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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떠나는 사람 - 태원준 여행 산문집
태원준 지음 / 김영사 / 2026년 7월
평점 :
여행을 준비하는 일. 낯선 곳으로 떠나기 위해 우리는 그곳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한다. 목적지를 검색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이동 경로를 확인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미리 상상해본다. 낯섦을 통제할수록 여행은 편안해진다. 그러나 태원준의 『매일 떠나는 사람』에서 오래 기억되는 장면들은 대개 그 통제가 실패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공사 중인 관광지를 만나거나,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거나, 계획에 없던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들. 25년 동안 109개국 900여 도시를 여행한 저자는 여행을 완벽하게 설계하는 법보다 계획이 어긋난 뒤에도 다음 장면으로 나아가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여행지를 소개하는 산문집이라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통과하며 축적된 한 여행자의 경험론에 가깝다.
여행은 제법 잘 짜인 계획의 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1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 여행이라고 덧붙인다. 계획을 훼방 놓는 변수는 여행의 성가신 오류가 아니라 평범한 일정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여행은 오히려 금세 단조로워질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여행에서의 실패와 우연은 서로 반대편에 놓여 있지 않다. 같은 변수에서 하나는 허탕으로, 다른 하나는 뜻밖의 행운으로 나타날 뿐이다. 여행자는 그 차이를 미리 결정할 수 없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계획의 완성도가 아니라 계획 밖으로 밀려난 뒤 무엇을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할수록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더 선명해지고, 지나고 나서야 그 사건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태원준이 여행에서 길러온 능력은 모든 변수를 제거하는 기술이 아니라, 변수가 생긴 뒤에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감각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편리한 여행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스마트폰 하나면 길을 찾고, 번역하고, 숙소를 구하고, 현지의 음식과 명소까지 미리 알아볼 수 있다. 낯선 곳에 가면서도 낯선 상태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의 우연은 대개 그 반대편에서 발생한다. 길을 몰라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 했던 순간, 잘못 들어선 골목, 예상과 달랐던 장소, 계획에 없던 대화가 여행을 개인적인 기억으로 만든다.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여행은 효율적으로 변하지만, 효율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경험까지 함께 얻는 것은 아니다. 태원준이 오래된 여행의 방식을 회상하는 이유도 과거가 낭만적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미리 알아낼 수 없었던 시절에는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까닭이다. 여행은 낯선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떠나는 행위인데, 정작 그 낯섦을 지나치게 잘 관리하는 순간 여행의 중요한 일부가 사라질 수도 있다. 편리함과 우연 사이의 간격이 이 책에서 여행을 바라보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으로 읽히는 이유다.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는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저자가 말하듯 여행자는 그곳에 막 첫발을 들인 순간 현지의 열 살짜리 아이보다도 부족하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방법부터 검색해야 하고, 익숙한 언어와 교통체계도 사용할 수 없다. 평소에는 혼자서 해결하던 사소한 일들이 낯선 도시에서는 누군가의 설명과 도움을 필요로 한다. 여행은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감각을 잠시 걷어내고, 인간이 얼마나 많은 타인의 도움 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지를 드러낸다. 길을 알려준 사람, 서툰 언어를 기다려준 사람, 난감한 여행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 사람. 평범한 일상에서는 작게 지나쳤을 호의가 낯선 세계에서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여행자의 특별한 능력은 혼자 살아남는 능력보다 오히려 도움을 받을 줄 아는 능력에 가까워 보인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타인은 경쟁하거나 경계해야 할 대상에서 함께 세계를 통과하는 사람으로 모습을 바꾼다.
