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크라이시스 - 색과 재난에 관한 다섯 편의 소설 ㅣ 앤솔러지 느슨 2
공현진 외 지음 / 상상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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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을 떠올려보자. 대개 거대한 풍경이 먼저 머리를 스친다. 도시를 집어삼키는 화재와 홍수, 땅을 뒤흔드는 지진, 뉴스 속 속보 자막처럼 삶을 단숨에 갈라놓는 사건들. 그러나 삶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재난은 훨씬 작은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관계를 무너뜨리고, 이해받지 못한 기억 하나가 오랜 시간을 붙들며, 상실은 아무 일 없던 하루의 색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이 앤솔러지는 그 작고 사적인 흔들림을 재난이라 부른다. 재난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비극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한 번쯤 마주하는 흔들림이 곧 재난이라는 사실을 이 앤솔러지는 다섯 가지의 색으로 펼쳐 보인다.

작품마다 재난의 모습은 서로 다르다. 전쟁에서 돌아왔지만 전쟁 밖으로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 꿈을 품은 채 생계를 버텨야 하는 사람, 말하지 못한 죽음의 이야기를 대신 기록하는 사람, 기후 재난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 평범함이라는 이름 아래 사랑을 잃고도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 하나같이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누구도 자신의 재난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들이 맞서는 대상은 재난 그 자체보다도, 재난 이후에도 계속 흘러가는 시간이다. 무너지는 순간보다 무너진 뒤를 살아가는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이다.

공현진의 「오렌지나 망고」에서 화자는 전쟁 후유증 속에 갇혀 살아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그의 삶을 가엾게 여길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다섯 작품을 하나로 엮는 문장처럼 읽힌다. 우리는 이해를 관계의 도착점처럼 여길 때가 많다. 상대를 이해해야 비로소 화해할 수 있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관계는 실패한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타인의 삶은 언제나 자신의 경험 바깥에 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이 전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은 사람이 상실의 무게를 대신 짊어질 수도 없다. 누군가의 절망은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끝내 닿지 않는 영역을 품고 있다. 삶은 설명되는 순간보다 설명에서 흘러넘치는 순간이 훨씬 많다. 타인을 이해했다는 확신은 때로 그 사람을 자신의 기준 안으로 가두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이해란 쉽게 결론 내리지 않으려는 태도에 더 가깝다. 『컬러 크라이시스』가 보여주는 관계 역시 이해의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기. 그 조심스러운 머무름은 서로를 하나의 존재로 남겨 두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작품집이 품고 있는 힘은 이해의 결과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음을 견디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피어난다. 작품 속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곁을 지킨다. 말을 건네고, 기록하고, 기다리고, 함께 머문다. 누구도 상대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상처를 없애 줄 수도 없다. 그럼에도 곁에 머무는 일은 가능하다. 이해가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이어진 관계가 조금씩 이해를 닮아 가는 것임을 이들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다.

소설 속에서는 반복해서 대피할 자리가 등장한다. 지진을 대비해 마련한 공간처럼 삶에도 저마다의 피난처가 필요하다. 인간은 재난을 막을 수 없다. 대신 잠시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은 어떤 때에는 식탁 아래가 되고, 어떤 때에는 한 권의 소설이 되며, 함께 가꾸는 텃밭이 되거나,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길이 되기도 한다. 재난이 삶에서 사라지는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삶은 흔들림을 지운 뒤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을 품은 채 계속된다. 그래서 우리는 재난을 피하는 법보다 그 안에서 머무는 법을 먼저 배운다. 서로에게 잠시 기댈 자리를 내어 주는 일, 어쩌면 그것이 삶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대피소일 것이다.

제목에 담긴 ‘컬러’는 재난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같은 재난이라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빛깔로 기억된다는 사실을 말하는 언어다. 누군가에게는 붉은 전쟁의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벽 직전의 푸른 빛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막 위에 피어난 해바라기의 노란색일 것이다. 재난은 하나의 얼굴을 갖지 않는다. 삶의 수만큼 다른 색을 띠고, 그 색만큼이나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흔든다.

