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얼굴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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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타인의 표정을 통해서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몸에 붙어 있지만 외부에 속한 기관. 나에게 속해 있으면서도 나만의 것이 아니고, 가장 익숙한 신체의 일부이면서 타인의 시선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얻는 것. 아베 코보는 이 기이한 신체의 성질을 하나의 사고실험으로 바꾸어놓는다. 얼굴을 잃은 남자. 그리고 그 얼굴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면. 이제 그는 자신을 보기 위해 타인의 눈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숨기기 위해 만든 가면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시험하기 시작한다.

얼굴이 사라진 뒤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거울 속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의 태도다. 같은 목소리와 같은 몸,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어느 날 얼굴만 잃었을 때 주변의 세계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를 대하지 않는다. 그 변화는 외모에 대한 편견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얼굴이 한 사람을 알아보게 하는 표식이라면, 그 표식이 사라진 순간 사회가 그 사람에게 부여하던 자리 역시 달라진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과 타인이 알아보는 자신 사이에 차이가 생기고, 그때부터 ‘나’라는 말은 혼자서는 완성하기 어려운 단어가 된다.

가면은 이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흉터를 가리기 위한 물건이지만, 가면을 쓰고 나서야 주인공은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대하고, 그는 달라진 시선 속에서 평소의 자신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던 선택을 한다. 가면이 감추는 것은 얼굴에 남은 흔적만이 아니다. 얼굴이라는 표면 아래 얌전히 접혀 있던 욕망까지 함께 풀려 나온다. 그래서 가면 아래에 있는 얼굴만을 진짜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사회 속에서 인간은 상황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내보인다. 직장에서의 표정과 집에서의 표정, 처음 만난 사람 앞의 태도와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앞의 태도가 모두 다르지 않은가.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사회적 관계를 무대 위의 연기에 비유했던 것처럼,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연출한다. 어느 얼굴이 진짜인지 묻는 순간 오히려 답하기 어려워진다. 가면을 벗으면 본래의 자신이 나온다는 믿음 역시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하나의 얼굴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기이한 이야기를 더욱 낯설게 만드는 것은 사건보다 그것을 기록하는 문장이다. 소설은 편지 같기도 하고, 조서 같기도 하며, 혼자 작성한 실험 보고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충분히 격렬하고 불온한 사건들이 이어지는데도 문장은 침착하다. 비명을 지르는 문장이 아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비정상적인 일을 보고하는 문장. 기괴한 사건을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마치 실험 결과를 보고하듯 기록하기 때문에 독자는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기보다 그의 사고방식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섬뜩함은 사건의 잔혹성보다 그것을 너무도 논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의 태도에서 발생한다.

이런 문학적 감각에서 한국의 모더니스트이자 아방가르드 작가인 이상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두 작가를 직접적인 영향 관계로 묶을 이유는 없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묘한 친연성이 있다. 이상이 일상적인 세계를 의식의 기묘한 구조 속으로 변환했다면, 아베 코보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따라가면서 현실을 낯설게 만든다. 설명 가능한 일을 너무 오래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설명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방식이다. ‘일본의 카프카’라는 별칭 역시 현실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이러한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비현실적인 사건을 만들어내기보다 현실의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 비현실에 도달하는 것.

가면을 둘러싼 실험이 사랑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소설의 불편함은 한층 선명해진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의 시선을 필요로 하는 순간, 사랑은 하나의 검증 대상이 된다. 사랑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사랑받고 있는가. 얼굴이 달라져도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욕망은 어느 순간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시험하려는 욕망으로 변한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타인을 분석하려는 태도로 바뀌는 순간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나의 인식으로 전부 환원할 수 없는 존재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끝내 나와 다른 자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한다. 그 과정에서 타인은 독립적인 존재라기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거울처럼 변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 사람을 자신의 세계 안에 가두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사랑의 문제가 개인적인 감정의 실패에 머물지 않고 타인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로 확장되는 이유다.

얼굴과 가면은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본다. 얼굴은 타인이 나를 인식하게 하는 표면이고, 가면은 내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를 구성하는 표면이다. 하나는 외부에서 나를 규정하고, 다른 하나는 내가 외부를 향해 나를 조절한다. 그 사이에 놓인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자아가 홀로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얼굴에서 가면으로 넘어갈수록 선명해지는 이 소설의 불안이다.

그리고 여기서 기록이 다시 등장한다. 세 권의 노트는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하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기록하는 순간 경험은 하나의 서사로 재구성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얼굴을 제작했듯 자신의 삶을 문장으로 제작한다. 얼굴이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표면이라면 기록은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표면이 된다. 따라서 글쓰기도 하나의 가면이 될 수 있다. 자신을 설명하는 행위가 자신을 투명하게 만드는 대신, 또 다른 형태의 자신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과 가면이 몸의 표면을 다루는 장치라면, 기록은 의식의 표면을 다루는 장치다.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거울을 필요로 하듯,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언어로 옮겨진 삶은 이미 한 번 선택되고 배열된 삶이다.

