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기술
케빈 애슈턴 지음, 김하현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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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쓰인 소설 속 인물이 죽었을 때, 그를 애도하는 독자의 슬픔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그 인물의 이름과 생애, 그가 겪은 불행까지 모두 누군가의 상상에서 태어났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의 운명을 염려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안타까워하며, 마지막 문장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종이 위에 배열된 문자들이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삶에 체온을 부여하는 것이다. 허구라는 인식은 감정의 진실성을 훼손하지 못한다. 인간은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고, 경험하지 않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기억처럼 오래 간직한다. 허구의 인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지나간 역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는 사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구성하며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케빈 애슈턴의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그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추적한다. 저자는 최초의 모닥불에서 동굴 벽화와 문자, 인쇄술과 전기 통신을 거쳐 오늘날의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이 거듭 변모해 온 과정을 살핀다. 여기서 이야기는 문학작품이나 신화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행동에 이유를 부여하고, 지나간 사건을 시간의 순서로 배열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상하는 일까지 인간은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수행한다. 애슈턴은 언어가 이야기를 탄생시켰다는 익숙한 순서를 뒤집어, 이야기를 나누려는 필요가 언어의 발달을 이끌었다는 진화적 가설을 제시한다. 이야기는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시킨 기술인 동시에 그 기술을 발전시킨 인간의 사고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인간은 경험한 모든 순간을 동일한 무게로 기억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건 중 일부를 선택하고, 서로 떨어져 있던 장면들을 연결하며, 그 사이에 원인과 결과를 배치한다. 우연한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오래전의 실패는 현재의 선택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현재의 시선에 따라 재배열되며, 인간은 그렇게 구성된 기억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한다. 인지심리학자 제롬 브루너가 구분한 서사적 사고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 방식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논리적 사고가 일반적인 법칙과 검증 가능한 관계를 추구한다면, 서사적 사고는 사건에 개입한 사람의 의도와 행동, 그들이 처한 맥락을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 동일한 사건도 누구의 시선으로 서술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까닭이다.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조직한다. 이야기는 그 과정에서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고,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경험 사이에 의미의 통로를 만든다.

이러한 능력이 개인의 삶을 넘어 공동체의 역사로 확장될 때 이야기는 사회를 조직하는 힘을 얻는다. 모닥불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집단의 기억을 형성했고, 그림과 문자는 한 사람의 생애를 넘어 이야기가 전승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인쇄술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던 기록과 전파의 권한을 흔들었으며, 전기 통신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같은 사건을 접할 수 있게 했다. 중요한 것은 전달 속도와 규모의 변화가 인간관계와 권력의 배치까지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야기가 기록될 가치가 있는지, 누구의 목소리가 널리 전파되는지, 무엇이 공동체의 역사로 인정받는지는 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역시 무수한 사건 중 선택되고 보존된 이야기들의 집합이다. 기록되지 못한 삶은 쉽게 잊히고, 반복해서 전달된 이야기는 어느새 한 시대를 설명하는 보편적인 인식으로 굳어진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의 역사는 결국 누가 세계를 설명할 수 있었는가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에는 근본적인 취약성이 공존한다. 인간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찾고, 우연 속에서도 일관된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이 성향은 이해와 협력을 가능하게 하지만, 충분한 근거가 없는 설명에도 설득력을 부여한다. 심리학자 멜라니 그린과 티머시 브록은 2000년 학술지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발표한 연구 「The Role of Transportation in the Persuasiveness of Public Narratives」에서, 이야기에 깊이 몰입한 사람일수록 서사의 내용에 부합하는 믿음을 강하게 형성하고 이야기 속의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상대적으로 적게 발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사적 몰입은 상상 속 세계에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 세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감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야기의 일관성과 감정적 호소력은 때로 사실의 정확성보다 먼저 인간의 판단에 작용하며, 익숙한 믿음에 부합하는 서술일수록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커진다. 문학적 허구와 허위정보는 모두 이야기의 설득력을 활용하지만, 독자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설은 허구라는 약속 아래 상상력을 작동시키지만, 거짓 정보는 사실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허구의 인물을 향한 감정적 몰입과 현실에 관한 주장을 사실로 승인하는 판단에는 서로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감정적 설득력이 사실의 진실성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는 순간, 인간의 상상력은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이용될 수 있다.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의 등장은 이러한 문제를 이전과 다른 규모로 확대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이야기의 생산자이자 청중이 되었으며, 알고리즘은 어떤 이야기가 더 자주 노출되고 널리 퍼질지를 결정하는 데 깊이 관여한다. 발언의 기회가 확대된 만큼 주목받을 기회까지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자극적인 감정과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복잡한 사실보다 빠르게 확산되는 환경에서, 인간은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는 정보조차 보이지 않는 선별 과정을 거쳐 받아들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여기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이 실제 기록처럼 제시되고, 인간이 작성하지 않은 문장이 누군가의 진술처럼 유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인터넷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그 발전에 참여했던 저자는 기술의 기능적 성취를 넘어,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따르는 책임까지 성찰한다. 기술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그 기술이 초래할 결과를 이해하는 능력 사이에는 언제나 숙고가 필요한 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애슈턴은 이야기의 미래를 비관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타인의 삶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분명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기록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서로 다른 공동체의 경험이 연결되며, 기존의 권위가 독점하던 설명에 새로운 해석이 등장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야기의 힘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보다, 자신의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피는 지적 성실함일 것이다. 무엇을 사실로 받아들일지 판단하고, 익숙한 설명에도 다른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조차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은 이야기를 향한 애정과 충분히 공존한다. 오래된 소설 속 인물의 슬픔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는 마음과, 눈앞에 제시된 현실의 설명을 신중하게 검토하는 태도는 인간이 오랜 시간 길러온 상상력과 이성의 서로 다른 쓰임이다. 모닥불 곁에서 타인의 경험에 귀 기울이던 인간은 이제 손바닥 위에서 수없이 많은 세계를 마주한다.

✏️도서출판 생각의힘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인류는 모닥불의 불빛이 닿는 거리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수백만 개의 화면으로 옮겨놓았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 달라질 때마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범위도 함께 변화했다. 허구의 인물에게 실제의 슬픔을 느끼고, 낯선 삶을 자신의 경험처럼 상상해온 독서가라면 그 오래된 능력의 기원을 따라가는 여정이 각별할 것이다. 기억과 경험이 어떻게 하나의 의미로 조직되는지, 인간의 사고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는지 탐구하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풍부한 사유의 재료를 제공한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의 흔적이 스며 있다. 이야기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인간 정신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발명해온 형식들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이야기는 언제나 그것을 전달하는 기술과 권력의 조건 속에서 움직여왔다. 문자와 인쇄술, 방송과 스마트폰이 사회의 질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의 역사적 시야는 특히 매력적이다. 알고리즘이 선택한 정보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서술 사이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이야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시대에는 말할 자유만큼이나 듣고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야기의 전달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의미를 헤아리는 시간은 오히려 귀해진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다시 인간의 사고와 사회를 빚어온 긴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손바닥 위의 작은 화면이 얼마나 거대한 인류의 시간을 품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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