『컬러 크라이시스』는 재난을 견뎌 내는 법을 가르치는 소설집은 아니다. 대신 타인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오래 바라본다. 이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래서 관계는 완성을 향하기보다 지속을 향해 나아간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를 구원하지도,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 주지도 못한다. 다만 상대가 홀로 무너지지는 않도록 자신의 자리를 조금 내어 준다. 재난은 그렇게 삶의 한가운데를 오래 지나간다. 그 시간을 함께 지나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삶은 다시 무너지지 않는다.


재난은 언제나 사건의 크기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어떤 것은 오래전 들은 말 한마디로 남고, 어떤 것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던 하루를 조금씩 다른 색으로 물들인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세상을 뒤흔드는 비극보다 사람 안에 오래 머무는 흔들림을 바라본다. 타인을 이해하고 싶지만 그 거리를 좀처럼 좁힐 수 없었던 사람, 상실 이후에도 관계를 쉽게 놓지 못하는 사람, 거대한 사건보다 일상의 미세한 감정을 오래 들여다보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깊게 읽힐 작품이다. 성급한 위로나 손쉬운 해답을 내놓기보다, 서로의 삶을 모두 알 수 없어도 같은 시간을 건너는 일은 가능하다고 이 앤솔러지는 이야기한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상대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섣불리 재단하지 않은 채 곁을 내어 주는 일인듯 하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색을 품고 있지만, 그 색들이 나란히 놓이는 순간 비로소 우리 시대의 재난이 어떤 얼굴이 아니라 어떤 시간으로 살아지는지를 보여 준다.

✏️도서출판 상상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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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괴물의 시간
마크 해던 지음, 박아람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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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해 보이는 풍경 한가운데를 날카롭게 찢어놓은 표지처럼, 『개와 괴물의 시간』은 익숙한 세계에 작은 금 하나를 낸다. 신화와 디스토피아, 현실과 우화를 오가는 여덟 편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하나의 시선으로 모인다. 그 시선은 인간이 오래전부터 품어 온 존재, ‘괴물’을 향한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괴물을 낯선 존재로 그려내는 대신,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괴물을 만들어 왔는지를 바라본다.

신화 속 괴물은 인간과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마크 해던은 그 오래된 신화를 다시 펼치며 시선을 바꾼다. 미궁 속에 갇힌 아이는 처음부터 괴물이었는지, 아니면 괴물이라는 이름 아래 평생을 살아야 했기에 괴물이 되어 갔는지 되묻게 만든다. 학교에서는 평범한 아이들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폭력을 일상의 언어로 익혀 간다. 핵전쟁 이후의 폐허에서는 국가가 인간을 숫자처럼 다루고, 저주받은 사냥꾼도, 영원을 견디는 노인도, 황야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도 결국은 같은 곳을 향한다. 타인의 시선은 한 존재를 어떻게 바꾸고, 또 어떻게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가. 괴물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가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 낸 이름처럼 보인다.

르네 지라르는 공동체가 자신의 불안과 폭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희생양의 구조를 이야기했다. 푸코는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며 권력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개와 괴물의 시간』은 이 두 사유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규정하는 편을 선택하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상대를 낯선 존재로 밀어낸다. ‘괴물’은 어쩌면 실체라기보다 사회가 만들어 낸 오래된 언어가 아닐까.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닌, 이해하기를 포기한 순간 태어나는 하나의 시선.

괴물이 된 존재보다 괴물을 만들어내는 인간들을 바라보자. 누군가를 미궁에 가두고, 누군가를 침묵하게 만들며, 누군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세우는 동안 가장 크게 변하는 것은 ‘괴물’이라 불린 존재가 아니다. 타인을 하나의 얼굴이 아닌 기능과 대상, 위험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인간의 마음이다. 악은 특별한 괴물이 저지르는 행위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타인을 사유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우리와 유달리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어쩌면 평범하다고만 표현할 수 있을 사람들이며, 바로 그렇기에 그들이 만들어 내는 폭력은 더욱 현실의 감각을 닮아 있다. 괴물은 탄생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다. 한 사람을 ‘너’로 부르는 일을 멈추면, 그 자리에 괴물이라는 이름이 들어선다.

