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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평점 :
박지리가 세상을 떠난 지 열 해가 흘렀다. 그동안 그의 문장은 조금도 늙지 않았고,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은 지금도 여전히 세월의 바깥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더는 새로운 작품이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존재하는 문장들의 무게를 달리한다. 세 세대에 걸친 악의 역사를 좇는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작가의 부재와 인간의 계승이라는 두 개의 시간을 겹쳐 보이게 한다. 한 사람의 생애는 멈추었으나 그가 쓴 이야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삶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도착한 과거를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소설의 세계는 아홉 개의 지구로 분할되어 있다. 권력과 부가 집중된 1지구에서 버림받은 9지구까지, 숫자는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결정한다. 60년 전 발생한 12월의 폭동은 국가의 공식적인 역사 속에서 위험한 반란으로 기록되었고, 그 기억은 하위 지구 사람들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질서 안에서 성장한 다윈 영은 명문학교의 모범생이자 고위 관료의 아들이다. 그가 속한 세계의 안정은 누군가의 배제와 침묵을 토대로 유지되지만, 그에게 주어진 일상에서는 그러한 조건을 의심할 이유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오래전 발생한 살인 사건이 친구 루미의 추적을 통해 그의 일상에 들어오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질서에도 의문의 여지가 생긴다. 오래전 살해당한 소년 제이 헌터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은 다윈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계급은 제도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감각과 판단을 길들인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처럼, 사회적 환경에서 습득한 가치와 행동 양식은 개인에게 자연스러운 성향으로 체화된다. 아비투스는 자신이 속한 계층의 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내면의 습관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은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신뢰하며 어떤 삶을 가능하다고 여길 것인지까지 규정한다. 상위 지구의 사람들에게 하위 지구의 삶은 이해해야 할 현실보다 경계해야 할 위험으로 인식된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도덕적 기준조차 출신과 지위에 따라 다른 무게를 갖는다. 이 사회에서 악은 특정 개인의 내면에 고립된 성질로 설명되기 어렵다.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하고 다른 누군가의 특권을 보호하는 구조가 인간의 선택을 지속적으로 압박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압박이 모든 행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박지리는 사회적 조건과 개인의 책임이 서로를 침범하는 영역을 세밀하게 탐색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가족의 역사는 국가의 역사와 기묘하게 닮아 있다. 12월의 폭동을 기록한 사진과 삭제된 자료, 오랜 세월 반복되는 추도식은 모두 과거를 보존하거나 특정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와 연결된다. 기억은 사실을 저장하는 행위인 동시에 무엇을 드러내고 감출 것인지 결정하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가가 불편한 역사를 공식적인 기록에서 밀어내듯, 가족 역시 현재의 안녕을 위해 과거의 일부를 봉인한다. 그러나 삭제된 기록은 사라진 사건과 동일하지 않다. 침묵 속에서 유지된 비밀은 후손의 삶에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까지 과거의 이해관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때 혈연은 사랑과 보호의 관계를 넘어, 미처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전달되는 통로가 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은 가장 강력한 보호의 명분을 얻는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착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강렬한 유대 가운데 하나지만, 그 감정의 깊이가 언제나 윤리적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이유가 되는 순간, 선의 언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질된다.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이자 도덕철학자인 아이리스 머독은 도덕적 삶에서 자신의 욕망과 환상을 넘어 타인의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머독에게 도덕적 성찰은 행동을 결정하는 순간에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기중심적인 환상을 걷어내고, 그 사람의 독립적인 삶을 인정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윤리적 실천에 속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소설 속 가족애의 비극은 사랑의 결핍보다 그 시야의 편협함에서 발생한다. 가족을 지킨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타인의 고통은 감수해야 할 대가로 계산된다. 그렇게 인간은 사랑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으며, 타인의 삶을 침범할 권리까지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다윈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모순이 한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보여준다. 그는 처음부터 악의를 품고 살아온 소년이 아니다. 성실함과 공정함을 자신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존경하는 아버지의 삶에서 도덕적 모범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신이 신뢰했던 질서의 이면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한다. 진실을 아는 일과 그 진실에 따라 행동하는 일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인간은 무엇이 옳은지 이해하면서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상실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다윈의 선량함은 그가 지키고 싶은 세계와 충돌하는 순간 시험대에 오른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온 원칙을 스스로 유예하는 동안, 악은 낯선 충동보다 익숙한 애착의 언어를 통해 그의 내면에 자리를 얻는다.
