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언니는 말을 참 예쁘게도 한다. 내가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지금쯤 정교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 말에는 칼이 숨어 있다. 그런 말을 나는어디서 배웠을까? 아버지가 감옥에 갇힌 사이 나는 말 속의 칼을 갈며 견뎌냈는지도 모르겠다. - P192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 P195
"또 올라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술이 불콰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연산홍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 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 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 P197
시속 180킬로로 고속도로를 달려 병원에 도착했을 아버지는 시체처럼 창백했다. 몇시간 전 의식을 잃은 이버지는 얼굴의 근육이 완전히 이완되어 편안하디편안한 모습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느 근육이든 긴장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세상사의 고통이 근육의 긴장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198
아버지는 나의 우주였다. 그런 존재를, 저 육신을, 이제 다시는 볼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을 점령하고 있는 저 육신이 내일이면 몇줌의 먼지로 화할 것이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 P201
그때까지 그렇게 노기에 찬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역시 소스라치기는 했었느나 노기라면 나도 아버지 없는 동안 쌓이고 쌓여 만만치 않았다. 뉘 집 개가 짖냐는, 나른한, 그 여름에 참으로 적절한 표정을 얼굴에 덧입힌 채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소설책을 느릿느릿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순간 아버지의 낫이 책의 귀퉁이를 베며 눈앞으로 스쳐갔다. 농사일은 젬병인 양반이 그날따라 갈고 갈았는지 오만과 편견의 견자 중 ㅕ와 ㄴ이 싹둑 베여 나갔다. 베인 것은 글자만이 아니었다. 뭐랄까, 아버지와 나를 잇고 있던, 세월 지날수록 얇아진 어떤 인연, 혹은 마음의 끈이 싹둑 잘려나간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일으켰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버지는 낫을 휘둘러서는 아니 되었다. 밥값을 하라고 해서도 아니 되었다. 아버지가 해야 했던 것은 빨치산의 딸로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진정한 사과였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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