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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을 벤 물결 - 카르마, 고통의 대물림을 멈추다
유영식 지음 / 미다스북스 / 2026년 6월
평점 :
사람은 과거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과거를 해석하며 살아간다. 같은 사건도 누군가에게는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경험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상처가 된다. 사건은 한순간에 지나가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이후의 선택을 바꾸고 관계를 바꾸며 삶의 방향까지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는 저마다의 궤적이 생긴다. 『칼날을 벤 물결』은 그 해석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따라간다. 삶을 뒤흔드는 것은 비극 그 자체보다, 비극이 한 사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가에 있다.
소설은 가족 안에서 대물림된 상실과 원망을 겪으며 살아온 도윤의 시간을 따라간다. 이어지는 죽음과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그의 삶을 오래 붙든다. 소설 속에서 고통은 단절된 사건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상처는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를 따라 이동하고, 이해받지 못한 감정은 또 다른 침묵을 낳는다. 삶은 과거의 사건보다 과거를 품는 방식에 더 오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작품이 끝까지 보여주는 것은 사건의 비극성이 아니다. 상처는 왜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 건너가는가. 그리고 그 흐름은 어디에서 멈출 수 있는가. 이야기는 이 질문을 놓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흔히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본래 업은 반복된 마음과 행위가 만들어 내는 결과다. 삶을 움직이는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오랫동안 몸에 밴 반응과 선택이다. 그렇기에 업은 숙명이면서도 동시에 변화의 가능성을 품는다. 같은 마음을 반복하면 같은 삶이 이어지고, 다른 마음을 선택하면 삶의 방향 또한 달라진다. 작품 속 도윤이 수행을 이어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통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이 더 이상 다음 사람의 삶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니체의 영원회귀 역시 반복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철학은 아니다. 지금의 삶을 다시 살아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 사유다. 『칼날을 벤 물결』은 그 물음을 삶의 자리로 끌어온다. 다시 살아도 괜찮은 삶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 답은 일상의 태도에 가까이 놓여 있다. 익숙한 원망을 내려놓는 일, 상처를 또 다른 상처로 돌려주지 않는 일, 자신의 삶을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살아 보려는 선택. 반복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만들어진다.
작품의 제목은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의 해석을 얻는다. “칼날로는 베어낼 수 없던 것들이, 물결에 닿으며 서서히 깎여 나갔다.”(189쪽) 칼날은 단번에 해결하고 싶은 인간의 조급함을 닮아 있다. 반면 물결은 같은 자리를 끊임없이 지나며 모양을 바꾼다. 사람의 상처도 다르지 않다. 한순간의 결심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고 자신을 돌아보며 삶의 방식을 조금씩 바꾸는 과정 속에서 다른 형태를 갖게 된다. 작가는 변화를 칼날이 아닌 물결에 맡긴다. 그 선택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은유가 된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를 어떤 모습으로 이어 갈지는 선택할 수 있다. 삶은 한 번의 결심으로 달라질 수 없다. 같은 방향을 오래 선택하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이 된다. 작은 선택들이 쌓이며 얻어지는 방향성. 『칼날을 벤 물결』은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말하는 소설이 아니다. 고통이 더 이상 삶의 유일한 언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한 사람의 선택은 한 사람의 삶에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물려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상처를 멈추게 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 작품이 오래 붙드는 것은 바로 그 가능성이다.
사람의 삶에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반복이 있다. 벗어났다고 믿었던 감정이 다시 찾아오고, 오래 지나간 일인데도 같은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는 순간들이다. 『칼날을 벤 물결』은 그 반복을 운명이라는 말로 덮어두지 않는다. 반복되는 삶에 지쳤다고 느끼는 사람, 가족 안에서 이어져 온 상처와 관계를 오래 돌아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은 익숙했던 시간을 다른 각도에서 읽게 한다. 또한 니체의 영원회귀나 불교의 업처럼 삶을 해석하는 철학에 관심 있는 독자, 상실을 자극적으로 소비하기보다 천천히 사유하는 문학을 찾는 독자에게도 권하고 싶다. 사람은 과거를 선택하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를 이어 가는 방식은 스스로 만들어 간다. 이 소설은 그 사실을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증명해 보인다.
✏️도서출판 미다스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