인간은 언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가. 인간다움은 눈앞의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서 드러난다. 상대를 하나의 이름과 삶을 가진 존재로 마주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인간다움 역시 지켜낸다. 반대로 한 사람의 얼굴이 기능과 숫자로 치환되는 순간, 낙인은 너무도 손쉽게 탄생한다. 여덟 편의 이야기는 그 변화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무감각하게 이루어지는지를 놓치지 않는다. 타인을 괴물이라 부르는 순간, 가장 먼저 허물어지는 것은 상대의 인간성이 아닌 자신의 인간성이다.

이 소설집은 제목부터 ‘개’와 ‘괴물’이라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대비를 품고 있다.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과 인간에게 가장 먼 타자처럼 여겨지는 괴물. 개는 끝까지 ‘너’를 잃지 않는 존재이고, 괴물은 ‘너’를 ‘그것’으로 바꾸는 순간 탄생하는 이름이다. 관계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오래된 약속이며, 그 약속이 끊어진 자리마다 괴물이라는 이름은 반복되어 왔다. 개와 괴물은 서로 정반대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이지만, 결국 두 단어 모두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언어다. 결국 이 소설집이 응시하는 대상은 개도 괴물도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다.

수천 년 전 신화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신들이 살아 있어서가 아니다. 그 신화 속 인간들이 아직도 우리 곁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권력은 여전히 타인을 구분하고, 공동체는 여전히 희생양을 만들며, 인간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괴물이라 부른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인간이 두려움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개와 괴물의 시간』은 괴물이 누구인지를 밝히려는 소설집이 아니다. 인간은 어떤 순간 타인을 괴물로 호명하고, 그 선택이 다시 자신을 어떤 존재로 바꾸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미궁은 신화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을 이해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마다 인간은 새로운 미궁을 만든다. 그 안에서 어떤 이는 괴물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어떤 이는 자신이 미궁을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괴물은 늘 멀리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어쩌면 오래된 착각일지도 모른다. 『개와 괴물의 시간』은 그 믿음을 뒤집으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리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변주한 서사와 철학적 소설을 즐기는 독자, 짧은 이야기 안에서 오래 사유할 문장을 발견하는 단편 애호가라면 특히 깊게 빠져들 것이다. 여덟 편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듯하면서도 하나의 풍경을 완성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선과 악을 선명하게 가르기보다, 한 사람이 타인을 낙인찍고 밀어내는 과정을 끝까지 따라가 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괴물을 따라 걷던 발걸음은 어느새 인간이라는 오래된 미궁 한가운데에 닿아 있다. 그 미궁을 지나고 나면, 사람을 함부로 괴물이라 부르던 입술도 조금은 더디게 움직이게 된다.

