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번역 - 마감에 쫓기고 문장에 울지만 ㅣ 난생처음 시리즈 10
이소담 지음 / 티라미수 더북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자신이 오래 머문 곳을 닮아 간다. 오래 바라본 풍경은 시선이 되고, 오래 품은 문장은 사고방식이 되며, 오래 사랑한 대상은 마침내 한 사람의 삶을 빚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묻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오래 좋아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애정은 순간의 감정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충분한 시간을 견딘 애정은 삶의 방향이 된다. 『난생처음 번역』은 번역가라는 직업을 이야기하는 에세이인 동시에, 오래 좋아한 마음이 한 사람을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소담 작가는 처음부터 번역을 직업으로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문화를 좋아했고, 이야기를 좋아했고, 그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덕질은 공부가 되었고, 공부는 반복이 되었으며, 반복은 어느새 생업으로 이어졌다. 특별한 계기보다 오래 지속된 애정이 한 사람의 이력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인상 깊다. 세상은 결과를 보며 재능을 말하지만, 삶은 대부분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시간 위에서 천천히 형태를 갖춘다. 재능은 가능성을 열어 주지만, 애정은 그 가능성을 끝까지 살아남게 한다. 좋아한다는 것은 시간을 기꺼이 내어 주는 일이다. 그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 머문 자리만큼 사람을 닮게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반복하는 행위가 결국 그 사람의 성품을 만든다고 보았다. 덕은 한 번의 선택이 아닌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소담 작가의 여정은 이 오래된 통찰을 고스란히 닮아 있다. 그에게 번역이란 하루아침에 얻은 초능력이 아니라 수없이 읽고, 찾아보고, 고쳐 쓰기를 반복한 시간이 만든 결과였다. 전문성은 오랫동안 한 세계 곁을 떠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반복은 단순히 능숙함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희미해질 것 같지만, 어떤 애정은 오히려 반복 속에서 더 단단해진다. 반복은 기술을 만들고, 기술은 한 사람만의 기준을 만든다. 그렇게 오랜 시간 다듬어진 기준은 결국 그 사람의 세계가 된다.

번역이라는 작업은 흥미롭다. 좋은 문장은 가장 많은 가능성을 품은 문장이 아니라, 가장 많은 가능성을 기꺼이 포기한 문장이다. 번역은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단 하나를 남기는 작업이다. 더하는 기술보다 덜어 내는 감각을 요구하는 것. 이 표현도 가능하고, 저 표현도 가능하지만, 그 가운데 단 하나만을 남겨야 한다. 좋은 번역은 더 많은 말을 아는 사람보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만든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도 비슷하다. 삶 역시 선택보다 포기의 총합에 의해 모양을 갖춘다. 모든 가능성을 붙잡은 채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길을 놓아주어야 하고, 어떤 가치에 마음을 주는 순간 다른 욕심은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결국 한 사람의 삶도 수많은 가능성을 덜어 낸 끝에 완성되는 하나의 문장이다.

번역가라는 직업에는 묘한 역설이 있다. 번역가는 자신의 문장을 뽐내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감춘 채 원작의 목소리가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좋은 번역일수록 번역가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보다 다른 이의 문장이 온전히 살아 숨 쉬도록 자리를 내어 주는 까닭이다. 세상은 자신을 드러내는 능력을 성공의 조건처럼 이야기하지만, 이 책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자신의 목소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 빛을 독차지하기보다 빛이 지나갈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깊은 품격.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 사람에게서만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난생처음 번역』은 번역에 관한 책을 넘어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책으로 기억된다. 누군가는 취미라고 불렀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일이 되었고, 가볍게 시작한 애정은 결국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 이소담 작가의 작업은 살아가며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보다 무엇을 오래 사랑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묻게 한다. 삶은 쉽게 놓지 못한 마음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오래 사랑한 세계는 결국 그 사람의 언어가, 태도가, 삶의 모양이 된다. 인간은 자신이 오래 사랑한 것들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러니 자신이 오래 사랑해 온 것들을 떠올려 보라. 그것은 어느새 당신을 이루는 한 편의 문장이 되어 있다.

좋아하는 마음은 좀처럼 소리 내어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자리에 오래 머물며 사람을 조금씩 바꾸고, 어느 날 문득 삶의 방향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무엇보다 오래 사랑할 대상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건네고 싶다. 어떤 애정은 결과보다 먼저 한 사람을 성장시킨다. 그 시간은 눈에 띄지 않아도 결코 헛되이 흘러가지 않는다. 취미와 일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줄 알았던 사람, 좋아하는 마음이 과연 삶을 지탱할 수 있을지 망설여 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오래된 확신 하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번역이나 글쓰기처럼 결과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더 많이 쌓아 올리는 일을 하는 사람, 재능보다 꾸준함을 더 믿어 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권한다. 오래 품은 애정은 언젠가 재능을 앞질러 한 사람만의 언어가 된다. 『난생처음 번역』은 그 조용한 시간을 끝까지 믿어 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도서출판 티라미수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