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명상 배울 때 선생님께 들은 말로는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아도 우리 몸에 다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 기억까지. 내가 아무리 다 흘려보내고 가벼워지겠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이미 쓰인 기억은 나와 영원히 함께하겠지, 살아 있는 이상 한 곳에만 머무를 수도 계속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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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절망한 사람은 죽을병에 걸려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이 사람은 길게 누워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기는 하나 죽을 수가 없다. 이렇게 ‘죽을 정도로 앓고 있다.‘는 것은 죽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살 희망이 아직 그곳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니 죽음이라는 최후의 희망조차도 이룰 수 없을 만큼 모든 희망을 잃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때 사람은 생각을 원한다. 그렇지만 더 두려워할 만한 위험을 알게 되면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위험이 증대된 그때 절망은 죽을 수 있다는 희망까지도 잃는 것이다. 이궁극의 의미에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 P102

시간이 흘러 조조는 엄마 로지가 바로 그 교수대에 올라 있는 것을 본다. 다시보았을 때 조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풀린 엄마 신발 끈을 묶어준다. 그 장면에서 슬프지만 조조가 삶의 상실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며 그다음 발걸음을 내디딜수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보고 싶지 않다고 눈을 돌린다고 그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 매듭을 짓기 위해서는 똑바로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 P114

강유원이 쓴 『책과 세계』에 나오는 다음의 말은 내가 책을읽고 글을 좋아하게 된 연유를 은유적으로 잘 설명해준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담지 않는다. … 그들은 평생을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나 얼룩말처럼 살다가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서 잠든다. 나서 죽을때까지 단 한 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가 지금까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만 뜯어 먹으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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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언니는 말을 참 예쁘게도 한다. 내가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지금쯤 정교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 말에는 칼이 숨어 있다. 그런 말을 나는어디서 배웠을까? 아버지가 감옥에 갇힌 사이 나는 말 속의 칼을 갈며 견뎌냈는지도 모르겠다. - P192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 P195

"또 올라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술이 불콰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연산홍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 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 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 P197

시속 180킬로로 고속도로를 달려 병원에 도착했을 아버지는 시체처럼 창백했다. 몇시간 전 의식을 잃은 이버지는 얼굴의 근육이 완전히 이완되어 편안하디편안한 모습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느 근육이든 긴장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세상사의 고통이 근육의 긴장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198

 아버지는 나의 우주였다. 그런 존재를, 저 육신을, 이제 다시는 볼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을 점령하고 있는 저 육신이 내일이면 몇줌의 먼지로 화할 것이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 P201

그때까지 그렇게 노기에 찬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역시 소스라치기는 했었느나 노기라면 나도 아버지 없는 동안 쌓이고 쌓여 만만치 않았다. 뉘 집 개가 짖냐는, 나른한, 그 여름에 참으로 적절한 표정을 얼굴에 덧입힌 채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소설책을 느릿느릿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순간 아버지의 낫이 책의 귀퉁이를 베며 눈앞으로 스쳐갔다. 농사일은 젬병인 양반이 그날따라 갈고 갈았는지 오만과 편견의 견자 중 ㅕ와 ㄴ이 싹둑 베여 나갔다. 베인 것은 글자만이 아니었다. 뭐랄까, 아버지와 나를 잇고 있던, 세월 지날수록 얇아진 어떤 인연, 혹은 마음의 끈이 싹둑 잘려나간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일으켰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버지는 낫을 휘둘러서는
아니 되었다. 밥값을 하라고 해서도 아니 되었다. 아버지가 해야 했던 것은 빨치산의 딸로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진정한 사과였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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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놈만 있으면 돼라. 아들 필요 읎당게 징허게 말도 많소이, 아리야, 니가 아들 노릇꺼정 다 헐 거제이?"
초등학교 삼학년이었지만 말귀 밝았던 나는 그 참에 얄미운 고모부 약 올리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하모, 기동이는 이번에 삼십등 했는디?"
기동이는 큰고모네 막둥이이자 유일한 아들로 나와 같은 반이었다.
"우리 아리는?"
"일등!"
"아들보다 낫구만."
아버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마당을 빙 둘러 내달렸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뭐가 그리좋았는지 나는 아버지의 목 위에서 등허리가 흠뻑 젖도록 웃어젖혔다. 우물가에 핀 달큰한 치자꽃 향기에 숨이 막혔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던 그런 날도 있었다. 이듬해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갔고,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불행했다. 광주교도소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만날 수 없는 아버지는 없는 것과 같았다. 몸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온몸으로 놀아주던 아버지를 잃고 나는 세상 전부를 잃은 느낌이었다. 그때 잃은 아버지를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도 되찾지 못한 게 아닐까? 아버지를 영원히 잃은 지금, 어쩐지 뭔가가 억울하기도 한 것 같았다. - P158

몸을 일으킨 여자가 바람 없는 날 떨어지는 벚꽃잎처럼 고요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부지를 빼박았다…………"
아버지 닮은 아이라도 낳고 싶었는지 여자는 아버지를 보듯 나를 보았다. 깊고 그윽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서글프게.
오래도록 나를 바라본 여자는 허리춤에서 지갑을 꺼내 오십환짜리 지폐 한장을 기어이 쥐여주었다. 맑은 날이었고, 마당에 고운 햇살이 가득했다. 여자가 미끄러지듯 그햇살 속으로 들어섰고, 나는 여자가 쥐여준 지폐를 마당에 집어던졌다. 어쩐지 받아서는 안 되는 불결한 돈 같았다. 지폐가 소리도 없이 허공울 몇번 맴돌아 햇살 사이로 착륙했다. - P162

그때 그 여자의 동생이 그러니까 한때는 아버지의 처제였던 양반이 자기 언니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형부의 현재 마누라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형부의 장례식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반갑게 아버지의 옛 처제를 맞았다.
허리 때문에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았던 맞절도 했다.
두 여자는 한동안 손을 맞잡은 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말없이 나누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고맙소이."
한참 만에야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이리 가실 줄은 참말 몰랐그만이라, 메칠 전에 딸내미가 하는 슈퍼에서 봤을 적에만 혀도 쌩쌩하셨는디요."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오거리슈퍼였다. 그보다멀게 분명한, 옛 처제의 딸이 운영하는 슈퍼를 아버지는일부러 찾아서 갔을 것이다.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감옥일지도 모른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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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괜찮아."
자기 상태가 괜찮다는 것인지, 죽음이란 것도 괜찮다는것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살아질 테니 괜찮다는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불현듯 눈물이 솟구쳤다. 그 눈물의 의미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오빠는 우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고요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곧 닥칠 자신의 죽음까지 덤덤하게 수긍한, 아니 죽음 저편의 공허를 이미 봐버린 눈빛이었다. 그 눈빛 앞에서 차마 더는 울어지지 않았다. 내 울음이 사치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본디 눈물과 친하지 않기도 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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