✏️도서출판 문학수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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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벨로 2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43
솔 벨로 지음, 김현우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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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을 우리는 너무 쉽게 사용한다. 그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을 알게 되면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고, 그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찾으면 이해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삶에는 이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이 있다. 오래전의 굴욕을 평생 놓지 못하는 마음, 사소한 물건 하나를 잃고 자신의 삶 전체가 흔들리는 감각, 이미 지나간 가족사를 저마다 다른 기억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 인간은 논리만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며, 설명되지 않는 감정 역시 삶의 일부를 이룬다. 솔 벨로는 그런 인간을 오래 바라본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긋나 있다. 「사촌들」에서는 같은 가족사조차 사람마다 다른 기억 속에서 전혀 다른 진실이 되고, 「벨라로사 커넥션」에서는 감사가 오랜 시간을 지나며 한 사람을 움직이는 집념으로 자라난다. 「어떤 도둑질」에서 잃어버린 것은 반지 하나였지만 흔들린 것은 삶을 읽는 감각이었고, 「나를 기억하게 해줄 것들」의 수치는 세월이 흘러도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 「세인트로렌스 강가에서」의 시선은 흘러가는 강보다 쉽게 흘려보내지 못하는 인간의 시간을 오래 응시한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이성을 가진 채 살아가지 않는다. 감정보다 논리가 앞서는 인물은 없으며, 자신의 삶을 한 치의 모순 없이 살아가는 사람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벨로의 관심은 결핍을 폭로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인물들의 모순을 차례차례 펼쳐 보이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선과 악을 가르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 판결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 인물들은 때로 속물적이고, 자기기만에 빠져 있으며, 타인을 상처 입히기도 한다. 그 모습은 불편할 만큼 적나라하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의 행동보다 먼저 보이는 것은 그 행동을 낳은 삶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행동은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분류되지 않는다. 벨로의 시선은 변호보다 이해에, 심판보다 관찰에 머문다. 한 사람 안에 이성과 비이성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응시하며, 그것까지 포함한 전체를 한 인간의 생애로 받아들인다.

이런 시선은 문학이 인간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문학은 언제나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만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가장 초라한 얼굴을 외면하지 않을 때 인간을 더욱 깊이 헤아릴 수 있다. 누구나 상반된 마음을 품은 채 살아간다. 합리적이라고 믿는 선택 뒤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숨어 있고, 이성적인 판단 뒤에도 오래된 상처는 남는다. 벨로의 소설은 그 모순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이해란 모순을 지워 얻는 결과가 아니라, 그것까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멈추는 자리에서 이해가 시작된다.

그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서 언급된 ‘삶의 가치는 품위에 있다’는 말은 그의 작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품위는 흠 없는 삶에서 생겨나는 성질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허영과 불안, 뒤틀린 마음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을 단순한 결함으로 축소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누군가의 가장 반듯한 모습만 바라봐서는 부족하다. 감추고 싶은 마음과 설명되지 않는 감정, 비이성적인 선택까지 함께 바라볼 때 한 사람의 생애는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솔 벨로 문학의 품위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인간을 믿게 만들기보다 인간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드러난 모습 너머에 머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설명할 수 있는 부분보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 속에 한 사람의 진짜 모습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솔 벨로는 그 불가해한 영역을 외면하지 않은 작가다. 이 책은 완벽한 인물보다 흔들리는 인물에게서 삶의 진실을 발견한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모순과 복잡한 감정을 깊이 탐구하는 독자, 아름다운 위로보다 현실의 결을 가진 문학을 찾는 독자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인간을 쉽게 판단하는 대신, 한 사람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는 법을 알려준다. 또한 가족과 기억, 상실과 시간의 흔적을 섬세하게 그려낸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과 한 작가가 평생 바라본 인간에 대한 사유를 따라가고 싶은 독자에게도 자신의 인간 이해를 넓혀가는 시간이 될 것이다.