이렇게 보면 『타인의 얼굴』에서 실제로 해체되는 것은 얼굴 하나뿐이 아니다. 얼굴을 잃은 한 남자의 사건을 따라가면서 인간이 자신을 동일한 존재라고 믿는 방식도 조금씩 흔들린다. 얼굴을 바꾸면 타인의 시선이 달라지고, 타인의 시선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자신에 대한 인식 역시 달라진다. 자아는 관계 바깥에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초상이 아니라, 타인과 마주하는 순간마다 달라지는 모습들 속에서 형성된다.

그래서 이 소설의 공포는 괴기나 폭력에서만 생겨나지 않는다. 가장 평범한 얼굴 하나가 얼마나 많은 타인의 시선 위에 놓여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하는 데 있다. 매일 거울을 보며 확인하는 얼굴조차 온전히 자신의 소유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 기억하는 사람, 사랑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있는 까닭이다. 얼굴을 잃은 남자가 새로운 얼굴과 함께 찾아 헤매는 것은 타인의 세계 안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가면을 쓰면 새로운 삶이 가능해지는 듯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시선과 욕망이 따라온다.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하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지만, 기록하는 순간 또 하나의 자신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타인에게서 자신을 확인하려 할수록 자신은 더 많은 얼굴을 갖게 된다.

얼굴은 내 몸에 있지만 나만의 것은 아니다. 가면은 내가 만들었지만 그 의미는 타인의 눈에서 결정된다. 기록은 내가 썼지만 그 안의 나는 문장 속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타인의 얼굴』은 인간이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세 가지 표면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벗겨내면서,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사용해온 ‘나’라는 단어를 낯선 것으로 만든다. 그 아래에 도달하면 진짜 얼굴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베 코보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편이다. 그 아래에서 발견되는 것은 완전한 ‘나’가 아니다. 타인의 시선과 기억과 언어를 거치며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존재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얼굴이라는 가장 익숙한 신체는 가장 낯선 것이 된다. 거울 속에서 매일 확인하면서도 스스로 직접 볼 수 없고, 타인이 알아보아야 비로소 사회적인 의미를 얻는 것. 내가 가진 얼굴이면서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얼굴. 평생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의 눈으로 본 적 없는 얼굴.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낯선 얼굴은 바로 그것이다.

✏️문예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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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문명 - 숲이 물러난 자리에 새겨진 5,000년의 기록
존 펄린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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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인간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왔다. 왕조가 세워지고 제국이 무너졌으며, 전쟁과 혁명과 발명이 시대의 경계를 만들었다. 자연은 그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밀려났다. 강은 도시 옆을 흘렀고 숲은 도시 바깥에 있었다. 그저 인간이 살아갈 장소를 제공하는 풍경처럼. 존 펄린의 『숲과 문명』은 이 오래된 역사 서술에서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린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리스와 로마를 지나 베네치아와 영국,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이르기까지 문명이 움직여온 경로를 따라가며, 그 아래에 깔려 있던 물질을 추적한다. 왕의 이름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제국의 국경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숲이다.

나무는 문명의 가장 오래된 재료였다. 집과 성벽과 선박을 만들었고, 장작과 숯이 되어 인간의 생활과 산업을 움직였다. 금속을 제련하는 데에도 막대한 목재가 필요했다. 숲을 걷어낸 땅은 농경지가 되었고, 그곳에 남아 있던 나무의 뿌리는 토양을 붙들고 물의 흐름을 조절했다. 인간이 숲에서 얻은 것은 목재만이 아니었다. 문명이 살아갈 수 있는 물질적 조건 전체가 숲과 얽혀 있었다. 펄린이 보여주는 역사의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문명들이 이 사실을 거의 같은 방식으로 경험했다는 데 있다. 숲이 풍부하면 도시가 성장했고, 인구와 산업이 커질수록 더 많은 나무가 필요했다. 아테네의 해군력도, 로마의 거대한 건축물도, 베네치아의 선박도 숲을 소비하며 유지되었다. 영국은 목재와 숯의 부족을 석탄으로 돌파하면서 산업혁명의 문을 열었다. 문명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전쟁과 정치의 기록보다 나무의 수명이 더 중요한 연대기가 된다.

산림 파괴를 문명의 부작용이라고 부르기에는 이 구조가 지나치게 정확하다. 인간은 숲을 파괴한 뒤에야 문명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문명을 발전시키는 바로 그 과정에서 숲을 소비했다. 농지를 넓히기 위해 나무를 베고, 도시를 만들기 위해 목재를 가져오고, 금속을 생산하기 위해 숲을 태웠다. 각각의 선택은 당시의 삶 안에서는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그 합리성이 축적되는 방식에 있었다.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지는 순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숲이 줄어들면 토양을 붙들던 뿌리가 사라지고, 흙이 물에 쓸려가며, 강과 항구가 변하고, 농업의 생산성이 떨어진다. 인간이 계산한 것은 나무의 가치였지만 자연이 치른 비용은 토양과 물과 생명의 형태로 나타났다. 문명은 자신의 성장에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계산하면서도, 그 성장을 가능하게 한 조건의 가격에는 무심했다.

