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세계
고혜원 지음 / 다이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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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 단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작은 바둑판 위에는 세계가 담겨 있다. 돌 하나를 어디에 놓을지 결정하는 순간마다 수많은 가능성이 갈리고, 한 번의 착점은 이후의 모든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바둑은 선택과 기다림,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이 축적된 삶의 축소판과도 같다.

고혜원의 《백의 세계》는 이러한 바둑의 본질을 궁궐이라는 정치적 공간과 결합한다.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궁궐은 또 하나의 거대한 바둑판이다. 왕권과 외교, 신분과 권력이 서로 다른 돌처럼 놓이고, 그 위에 선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계산 속에 배치된다. 별궁에 머무는 공주 연화 역시 그러한 판 위에 놓인 존재다. 공주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이 작품에서 바둑은 승리를 위한 기술이 아니라 존재를 지키기 위한 사유 방식으로 확장된다. 스승이 공주에게 가르치는 것은 정해진 수를 외우는 법이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상대의 의도를 읽으며, 제한된 조건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법이다. 바둑판 위에서 집을 만들고 활로를 찾는 과정은 곧 자신의 삶을 지키는 방식과 닮아 있다. “살아남으셔야죠. 바둑에서든, 궁궐 안에서든.”(52쪽)이라는 말은 이 작품이 말하는 생존의 의미를 압축한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버티는 일을 넘어,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궁궐이라는 공간은 인간을 쉽게 하나의 수로 환원한다. 『백의 세계』 속 권력은 사람을 마음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기보다 목적을 위한 대상으로 다룬다. 왕실의 관계와 정치적 질서는 끊임없이 계산되고, 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일수록 더욱 쉽게 희생된다. 작품 속 바둑판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인의 계산 속에 놓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다. 동시에 그 판 위에서 자신의 수를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함께 드러낸다.

이 소설이 깊어지는 지점은 승리의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 데 있다. 바둑에서 승리는 상대보다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에서의 승리는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백의 세계』는 가장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언제나 올바른 승리는 아니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가 아니라, 그 선택이 자신의 삶을 향하고 있는가에 있다. 타인이 정한 승리의 기준을 따라가는 삶과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또한 이 작품은 철저한 계산의 세계인 바둑 안에서 계산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을 보여준다. “이 세상엔 흑돌과 백돌로는 계산 안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라는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선이다. 사람 사이의 믿음과 연대,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 바둑판 위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수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만, 인간의 삶에서는 때때로 비효율적인 선택이 가장 깊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작품 속 인물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마음은 모두 계산 너머에 존재하는 가치들이다.

결국 『백의 세계』는 한 사람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바둑이라는 언어로 풀어낸 작품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둑판 위에서 살아간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조건과 위치가 있고, 때로는 원하지 않는 판 위에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돌을 놓을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갈 것인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흑과 백 사이에 놓이는 하나의 돌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듯, 인간 역시 수많은 선택을 쌓아 삶을 완성해간다.

삶은 언제나 완성된 바둑판 위에서 시작되지만, 그 위에 어떤 돌을 놓을지는 누구도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 『백의 세계』는 정해진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넘어,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권력과 신분이 뒤엉킨 궁궐이라는 거대한 판 위에서 바둑은 단순한 승부가 아닌 삶을 읽는 방식이 되고, 한 수 한 수를 고민하는 과정은 결국 자신을 지키는 태도로 이어진다. 한 번의 선택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을 좋아하는 독자, 역사 속 권력과 인간의 내면을 함께 바라보는 소설을 찾는 독자, 그리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다시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인물의 이야기에 끌리는 독자라면 이 작품의 깊은 결을 오래 따라가게 될 것이다. 흑과 백으로 나뉜 바둑판 위에서도 인간의 마음만큼은 계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결국 자신의 삶이라는 판 위에서 어떤 수를 둘 것인지 조용히 돌아보게 한다.

✏️도서출판 빅피시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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