✏️도서출판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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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왈츠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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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는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문제의식이 있다.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영혼, 문명을 움직여 온 지식,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 『영혼의 왈츠』는 그 익숙한 소재들을 다시 꺼내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 낸다. 종말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그러나 시선은 미래보다 훨씬 먼 과거를 향한다. 인류가 처음 불을 지피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는 결국 한 가지 사실을 보여 준다. 오늘의 세계는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선택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외제니가 전생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오를수록 문명은 태어나고 성장한다. 불이 전해지고 문자가 만들어지며 지식이 축적된다. 하지만 그 곁에는 언제나 그것을 없애려는 힘도 함께 존재한다. 작품은 선과 악의 대결을 그리는 데 머물지 않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을 따라간다. 시대가 달라져도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지식은 반복해서 의심받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먼 과거를 다루면서도 이상할 만큼 현재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작품 속에서 문명은 거대한 업적보다 전해지는 과정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누군가는 불을 지키고, 누군가는 문자를 남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이어받아 다음 시대로 건넨다. 그 흐름이 한 번 끊길 때마다 인간은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발전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 또한 문명을 이어 온 힘이었다. 그래서 작품이 말하는 문명은 기술의 발전보다 인간의 태도에 더 가까이 닿아 있다. 문명은 눈에 보이는 성취보다 보이지 않는 신뢰를 통해 이어진다. 앞선 세대가 남긴 것을 다음 세대가 기꺼이 받아들여 자기 삶으로 이어 갈 때, 시간은 비로소 역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문명에서 반복되는 것은 전쟁이나 폭력이 아니다. 두려움 앞에서 사고를 멈추고, 다른 목소리를 밀어내며, 자신의 확신만을 진실이라 믿는 태도다. 그런 선택은 한 사람에서 끝나지 않는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며, 행동은 공동체의 분위기를 만든다. 결국 역사는 거대한 사건보다 수많은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한 번의 잘못으로 시대를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사고방식이 오래 반복될 때 그것은 개인의 습관을 넘어 한 시대의 상식이 된다.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오래도록 외면해 온 선택들이 도착한 자리에 그것이 있다.

그렇다고 『영혼의 왈츠』가 인간을 비관하는 소설인 것은 아니다. 같은 영혼이 다시 만나고, 비슷한 삶이 이어진다고 해서 미래까지 정해지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작품이 과거를 향하는 이유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의 삶을 다시 바라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서다. 자유 의지는 운명을 거스르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는 태도에 가깝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판단이 미래라는 시간을 계속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에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의 왈츠』는 영혼과 윤회, 문명과 역사, 사랑과 자유 의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 낸다. 그러나 작품이 오래 보여 주는 것은 영혼의 신비보다 생각하는 인간의 가능성이다. 서로 다른 의견과 새로운 지식을 밀어내고 하나의 답만을 진실로 믿는 순간 문명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는다. 반대로 익숙한 믿음을 의심하고,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을 조금씩 다음 시대로 이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끝까지 지키려는 것은 불이나 문자보다 먼저 스스로 사고하려는 의지이다. 오래 남는 것은 영혼이 시간을 건넌다는 설정보다, 생각을 멈추지 않는 일이 문명을 이어 왔다는 믿음이다.

제목 속 왈츠는 같은 리듬을 반복하는 춤이다. 그러나 같은 춤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매 순간 발을 디디는 자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도 그 리듬을 닮아 있다. 비슷한 갈등과 욕망은 되풀이되지만, 다음 발걸음을 어디에 둘지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영혼의 왈츠』는 12만 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가장 오래된 과거를 보여 주지만, 그 긴 여정 끝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미래다.