여기에서 ‘발전’이라는 단어의 이상한 성격이 드러난다. 인간은 부족함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돌파했다. 목재가 모자라면 더 먼 숲으로 갔고, 연료가 부족하면 새로운 연료를 찾았으며, 생산량의 한계가 나타나면 더 효율적인 기술을 만들었다. 영국의 석탄 사용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목재라는 오래된 한계를 벗어난 순간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세계의 크기도 커졌다. 기술은 필요를 충족시키는 장치인 동시에 필요의 규모를 확장하는 장치가 되었다. 더 효율적인 생산은 더 많은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더 많은 생산은 새로운 소비를 만들어냈다. 한계를 넘어선다는 말은 때로 한계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더 멀리 있는 한계까지 달려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단순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인간은 숲을 이용했지만 동시에 숲이 유지하는 토양과 물에 의존했다. 자연에서 자원을 꺼내오는 능력이 커질수록 인간은 자신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는 착각을 강화했다. 산은 광산이 되고 강은 수력원이 되며 숲은 목재 저장고가 된다. 하나의 살아 있는 세계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의 목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목록에서 빠진 것들이 인간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다. 숲이 제공하는 그늘과 물, 토양과 생물다양성은 목재의 가격표에 들어가지 않는다. 인간에게 쓸모가 있는가를 기준으로 자연을 분류하는 순간, 인간에게 직접 쓰이지 않는 것들은 너무 쉽게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오래된 관념은 결국 인간이 자연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식이기도 했다.

펄린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또 하나의 장면은 이동이다. 숲이 고갈되면 인간은 다음 숲을 찾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로, 유럽에서 대서양 너머로 자원의 중심이 옮겨가는 동안 새로운 산림은 새로운 문명의 연료가 되었다. 고갈은 이동으로 연기할 수 있었다. 한 지역의 풍요가 사라지면 다른 지역의 풍요를 가져오면 됐다. 하지만 현대의 문명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일 수 없다. 산업과 교역은 지구 전체를 하나의 소비망으로 연결했고, 한 지역에서 벌어진 산림의 변화가 다른 지역의 생산과 소비와 기후에까지 이어진다. 무엇보다 지구 바깥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또 하나의 숲이 없다. 오랫동안 인간은 부족함을 만나면 장소를 바꾸었다. 이제 장소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시대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이제 문명의 능력을 무엇으로 측정해야 할까. 더 많은 땅을 경작하는 능력, 더 많은 철을 생산하는 능력, 더 많은 에너지를 끌어내는 능력, 더 빠르게 이동하고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내는 능력. 인류는 오랫동안 이것을 발전의 지표로 삼아왔다. 풍요는 늘 ‘얼마나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숲과 문명』이 보여주는 역사는 그 풍요의 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었는지를 되묻는다. 성장에는 자원이 필요했고, 자원은 언젠가 고갈되었다. 인간은 고갈을 새로운 자원으로 해결했고, 새로운 자원은 다시 더 큰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 순환을 멈추지 않는 한 문명의 외연은 계속 넓어질 수 있지만, 그 외연을 지탱하는 세계의 면적은 무한하지 않다.

어쩌면 문명의 역사는 자연을 정복해온 역사가 아니라 자연의 한계를 계속 바깥으로 밀어내온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숲이 사라지면 다른 숲으로, 목재가 부족하면 다른 연료로, 땅이 부족하면 다른 대륙으로. 인간은 언제나 다음을 찾아냈다. 그 능력이 인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동시에 그 능력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의존하는 세계의 한계를 잊어버렸다. 이제는 다음 숲이 없다. 다음 대륙도 없다. 바깥으로 밀어낼 자연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의 문명이 마주한 가장 낯선 조건이다.

그래서 『숲과 문명』은 숲을 보존해야 한다는 결론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책이 오래된 산림의 역사를 통해 건드리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문명이라고 불러왔는가에 관한 문제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멀리 이동하고, 자연이 가진 한계를 기술로 돌파해온 능력. 우리는 그것을 발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계를 돌파하는 능력만으로 문명을 평가한다면, 그 문명이 자신의 생존 조건까지 소비해버리는 순간에도 여전히 발전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쩌면 문명의 수준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올 수 있는가보다,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에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숲은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고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랫동안 숲을 자신의 역사에서 주변부로 밀어냈다. 펄린은 그 주변부를 다시 중심으로 가져온다. 그러자 우리가 발전이라고 불러온 수천 년의 시간이 나무의 성장과 벌목, 토양의 소실과 새로운 숲으로의 이동이라는 물질의 역사와 포개진다. 인간의 문명은 숲 위에서 시작되었고, 숲을 소비하며 몸집을 키웠다. 이제 그 문명이 정말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는 얼마나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소비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얼마나 배울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문명의 다음 장에는 아마 새로운 숲의 이름보다, 더 이상 숲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포기해야 할 것들의 이름이 먼저 적혀야 할 것이다.