이러한 전개는 성장소설의 익숙한 서사적 관습을 뒤집는다. 통상 성장의 과정에서 세계의 모순을 발견하는 경험은 자아의 확장과 윤리적 성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박지리의 세계에서 앎은 성숙을 보증하지 않는다. 김현정(2022)은 「박지리 청소년 소설에 나타난 ‘악’의 양상 연구」에서 세 세대에 걸친 악의 진화와 속죄의식의 부재를 분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성장이라는 말에 내재한 낙관을 걷어내고,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어떻게 악의 계보에 편입되는지 살펴보게 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을 빌리자면 인간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다.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따를 가치와 삶의 방향을 구체화한다. 다윈 역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족의 역사와 계급적 환경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 사실만으로 자신의 행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도덕적 한계와 마주하며, 그 한계를 넘어서거나 그 안에 자신을 가두는 선택을 거듭한다. 박지리는 성숙의 가능성과 타락의 가능성이 동일한 인간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가혹할 만큼 정교하게 드러낸다.
세 세대의 역사를 연결하는 후드는 작품의 이러한 사유를 응축한 사물이다. 처음에는 저항과 연대의 의미를 지녔던 물건이 시간이 흐르며 전혀 다른 목적에 동원된다. 하나의 사물이 역사적 맥락에 따라 의미를 바꾸듯, 악 역시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얻으며 자신의 존재를 지속한다. 여기서 제목의 ‘다윈’은 특별한 울림을 갖는다. 진화론을 정립한 찰스 다윈의 이름은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변화와 적응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환기하는 것처럼 읽힌다. 생물학적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환경에 따른 형질의 변화와 선택이며, 그 과정에는 인간이 기대하는 도덕적 진보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소설은 이러한 진화의 개념을 악의 역사에 빗대어, 시대마다 다른 명분을 획득하는 폭력의 생존 방식을 드러낸다. 선대의 선택이 만들어낸 조건을 후대가 물려받고, 그 조건 속에서 다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역사적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반복되는 폭력의 형식은 닮아 있지만, 각자의 선택에 부여되는 책임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박지리는 이러한 사유를 거대한 관념의 설명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사진과 녹음기, 오래된 의복과 기록물처럼 구체적인 사물에 과거의 흔적을 새겨 넣고, 미스터리의 추적 과정에 사회의 역사와 가족의 비밀을 겹쳐 놓는다. 독자는 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믿어온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재검토하게 된다. 피해자의 삶에도 폭력의 흔적이 있고, 가해자의 내면에도 사랑과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러한 복합성은 범죄의 책임을 흐리는 장치로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다양한 감정과 이해관계 속에서 발생하는지 드러냄으로써 책임의 문제를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856쪽에 이르는 분량은 수많은 인물의 삶을 하나의 윤리적 문제로 수렴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으로 기능한다.
우리는 왜 지금도 박지리의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그의 소설에서 인간은 자신의 도덕을 배반하면서도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 믿을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사랑은 잔혹함과 공존하고, 정의에 대한 확신은 이해관계에 따라 손쉽게 방향을 바꾼다. 박지리는 이러한 모순을 인물의 성격적 결함으로 축소하지 않고, 그들이 속한 사회와 관계의 역사 속에서 치밀하게 길어 올린다.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은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에 관한 단순한 판정 이상의 것이 아닐까. 그의 인물들은 자신의 잘못을 설명할 언어를 너무도 능숙하게 찾아낸다. 생존과 보호, 사랑과 책임이라는 익숙한 가치들이 폭력의 명분으로 동원되고, 그럴듯한 이유를 획득한 잔혹함은 평범한 일상의 일부가 된다. 인물들은 저마다 구축한 논리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독자는 그 논리들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인간의 복잡성을 경험한다. 박지리는 독자가 누군가를 쉽게 단죄할 수 있도록 인물들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일이 죄의 무게를 덜어주도록 허락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 냉정한 거리에서 그의 문학은 인간을 향한 예리한 통찰을 획득한다. 선량한 사람에게도 잔혹함의 가능성이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의지가 타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 박지리의 문학은 독자를 인간의 가장 익숙한 표정 아래 감춰진 잔혹함의 기원으로 데려간다.
✏️도서출판 사계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