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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1
솔베이 발레 지음, 손화수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6월
평점 :
시간은 가장 익숙한 것이면서도 가장 늦게 의심하게 된다. 내일이 오늘의 뒤를 잇고, 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시간은 삶의 가장 단단한 질서이니까.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1』은 그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신, 단 한 사람만 그 밖으로 밀어낸다. 세상은 여전히 11월 18일을 살아가지만, 타라 셀테르의 기억만은 하루씩 앞으로 나아간다. 시간은 멈췄지만 기억은 멈추지 않는다. 작품이 끝없이 바라보는 것은 바로 그 낯선 비대칭이다.
이 작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시간이 아닌 기억이다. 타라는 같은 하루를 수백 번 살아간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같은 사람과 같은 대화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녀 안에는 반복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기억이다. 하루는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지만, 기억은 단 한 번도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삶은 흘러간 시간보다, 잊히지 않고 쌓여온 경험의 두께에 의해 조금씩 다른 모양을 갖게 된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같은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타라는 반복되는 11월 18일에 남편 토마스를 다시 만난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의 손을 잡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타라는 수백 일을 살아낸 사람이고, 토마스는 언제나 첫날을 살아가는 사람인 까닭이다. 둘 사이에는 함께 쌓아 올린 기억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거대한 간극으로 놓인다. 함께한 시간이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함께 기억하는 시간이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나눈 대화가 한 사람에게만 남아 있다면, 그 대화는 정말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이 소설은 그 믿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직접 겪지 않은 경험은 온전히 건너갈 수 없다. 토마스는 타라를 믿는다.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가 살아낸 시간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믿음과 이해는 같은 자리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타인의 시간을 대신 살아낼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타인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며, 가장 가까운 관계일수록 그 거리는 더욱 선명해진다.
작품은 되풀이되는 하루를 지루함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되는 하루는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세계를 끝없이 바라보게 만든다. 같은 비가 내리고, 같은 새가 울고, 같은 빵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평범하다고 여겼던 풍경은 수백 번 같은 하루를 지나며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익숙함은 많은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 되풀이 속에서 익숙함은 걷혀가고,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준다.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낯선 사건은 시간이 멈춘 일이 아니다. 함께한 시간이 한 사람에게만 남는다는 사실이다. 타라는 같은 하루를 살아가지만 결코 같은 사람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기억이 그녀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녀를 성장시키는 동시에, 누구와도 온전히 나눌 수 없는 시간이 되어간다. 인간은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라기보다, 자신 안에 축적된 기억의 밀도만큼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라는 제목은 어쩌면 그렇게 저마다 다른 두께로 쌓여가는 삶의 부피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도서출판 은행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