✏️도서출판 북퀘스트로부터 오퀘스트라 4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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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이의 해부학
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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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부터 자정까지 단 열두 시간. 남편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파헤치려는 캐밀과, 그의 남편이 10년 전 사고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오브리는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주기로 한다. 오브리는 캐밀의 옷을 입고 휴대전화를 들고 자동차를 운전하며 캐밀의 이름으로 세상 속을 걸어간다. 그동안 캐밀은 남편의 감시에서 벗어나 자신이 알고 싶은 진실을 찾아간다. 서로의 삶을 잠시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계획이지만, 다음 날 아침 캐밀의 남편이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두 사람의 공모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일이 오히려 알리바이의 의미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알리바이의 해부학』은 이 기묘한 설정에서 출발해 범인을 찾는 과정과 한 사람을 믿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빠른 속도로 풀어낸다.

알리바이는 시간과 장소를 증명하는 장치다. 그러나 그 증명이 성립하려면 먼저 하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기록은 무엇을 보여주는지. 여러 조각이 한 방향으로 맞물릴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결국 알리바이의 힘은 진실 그 자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진실처럼 보이도록 배열된 정보에서 발생한다. 사실은 혼자서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누군가가 사실을 선택하고, 순서를 정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하나의 서사가 된다. 같은 사건도 어떤 장면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히고,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에 따라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다. 『알리바이의 해부학』은 바로 이 과정을 스릴러의 속도 안에 숨겨놓는다. 독자는 사건의 진실을 한 번에 전달받는 대신 여러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과하며 하나의 그림을 조립한다. 그림이 완성될수록 처음에 보았던 조각들의 의미가 달라진다. 독자는 진실에 가까워지는 동시에 자신이 믿었던 이야기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이 구조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얻는 정보 역시 언제나 부분적이다. 상대가 말해준 기억, 함께 보낸 시간, 반복해서 관찰한 습관,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모여 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 이미지가 오래 유지되면 우리는 그것을 실제 인물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에는 관찰할 수 없는 시간이 존재한다. 혼자 있을 때의 생각,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기억,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한 감정은 타인의 시야 밖에 놓여 있다. 한 인간의 정체성에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타인이 기억하는 시간이 함께 포개져 있다. 내가 기억하는 나와 타인이 기억하는 나는 언제나 조금씩 다르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와 실제로 살아가는 나 사이에도 간격이 생긴다. ‘나’라는 존재는 혼자 완성하는 자아인 동시에 타인의 기억 속에서 계속해서 다시 만들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브리가 캐밀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장면은 이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름과 물건, 자동차와 휴대전화, 익숙한 행동 몇 가지가 한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는 표지가 된다. 외부에서 바라본 인간은 놀라울 만큼 많은 흔적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이 아무리 정교하게 복제되어도 한 사람의 기억과 경험까지 그대로 옮겨갈 수는 없다. 누군가가 알고 있는 나, 내가 기억하는 나,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 사이에는 각기 다른 얼굴이 놓인다. 오브리가 캐밀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열두 시간은 바로 그 차이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밀어붙인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보다 그것을 판단하는 타인의 믿음이 얼마나 쉽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정체성에는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시간. 둘은 완전히 포개지지 않으며, 그 사이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끊임없이 변한다.

캐밀과 벤의 관계에서는 그 거리가 감시의 형태로 나타난다. 가까운 관계에서 상대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욕망이 상대의 위치와 행동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려는 행위로 변하면 관계의 공간은 달라진다. 미셸 푸코가 감시의 구조를 설명하며 주목했던 것도 그 시선이 개인의 내면으로 스며드는 과정이다. 감시의 힘은 감시자가 눈앞에 있을 때보다 그 시선이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왔을 때 더욱 강해진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를 관리하기 시작한다. 무엇을 말할지 고르고, 어디에 갈지 계산하고,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먼저 생각한다. 결국 타인의 시선은 행동을 제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꾼다. 그런 환경에서 오브리의 열두 시간은 일종의 역할 교체다. 감시받는 사람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서 고정되어 있던 관계의 시선이 잠시 뒤집힌다. 동시에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야 한다는 역설도 생겨난다. 자유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빌리는 이 설정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타인의 시선 속에서 구성하는지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소설의 긴장은 현재에서 과거로 뻗어간다. 현재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오래전 사건을 들여다봐야 하고, 과거의 사건을 이해하려면 그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관하는 기록물이 아니다. 현재의 감정과 이해관계에 따라 같은 장면의 의미가 달라지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갈라진다. 한 가족 안에서 같은 사건을 공유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과거를 삶의 중심에 놓고, 누군가는 그 과거를 봉인한 채 현재를 살아간다. 사건은 하나지만 그 사건이 각자의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제각각이다. 그래서 오래된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기보다 오히려 현재의 선택을 설명하는 힘으로 변한다. 과거는 뒤에 놓인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현재가 된다.

