남한강편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를 읽다)

 

유홍준의 답사기 8권 남한강 편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고 바로 구입 신청을 하였다. 사실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엮은 시리즈 7<경기 남부와 남한강>편을 참고하여 주요 답사처를 여러 번 다녀 온 경험이 있어 내가 남한강유역의 문화유산을 찾아 본 것과 어떤 차이가 있나 살펴보고 풍부한 식견을 가진 미술사학자가 본 시각을 엿보고 싶었다. 이제 눈도 침침하고 능률도 떨어져 하루에 힘든 일이지만 100쪽을 목표로 읽기 시작하였다. 워낙 검증된 미문에 되도록 쉽게 써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배려한 글이라는 저자의 안내 글을 읽으니 예상외의 속독이 되었다.

 1부 영월 주천강과 청령포에서는 중앙고속도로의 신림나들목을 나와 시원하게 전개되는 강원도의 자연경관에 찬탄하며 찾던 때가 아련히 떠오른다. 경관이 뛰어난 주천강변의 요선정에서 만난 뜻밖의 품격있는 어제 어필을 보고 흥분했던 감격이 숙종, 영조, 정조의 3대에 걸친 배려였다니 있을 만한 곳에 자리했음을 깨닫는다. 곧 계곡을 따라 올라 가는 법흥사가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흥녕사 였음에 산문을 연 징효대사 절중의 승탑과 비의 내력, 비문을 쓴 나말의 지식인 최언위의 활동을 알게 되었다.

 영월은 비운의 임금 단종의 혼이 서린 고장이다. 보호를 받아 오늘까지 청령포의 관음송과 장릉 주변의 늘씬한 소나무들이 단종이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는 서러움을 위무하는 것 같다. 김삿갓의 유적에서 얻은 시비(是非) 두 자로 지은 한시가 귓가에 맴돈다.

 2부 충주호반에선 청풍과 제천, 단양과 영춘의 사군(四郡)의 명당과 산수미를 꾸준히 찬미한 자취를 살폈고 특히 미술 사학자답게 단원과 능호관, 단릉의 자취를 추적하였다. 단양부사 황준량의 강직한 상소로 이 지역의 민생을 살린 고마운 뜻을 담기도 했다. 단양 적성비를 찾아 산성에 오르면서 땅이 유독 붉은 황토로 되어 있어 지명의 붉을 단()자가 쓰였음을 추측하였다. 단양을 사랑한 시인 신동문 선생이 고향을 버리고 이곳에서 보내 단양 땅에 묻혔으며 조선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의 호(號)가 도담삼봉 보다 삼각산이 연원임을 짐작케 했다.

 상류 남한강변에 위치한 영춘을 찾아 통일신라 정형의 석탑인 향산리 삼층석탑을 살폈고 온달산성과 소백산 연봉들의 아름다움을 영화 세트장에 비유했다. 기원 유한지, 희원 이한철과 소림 조석진이 이곳의 현감을 지냈음은 저자만이 추측할 수 있는 기계 유씨 선조 관계와 어진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벼슬을 얻었음을 밝힌다.

 제천의 첫 무화유산으로 깊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덕주사 마애여래입상과 사자빈신사지 4사자 구층이형석탑은 사진으로만 소개 되었고 시내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훤칠한 키에 안정감이 있어 도심에 있어서도 어울리고 삼국시대 인공수리시설로 알려진 의림지는 너무 정리되어 공원이 된 것을 우려하지만 이 지방이 호서지방이라 불린 설도 이 호수의 연원임을 소개한다. 원주에서 제천으로 오는 길에 탁사정이란 멋진 이름의 계곡도 제천이었다. 구한말 유인석이 제천지방에서 의병 투쟁한 것은 교과서를 통해 알았지만 그 진원지인 자양영당에서 위정(衛正:성리학 질서를 확고히 하고)척사(斥邪: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는 배격하는)운동을 일으킨것이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어 선 그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황사영이 백서를 썼다는 배론 성지도 제천에 있어 찾아 볼 것이다.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이 신유박해 때 도움을 요청한 작고 흰 비단에 13,311자를 백서를 썼던 토굴모형을 재현하여 한 종교인의 신심을 기렸지만 종교적 신념과 나라 안녕을 저버린 일탈을 어찌 물을까.

 중원 땅이 신라, 고구려, 가야의 역사적 흔적으로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 탄금대는 배수진의 실책으로 임진왜란 때 불명예를 안은 신립의 안타끼움을 읽을 수 있었다. 남한강 상류에 있던 가흥창은 세곡을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곳으로 북쩍이던 인마(人馬)는 사라지고 이제 그곳은 푯말로 남아있다. 이곳은 또 농무목계나루로 유명한 신경림 시인의 고향이다.

 3부 남한강변의 폐사지는 청룡사로 시작하여 거돈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 고달사지로 이어진다. 이 곳 폐사지에 남아있던 석조유물 승탑과 탑비는 조형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일제시대 일본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어 일본을 갔다 와 제자리를 못 찾아 국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대부분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복잡한 신륵사 입구와 나한강변의 백사장이 사라져 자연의 훼손을 어찌한단 말인가..

다만 읽으면서 오자(誤字) 눈에 띠어 뜻밖이란 생각이었다. 100쪽의 조병준은 송병준의 오자로 보이고 101쪽의 동강은 서강으로 238쪽의 1845년은 조선 현종이 아니라 헌종연간으로 보인다. 이 답사기는 교통이 사통팔달로 뚫려 수도권에서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한반도의 젓줄 남한강 주변 삶의 두께를 살필 수 있는 누에게나 읽어야할 인문교양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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