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놈만 있으면 돼라. 아들 필요 읎당게 징허게 말도 많소이, 아리야, 니가 아들 노릇꺼정 다 헐 거제이?" 초등학교 삼학년이었지만 말귀 밝았던 나는 그 참에 얄미운 고모부 약 올리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하모, 기동이는 이번에 삼십등 했는디?" 기동이는 큰고모네 막둥이이자 유일한 아들로 나와 같은 반이었다. "우리 아리는?" "일등!" "아들보다 낫구만." 아버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마당을 빙 둘러 내달렸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뭐가 그리좋았는지 나는 아버지의 목 위에서 등허리가 흠뻑 젖도록 웃어젖혔다. 우물가에 핀 달큰한 치자꽃 향기에 숨이 막혔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던 그런 날도 있었다. 이듬해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갔고,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불행했다. 광주교도소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만날 수 없는 아버지는 없는 것과 같았다. 몸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온몸으로 놀아주던 아버지를 잃고 나는 세상 전부를 잃은 느낌이었다. 그때 잃은 아버지를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도 되찾지 못한 게 아닐까? 아버지를 영원히 잃은 지금, 어쩐지 뭔가가 억울하기도 한 것 같았다. - P158
몸을 일으킨 여자가 바람 없는 날 떨어지는 벚꽃잎처럼 고요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부지를 빼박았다…………" 아버지 닮은 아이라도 낳고 싶었는지 여자는 아버지를 보듯 나를 보았다. 깊고 그윽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서글프게. 오래도록 나를 바라본 여자는 허리춤에서 지갑을 꺼내 오십환짜리 지폐 한장을 기어이 쥐여주었다. 맑은 날이었고, 마당에 고운 햇살이 가득했다. 여자가 미끄러지듯 그햇살 속으로 들어섰고, 나는 여자가 쥐여준 지폐를 마당에 집어던졌다. 어쩐지 받아서는 안 되는 불결한 돈 같았다. 지폐가 소리도 없이 허공울 몇번 맴돌아 햇살 사이로 착륙했다. - P162
그때 그 여자의 동생이 그러니까 한때는 아버지의 처제였던 양반이 자기 언니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형부의 현재 마누라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형부의 장례식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반갑게 아버지의 옛 처제를 맞았다. 허리 때문에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았던 맞절도 했다. 두 여자는 한동안 손을 맞잡은 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말없이 나누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고맙소이." 한참 만에야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이리 가실 줄은 참말 몰랐그만이라, 메칠 전에 딸내미가 하는 슈퍼에서 봤을 적에만 혀도 쌩쌩하셨는디요."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오거리슈퍼였다. 그보다멀게 분명한, 옛 처제의 딸이 운영하는 슈퍼를 아버지는일부러 찾아서 갔을 것이다.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감옥일지도 모른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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