진실을 향해 움직이는 과정에서는 각자가 지키고 싶은 것이 달라진다. 누군가에게 진실은 반드시 밝혀야 할 사실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이다. 이 차이는 인물들의 행동을 선명한 선악의 구도로 정리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야기를 선택하고, 그 이야기를 믿을 만한 형태로 만들어간다. 이때 거짓말은 삶을 감추는 도구인 동시에 삶을 계속하기 위한 방어가 된다. 하나의 거짓말이 또 다른 침묵을 만들고, 침묵이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면서 사람들의 관계와 기억은 복잡하게 얽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에서 진실을 찾는 일은 사건의 정답을 확인하는 작업을 넘어, 서로 다른 삶의 서사를 읽어내는 일이 된다.

이 지점에서 제목의 ‘해부학’이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해진다. 해부는 겉으로 드러난 형태를 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내부의 구조를 살피는 행위다. 『알리바이의 해부학』 역시 알리바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 어떤 시간과 기억과 관계가 들어 있는지를 차례로 들여다본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는 그 사람이 지키려는 것이 있고, 특정한 장소에는 지나간 사건의 흔적이 있으며, 한 사람의 침묵에는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역사가 들어 있다. 알리바이를 해부한다는 것은 사건의 외피를 벗겨내는 동시에 그 사건을 둘러싼 인간의 구조를 살피는 일이다. 범죄의 진실을 찾는 과정이 인간의 기억과 관계, 욕망과 두려움을 들여다보는 과정으로 넓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게 바라보면 ‘누가 누구의 알리바이가 되었는가’라는 문장은 살인사건을 향한 질문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향한 문장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완전히 알 수 없고, 그 사람이 보여준 장면들을 이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상대가 건네준 이야기와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겹쳐질 때 비로소 한 사람이 완성된다. 그 과정에는 선택이 개입한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침묵할지, 어떤 모습으로 타인에게 남을지를 결정하는 선택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모든 시간을 타인에게 건넬 수 없기에 결국 몇 개의 장면을 골라 자신을 설명한다. 그것이 기억이 되고, 변명이 되고, 때로는 진실이 된다. 삶 전체를 증명할 수 없는 인간에게 이야기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오래된 알리바이다.

『알리바이의 해부학』은 그 이야기가 얼마나 쉽게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빠른 호흡의 스릴러 안에 담아낸다. 범인을 찾는 동안 독자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사건의 단서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에 부여했던 신뢰, 한 사람에 대해 완성해놓은 이미지, 너무 익숙해서 의심하지 않았던 관계까지 함께 다시 살펴보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비밀이 늦게 드러나는 까닭도 결국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까움은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익숙함이라는 필터를 만든다. 오래 알고 지낸 얼굴일수록 우리는 그 얼굴에 익숙한 의미를 먼저 덧씌운다. 신뢰는 관계를 이어가는 힘이면서 상대가 건네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을 따라가는 동안 의심의 방향은 사건에서 관계로, 관계에서 자기 자신으로 옮겨간다. 누군가를 믿는 방식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만큼이나 내가 가진 기억과 욕망, 기대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알리바이의 해부학』이라는 제목은 사건의 핵심을 설명하는 동시에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건드린다. 알리바이를 해부한다는 것은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었는지, 다른 사람은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 믿음이 관계 속에서 어떤 형태로 굳어졌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누가 누구의 알리바이가 되었는가. 처음에는 범인을 찾기 위한 질문이었던 문장이 마지막에는 사람을 믿는 방식에 관한 문장으로 넓어진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알고 있다고 믿을 때, 그 믿음에는 언제나 그 사람이 보여준 이야기와 내가 완성한 해석이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몇 개의 장면으로 남는다. 그 장면들이 모여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우리는 그 이야기의 일부를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알리바이가 만들어진다. 어떤 것은 진실을 지키고, 어떤 것은 진실을 감추며, 어떤 것은 한 사람을 오래도록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알리바이의 해부학』은 그 복잡한 구조를 살인사건의 속도 안에서 세밀하게 해부한다.

✏️도서출판 문학동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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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떠나는 사람 - 태원준 여행 산문집
태원준 지음 / 김영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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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준비하는 일. 낯선 곳으로 떠나기 위해 우리는 그곳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한다. 목적지를 검색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이동 경로를 확인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미리 상상해본다. 낯섦을 통제할수록 여행은 편안해진다. 그러나 태원준의 『매일 떠나는 사람』에서 오래 기억되는 장면들은 대개 그 통제가 실패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공사 중인 관광지를 만나거나,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거나, 계획에 없던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들. 25년 동안 109개국 900여 도시를 여행한 저자는 여행을 완벽하게 설계하는 법보다 계획이 어긋난 뒤에도 다음 장면으로 나아가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여행지를 소개하는 산문집이라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통과하며 축적된 한 여행자의 경험론에 가깝다.