여기에서 이 책의 여행관은 한 단계 더 넓어진다. 여행지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도시에서 다른 여행자를 만난다. 저자는 귀국하는 순간 “나는 그들이 되고, 그들은 내가 된다”(226쪽)고 말한다. 이 문장은 여행에서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쉽게 뒤집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지금은 길을 알려주는 현지인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길을 잃은 여행자가 될 수 있고, 오늘 도움을 받는 사람도 내일 누군가에게 도움을 건넬 수 있다. 여행은 이처럼 ‘우리’와 ‘타인’을 고정된 구분으로 두지 않는다. 국적과 언어, 익숙함과 낯섦은 한 사람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여행을 오래 한 사람에게 세계는 수많은 나라의 목록으로 남기보다 수많은 관계의 망으로 남게 된다. 낯선 사람에게 받은 작은 친절이 다른 낯선 사람에게 건네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 여행에서의 경험은 개인의 추억을 넘어 삶의 태도가 된다.
여행이라는 행위에는 ‘집’이라는 감각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매일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에게 집은 그리운 하나의 주소로 남아 있을까. 한곳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는 세계 곳곳을 이동하는 삶이 때때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원준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반대의 가능성이 보인다. 집이 하나의 장소에만 고정되어 있다면 계속 떠나는 삶은 필연적으로 집을 잃는 일이겠지만, 여행 속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 다시 꺼내보는 기록까지 삶의 일부가 된다면 집의 범위 역시 조금씩 넓어질 수 있다. 어디에서든 잠시 머물고, 그곳에서 관계를 만들고, 다시 떠나는 삶에는 장소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세계를 낯선 곳으로만 남겨두지 않는 감각이다.
여행이 지나간 자리에는 장소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것을 바라보던 관점의 변화가 남는다. 여행 전에는 하나의 기준으로 보이던 삶이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보이고, 낯선 사람으로만 여겼던 존재에게서 도움을 받으며 타인에 대한 거리도 달라진다. 여행자는 세계의 크기를 넓히는 동시에 자신이 가진 세계관의 크기를 다시 측정하게 된다. 사진으로 남는 풍경보다 오래가는 것은 그 풍경을 바라보던 시선의 변화일 것이다. 태원준이 25년 동안 축적한 여행의 기록이 의미를 갖는 것도 수많은 장소를 다녀왔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만난 우연과 불편함, 친절과 실패가 쌓이면서 한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매일 떠나는 사람』의 ‘매일’은 이동의 빈도를 뜻하는 말로만 읽히지 않는다. 매일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익숙한 세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계속 살피는 사람이다. 계획을 세우되 계획이 틀어질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우연이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며,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기억을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는 사람. 그렇게 여행은 출발과 귀환 사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 넓어진 시선은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세계 곳곳에서 만난 사람과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한 번 길 위에서 만난 우연과 사람들은 여행이 끝났다고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돌아온 뒤에도 그 기억은 익숙한 하루의 틈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하고, 타인의 호의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다음 만남을 준비하게 한다. 『매일 떠나는 사람』이 말하는 여행은 그래서 출발과 귀환 사이에 갇혀 있지 않다. 매일의 삶 속에서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일, 그때부터 여행은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된다.
길 위에서는 익숙한 것들의 질서가 잠시 느슨해진다. 계획해둔 경로에서 벗어나고,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고, 낯선 이의 친절에 기대어 하루를 건너면서 혼자 살아간다는 감각도 함께 흔들린다. 『매일 떠나는 사람』은 그 틈에서 여행의 진짜 의미를 건져 올린다. 여행을 단순한 관광이나 소비의 방식으로 바라보지 않고, 예상할 수 없는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가진 삶의 반경을 넓혀가는 경험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목적지보다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 계획에서 벗어난 순간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에게 이 책은 꽤 좋은 동행이 되어줄 것이다. 특히 낯선 사람의 작은 호의가 한 사람의 하루를 얼마나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여행하지 않는 날에도 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방법을 찾고 싶은 독자라면 태원준이 25년 동안 모아온 길 위의 장면들 속에서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여행의 형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떠남은 국경을 넘는 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는 익숙한 하루 한가운데서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늘 보던 세계에 낯선 빛 하나를 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도서출판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