가장 먼 과거를 향해 떠난 이야기가 결국 오늘의 우리 앞에서 멈춰 선다. 베르베르의 작품들을 꾸준히 읽어 온 독자라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세계관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소설을 관통해 온 영혼과 문명, 자유 의지라는 문제의식이 하나의 흐름으로 완성되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만으로도 충분한 읽을 이유가 된다. 또한 문명의 발전보다 인간의 사고와 선택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 역사를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는 언어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품은 시간을 더욱 깊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왈츠』는 미래를 예측하기보다, 앞으로 어떤 생각을 이어 갈 것인지를 조용히 되묻게 하는 작품이다. 인류의 시간을 따라가는 거대한 여정이면서도, 마지막에는 한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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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왈츠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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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는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문제의식이 있다.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영혼, 문명을 움직여 온 지식,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 『영혼의 왈츠』는 그 익숙한 소재들을 다시 꺼내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 낸다. 종말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그러나 시선은 미래보다 훨씬 먼 과거를 향한다. 인류가 처음 불을 지피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는 결국 한 가지 사실을 보여 준다. 오늘의 세계는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선택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외제니가 전생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오를수록 문명은 태어나고 성장한다. 불이 전해지고 문자가 만들어지며 지식이 축적된다. 하지만 그 곁에는 언제나 그것을 없애려는 힘도 함께 존재한다. 작품은 선과 악의 대결을 그리는 데 머물지 않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을 따라간다. 시대가 달라져도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지식은 반복해서 의심받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먼 과거를 다루면서도 이상할 만큼 현재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작품 속에서 문명은 거대한 업적보다 전해지는 과정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누군가는 불을 지키고, 누군가는 문자를 남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이어받아 다음 시대로 건넨다. 그 흐름이 한 번 끊길 때마다 인간은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발전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 또한 문명을 이어 온 힘이었다. 그래서 작품이 말하는 문명은 기술의 발전보다 인간의 태도에 더 가까이 닿아 있다. 문명은 눈에 보이는 성취보다 보이지 않는 신뢰를 통해 이어진다. 앞선 세대가 남긴 것을 다음 세대가 기꺼이 받아들여 자기 삶으로 이어 갈 때, 시간은 비로소 역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문명에서 반복되는 것은 전쟁이나 폭력이 아니다. 두려움 앞에서 사고를 멈추고, 다른 목소리를 밀어내며, 자신의 확신만을 진실이라 믿는 태도다. 그런 선택은 한 사람에서 끝나지 않는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며, 행동은 공동체의 분위기를 만든다. 결국 역사는 거대한 사건보다 수많은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한 번의 잘못으로 시대를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사고방식이 오래 반복될 때 그것은 개인의 습관을 넘어 한 시대의 상식이 된다.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오래도록 외면해 온 선택들이 도착한 자리에 그것이 있다.

그렇다고 『영혼의 왈츠』가 인간을 비관하는 소설인 것은 아니다. 같은 영혼이 다시 만나고, 비슷한 삶이 이어진다고 해서 미래까지 정해지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작품이 과거를 향하는 이유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의 삶을 다시 바라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서다. 자유 의지는 운명을 거스르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는 태도에 가깝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판단이 미래라는 시간을 계속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에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의 왈츠』는 영혼과 윤회, 문명과 역사, 사랑과 자유 의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 낸다. 그러나 작품이 오래 보여 주는 것은 영혼의 신비보다 생각하는 인간의 가능성이다. 서로 다른 의견과 새로운 지식을 밀어내고 하나의 답만을 진실로 믿는 순간 문명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는다. 반대로 익숙한 믿음을 의심하고,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을 조금씩 다음 시대로 이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끝까지 지키려는 것은 불이나 문자보다 먼저 스스로 사고하려는 의지이다. 오래 남는 것은 영혼이 시간을 건넌다는 설정보다, 생각을 멈추지 않는 일이 문명을 이어 왔다는 믿음이다.

제목 속 왈츠는 같은 리듬을 반복하는 춤이다. 그러나 같은 춤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매 순간 발을 디디는 자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도 그 리듬을 닮아 있다. 비슷한 갈등과 욕망은 되풀이되지만, 다음 발걸음을 어디에 둘지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영혼의 왈츠』는 12만 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가장 오래된 과거를 보여 주지만, 그 긴 여정 끝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미래다.

가장 먼 과거를 향해 떠난 이야기가 결국 오늘의 우리 앞에서 멈춰 선다. 베르베르의 작품들을 꾸준히 읽어 온 독자라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세계관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소설을 관통해 온 영혼과 문명, 자유 의지라는 문제의식이 하나의 흐름으로 완성되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만으로도 충분한 읽을 이유가 된다. 또한 문명의 발전보다 인간의 사고와 선택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 역사를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는 언어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품은 시간을 더욱 깊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왈츠』는 미래를 예측하기보다, 앞으로 어떤 생각을 이어 갈 것인지를 조용히 되묻게 하는 작품이다. 인류의 시간을 따라가는 거대한 여정이면서도, 마지막에는 한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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