여행은 제법 잘 짜인 계획의 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1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 여행이라고 덧붙인다. 계획을 훼방 놓는 변수는 여행의 성가신 오류가 아니라 평범한 일정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여행은 오히려 금세 단조로워질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여행에서의 실패와 우연은 서로 반대편에 놓여 있지 않다. 같은 변수에서 하나는 허탕으로, 다른 하나는 뜻밖의 행운으로 나타날 뿐이다. 여행자는 그 차이를 미리 결정할 수 없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계획의 완성도가 아니라 계획 밖으로 밀려난 뒤 무엇을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할수록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더 선명해지고, 지나고 나서야 그 사건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태원준이 여행에서 길러온 능력은 모든 변수를 제거하는 기술이 아니라, 변수가 생긴 뒤에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감각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편리한 여행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스마트폰 하나면 길을 찾고, 번역하고, 숙소를 구하고, 현지의 음식과 명소까지 미리 알아볼 수 있다. 낯선 곳에 가면서도 낯선 상태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의 우연은 대개 그 반대편에서 발생한다. 길을 몰라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 했던 순간, 잘못 들어선 골목, 예상과 달랐던 장소, 계획에 없던 대화가 여행을 개인적인 기억으로 만든다.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여행은 효율적으로 변하지만, 효율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경험까지 함께 얻는 것은 아니다. 태원준이 오래된 여행의 방식을 회상하는 이유도 과거가 낭만적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미리 알아낼 수 없었던 시절에는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까닭이다. 여행은 낯선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떠나는 행위인데, 정작 그 낯섦을 지나치게 잘 관리하는 순간 여행의 중요한 일부가 사라질 수도 있다. 편리함과 우연 사이의 간격이 이 책에서 여행을 바라보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으로 읽히는 이유다.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는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저자가 말하듯 여행자는 그곳에 막 첫발을 들인 순간 현지의 열 살짜리 아이보다도 부족하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방법부터 검색해야 하고, 익숙한 언어와 교통체계도 사용할 수 없다. 평소에는 혼자서 해결하던 사소한 일들이 낯선 도시에서는 누군가의 설명과 도움을 필요로 한다. 여행은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감각을 잠시 걷어내고, 인간이 얼마나 많은 타인의 도움 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지를 드러낸다. 길을 알려준 사람, 서툰 언어를 기다려준 사람, 난감한 여행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 사람. 평범한 일상에서는 작게 지나쳤을 호의가 낯선 세계에서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여행자의 특별한 능력은 혼자 살아남는 능력보다 오히려 도움을 받을 줄 아는 능력에 가까워 보인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타인은 경쟁하거나 경계해야 할 대상에서 함께 세계를 통과하는 사람으로 모습을 바꾼다.

여기에서 이 책의 여행관은 한 단계 더 넓어진다. 여행지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도시에서 다른 여행자를 만난다. 저자는 귀국하는 순간 “나는 그들이 되고, 그들은 내가 된다”(226쪽)고 말한다. 이 문장은 여행에서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쉽게 뒤집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지금은 길을 알려주는 현지인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길을 잃은 여행자가 될 수 있고, 오늘 도움을 받는 사람도 내일 누군가에게 도움을 건넬 수 있다. 여행은 이처럼 ‘우리’와 ‘타인’을 고정된 구분으로 두지 않는다. 국적과 언어, 익숙함과 낯섦은 한 사람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여행을 오래 한 사람에게 세계는 수많은 나라의 목록으로 남기보다 수많은 관계의 망으로 남게 된다. 낯선 사람에게 받은 작은 친절이 다른 낯선 사람에게 건네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 여행에서의 경험은 개인의 추억을 넘어 삶의 태도가 된다.

여행이라는 행위에는 ‘집’이라는 감각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매일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에게 집은 그리운 하나의 주소로 남아 있을까. 한곳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는 세계 곳곳을 이동하는 삶이 때때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원준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반대의 가능성이 보인다. 집이 하나의 장소에만 고정되어 있다면 계속 떠나는 삶은 필연적으로 집을 잃는 일이겠지만, 여행 속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 다시 꺼내보는 기록까지 삶의 일부가 된다면 집의 범위 역시 조금씩 넓어질 수 있다. 어디에서든 잠시 머물고, 그곳에서 관계를 만들고, 다시 떠나는 삶에는 장소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세계를 낯선 곳으로만 남겨두지 않는 감각이다.

