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존재의 대연쇄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6년 6월
평점 :
현재가 스스로를 낯설게 바라보는 방식은 때로 미래라는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단요의 『존재의 대연쇄』는 바로 그 낯섦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소설집이다. 로마 황제와 연결되는 오래된 유선전화기, 온도를 읽는 사람들, 전류를 따라 이어지는 의식, 성경을 하나의 프로그래밍 언어처럼 다루는 세계. 여섯 편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상상력을 품고 흩어져 있지만, 그 끝마다 닿아 있는 곳은 하나다. 어떤 존재도 홀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진실이다.
소설집의 제목인 ‘존재의 대연쇄(Great Chain of Being)’는 중세 형이상학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신과 천사, 인간과 동물, 식물과 광물까지 우주의 모든 존재가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어져 있다는 오래된 세계관. 단요는 이 오래된 사유를 현대의 언어로 다시 번역한다. 그 연쇄에는 신과 인간만이 아니라 데이터와 전류, 코드와 신화, 역사와 기술까지 함께 놓인다. 그 순간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서 내려와 수많은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된다. 특별함을 잃어서가 아니다. 인간 역시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서로를 통과하며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얻는다. 오래된 철학은 미래를 배경으로 삼아 새롭게 호흡하기 시작하고,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위계에서 연결로 옮겨간다.
그렇기에 이 소설집이 이야기하는 존재는 홀로 완성되는 실체가 아니다. 다른 존재를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과정이다. 하나의 생명은 기술과 맞닿으며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고, 오래전 신화는 현재의 시간과 겹쳐지며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인간인지를 가려내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떠한 관계를 맺는 순간 이전에는 없던 세계가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세계는 처음부터 하나의 모습으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각으로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연결하느냐에 따라 다른 질서를 드러낸다. 인간이라는 이름 또한 그 관계망 밖에서 정의될 수 없다.
이 책을 읽는 경험 역시 이러한 구조를 닮아 있다. 초반에는 로마사와 종교, 컴퓨터공학과 과학기술이 한꺼번에 등장하며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각각의 설정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걸음을 늦추게 되지만,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의 구조를 이루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독서의 감각도 달라진다. 이야기 하나를 이해하는 기쁨보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되는 감각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단요의 서사는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여러 갈래의 길을 천천히 돌아가며 독자의 시야를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이끈다. 이해는 읽는 과정에서 조금씩 자라난다.
이러한 독서 경험은 자연스레 해석하는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작품은 현실과 상상, 과학과 신화 사이에 넓은 여백을 남겨 둔다. 그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독자가 자신의 사유를 채워 넣을 자리이며, 서로 다른 독서가 서로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다. 그 흐름을 따라가는 동안 독자는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구조를 함께 완성하는 사람이 된다. 서사를 따라가는 일은 하나의 철학을 체험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존재의 대연쇄』가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어느 하나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과 인간, 생명과 기계, 현실과 상상은 서로를 밀어 올리고 스며들며 하나의 거대한 연쇄를 이룬다. 그 안에서 인간 역시 독립된 실체가 아닌 수많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쓰여 가는 존재가 된다. 단요는 오래된 형이상학을 미래의 상상력으로 치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어 온 존재의 정의를 다시 움직인다. 세계를 이루는 것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닌 서로를 이어 주는 관계이며, 인간 역시 그 연결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얻는다. 오래된 철학이 오늘의 SF와 만나는 순간, 존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이전과는 다른 높이에 닿는다. 그곳에서 바라본 세계는 조금 더 넓어지고, 인간이라는 이름은 이전보다 훨씬 깊고 풍성한 의미를 품게 된다.
세상은 때때로 설명보다 상상으로 더 깊이 이해된다. 『존재의 대연쇄』는 그 낯선 상상 속에서 오래된 철학을 다시 숨 쉬게 만드는 소설집이다. SF를 단순히 미래를 그리는 장르가 아닌 존재를 사유하는 문학으로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인간과 기술, 현실과 신화가 서로를 비추는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하나의 세계를 읽는다는 일이 곧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새롭게 배우는 일이라 믿는 독자라면 더욱 반가운 만남이 될 것이다. 조금 느리더라도 하나의 세계를 스스로 조립해 가는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흩어진 이야기들이 하나의 질서로 이어지는 순간의 전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이 남겨 둔 여백 위에 자신의 해석을 덧입히는 독자라면, 이 소설집은 한 권의 이야기를 넘어 끝없이 확장되는 사유의 공간으로 오래 함께할 것이다. 좋은 SF는 미래를 보여주는 문학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새롭게 만드는 문학이다. 이 책이, 그리고 단요가 그렇다.
✏️도서출판 사계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