여행이 지나간 자리에는 장소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것을 바라보던 관점의 변화가 남는다. 여행 전에는 하나의 기준으로 보이던 삶이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보이고, 낯선 사람으로만 여겼던 존재에게서 도움을 받으며 타인에 대한 거리도 달라진다. 여행자는 세계의 크기를 넓히는 동시에 자신이 가진 세계관의 크기를 다시 측정하게 된다. 사진으로 남는 풍경보다 오래가는 것은 그 풍경을 바라보던 시선의 변화일 것이다. 태원준이 25년 동안 축적한 여행의 기록이 의미를 갖는 것도 수많은 장소를 다녀왔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만난 우연과 불편함, 친절과 실패가 쌓이면서 한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매일 떠나는 사람』의 ‘매일’은 이동의 빈도를 뜻하는 말로만 읽히지 않는다. 매일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익숙한 세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계속 살피는 사람이다. 계획을 세우되 계획이 틀어질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우연이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며,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기억을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는 사람. 그렇게 여행은 출발과 귀환 사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 넓어진 시선은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세계 곳곳에서 만난 사람과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한 번 길 위에서 만난 우연과 사람들은 여행이 끝났다고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돌아온 뒤에도 그 기억은 익숙한 하루의 틈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하고, 타인의 호의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다음 만남을 준비하게 한다. 『매일 떠나는 사람』이 말하는 여행은 그래서 출발과 귀환 사이에 갇혀 있지 않다. 매일의 삶 속에서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일, 그때부터 여행은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된다.

길 위에서는 익숙한 것들의 질서가 잠시 느슨해진다. 계획해둔 경로에서 벗어나고,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고, 낯선 이의 친절에 기대어 하루를 건너면서 혼자 살아간다는 감각도 함께 흔들린다. 『매일 떠나는 사람』은 그 틈에서 여행의 진짜 의미를 건져 올린다. 여행을 단순한 관광이나 소비의 방식으로 바라보지 않고, 예상할 수 없는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가진 삶의 반경을 넓혀가는 경험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목적지보다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 계획에서 벗어난 순간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에게 이 책은 꽤 좋은 동행이 되어줄 것이다. 특히 낯선 사람의 작은 호의가 한 사람의 하루를 얼마나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여행하지 않는 날에도 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방법을 찾고 싶은 독자라면 태원준이 25년 동안 모아온 길 위의 장면들 속에서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여행의 형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떠남은 국경을 넘는 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는 익숙한 하루 한가운데서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늘 보던 세계에 낯선 빛 하나를 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도서출판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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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에서 온 신사
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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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애치먼의 『마리아나』와 『페루에서 온 신사』는 원래 한 권의 책에 함께 실린 두 중편이다. 비채가 두 작품을 나란히 소개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마리아나』가 사랑의 종결 이후를 바라본다면, 『페루에서 온 신사』는 죽음과 시간까지 건너 사랑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을 상상한다. 하나는 이별 뒤의 기억을, 다른 하나는 상실 이후에도 지속되는 욕망을 다룬다. 그러나 두 작품의 관심은 사랑의 시작이나 연애의 사건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애치먼이 오래 응시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경험을 통과한 인간의 변화다. 누군가를 사랑한 뒤에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관계가 사라진 뒤에도 그 변화만은 현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두 작품을 관통한다.

『마리아나』에서 이 문제는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선명해진다. 이탈리아에서 이타마르를 만난 마리아나는 짧고 강렬한 사랑을 경험하고, 관계가 끝난 뒤 그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중요한 것은 수신자의 응답이 아니다. 이미 떠난 사람에게 계속 말을 거는 행위 자체가 마리아나의 시간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함께했던 장면과 말들을 되짚으며 사랑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반복해서 통과한다. 과거는 지나간 사건으로 정리되지 않고 현재의 의식 속에서 계속 수정된다. 이타마르가 떠난 뒤에도 마리아나의 삶에는 그와 함께 있을 때 발견했던 욕망과 감각,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 남는다. 그래서 그녀가 상실한 것은 한 사람만이 아니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자기 자신 역시 상실의 일부가 된다.

이때 애치먼의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는 관계와 상당한 거리를 둔다. 타인은 나의 삶에 들어와 나를 변화시키는 존재이며, 그 변화는 상대가 떠난다고 해서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의 경험이 한 인간의 자기 인식을 바꾸어놓는다면 관계의 지속 여부만으로 그 사랑의 성패를 판단하기도 어려워진다. 마리아나가 이타마르를 계속 기억하는 이유 역시 그가 특별히 완전한 사람이어서라기보다, 그를 통해 자신 안에 존재하던 무엇인가를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은 기억 속에서 점차 하나의 인물인 동시에 하나의 시기가 된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만 가능했던 자아의 형태까지 함께 기억되는 것이다.

『마리아나』의 편지는 연애편지이면서 기억의 형식이기도 하다. 애치먼에게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보관하는 기능보다 현재의 감정을 다시 구성하는 힘에 가깝다. 마리아나는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때의 자신을 다시 만난다. 같은 사건도 현재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한때는 사랑의 증거였던 말이 나중에는 이별의 징후로 바뀐다. 사랑했던 순간은 과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기억하는 사람의 현재가 달라질 때마다 과거 역시 조금씩 모습을 바꾼다. 그래서 사랑의 종결 이후에 남는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현재의 자신을 계속 만들어가는 하나의 시간이다.

『페루에서 온 신사』는 이 사고를 현실의 시간 바깥까지 확장한다. 아말피 해안의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라울은 타인의 통증을 치유하고 그들이 숨겨온 삶의 일부를 알아맞히는 기묘한 인물이다. 오래전 사랑했던 마리아를 사고로 잃은 그는 수십 년이 지난 뒤 만난 마고에게서 그녀의 흔적을 발견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환생이라는 초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진행되지만, 애치먼이 바라보는 것은 환생의 진위보다 한 인간에게 과연 현재의 삶만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다. 라울이 말하는 ‘그림자 자아’는 실제로 살아온 나의 뒤편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의 나를 가리킨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존재했을 사람, 다른 시간에 누군가를 만났다면 경험했을 사랑, 살아보지 못한 삶까지도 현재의 자아를 구성한다는 발상이다. 사랑은 이처럼 한 사람의 현재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까지 이어놓는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시간을 바라본다. 마리아나는 이미 끝난 사랑을 기억 속에서 반복하며 ‘다르게 될 수 있었던 우리’를 상상한다. 라울은 시간 자체를 건너 ‘다시 만날 수 있는 우리’를 믿는다. 전자가 기억을 통해 과거의 가능성을 복원한다면 후자는 환생을 통해 가능성을 현재로 불러온다.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했던 세계, 애치먼이 ‘그럴 수도 있었던 것’과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설명해온 가능성의 영역이 두 작품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삶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은 길과 만나지 못한 사람, 하지 못한 말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미래까지 끌어안은 채 현재를 살아간다. 사랑은 특히 이 가능성의 영역을 넓힌다. 사랑에는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을 시간 너머로 연장하려는 욕망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페루에서 온 신사』에서 라울이 마고를 마리아와 겹쳐 바라보는 순간, 과거의 사랑을 보존하려는 마음은 현재의 한 사람을 과거의 이미지 안에 가둘 위험을 갖는다.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일과 눈앞의 사람을 그 사람의 대체물로 바라보는 일은 다르다. 애치먼은 이 차이를 명확한 윤리적 선언으로 설명하기보다 라울과 마고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 속에 배치한다. 과거를 잃지 않으려는 욕망이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에는 소유하려는 충동이 따라붙지만,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의 기억과 욕망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독립된 세계임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두 작품에서 상실은 사랑의 반대편에 놓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가진 성격을 드러내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사랑했던 사람이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 함께 상상했던 미래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은 현재의 감각을 강렬하게 만든다. 『마리아나』의 마리아나에게는 지나가버린 시간이, 『페루에서 온 신사』의 라울에게는 죽음으로 끊긴 시간이 현재를 향해 되돌아온다.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재한 사람과 관계를 지속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해석하는 방식 전체를 바꾸는 경험이 된다.

애치먼의 작품에서 사랑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랑은 행복한 상태로 오래 유지되는 감정이라기보다 인간의 감각과 기억, 시간의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사건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사랑했던 사람보다 그 사랑을 경험하면서 달라진 자신을 더 오래 데리고 살아간다. 『마리아나』의 편지는 그 변화를 기록하는 형식이고, 『페루에서 온 신사』의 환생은 그 변화를 시간의 경계까지 밀어붙이는 장치다. 현실적인 실연과 초현실적인 재회라는 전혀 다른 외형을 갖추었지만 두 작품의 내부에서는 같은 일이 일어난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인간은 그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왜 반복되는가. 상실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애치먼의 두 작품은 이에 대한 낙관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집착과 후회와 그리움의 자리로 데려간다. 그럼에도 사랑을 경험한 사람에게 그 이전의 안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삶에 하나의 가능성을 열고, 그 가능성이 사라진 뒤에도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의 감각을 바꾸어놓는다.

결국 『마리아나』와 『페루에서 온 신사』가 함께 보여주는 것은 사랑의 전과 중과 후가 서로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하기 전에는 가능성이 있고, 사랑하는 동안에는 자아가 변하며, 사랑이 지나간 뒤에는 기억과 상실, 살아보지 못한 삶이 남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과한 인간은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 삶을 안전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삶의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없는 삶은 상처받을 일도 적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향해 자신을 열어본 경험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세계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도 알기 어렵다. 애치먼이 두 작품에서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바로 그 확장이다. 누군가를 사랑한 뒤에는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자신까지 삶에 남는다. 사랑은 떠난 사람을 붙잡아두는 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 속의 한 장면으로 남는 대신,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일부가 된다.

✏️도서출판 비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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