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인보우 초콜릿 도넛 ㅣ 그늘 단편선 5
백수연 지음 / 그늘 / 2026년 5월
평점 :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을 많이 살아낸다는 뜻처럼 들린다. 그래서 어린 시절은 늘 지나온 계절처럼 취급된다. 뒤돌아서면 보이는 풍경일 뿐, 지금의 삶과는 분리된 시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을 통과하는 존재인 동시에 시간에 의해 빚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오래전의 기쁨과 상처, 사랑받았던 순간과 외면받았던 순간은 과거라는 이름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성격이 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이 되고, 세상을 해석하는 시선이 되어 여전히 현재를 살아간다. 과거는 오늘의 나를 이루는 가장 오래된 재료가 된다.
소설집 속 인물들도 현재의 사건만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결혼을 앞둔 연인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여전히 사랑의 표정을 바꾸고, 오래된 친구를 떠올리는 마음에는 비교와 결핍이 깊숙이 스며 있다. 무너져 가는 부부의 관계 역시 눈앞의 배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누구도 과거를 손에 들고 다니지는 않지만, 이미 그 시간을 닮아 버린 채 살아간다. 현재의 감정은 갑작스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천천히 형태를 갖추어 온 결과인 셈이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은 지금 눈앞에 있는 모습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오랜 시간을 견디며 자라온 감정의 결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타인의 삶을 안다는 것은 그가 지나온 시간의 깊이를 함께 헤아리는 일이며, 한 사람의 현재는 언제나 수많은 어제들의 목소리를 품고 있다.
인간은 기억으로 형성되는 존재다. 그래서 같은 사건도 누구에게는 흉터가 되고, 누구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뿌리가 된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시간은 흔적을 지우기보다 의미를 축적한다. 살아온 날들이 켜켜이 쌓여 한 사람의 말투와 표정, 선택과 침묵을 만든다. 우리는 세월을 지나온 존재가 아닌, 살아낸 나날로 이루어진 존재다. 같은 기억도 삶의 어느 계절에서 다시 마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품지 않는가.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과거를 끊임없이 새롭게 이해하며 자신을 다시 써 내려간다. 현재의 나는 수많은 선택의 결과인 동시에 수많은 시간의 축적이다. 그 과정 속에서 과거는 더 이상 회상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가 된다. 결국 지금을 이해하려면 지나간 시간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저마다 다른 관계를 살아가는 소설집 속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지난날을 품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관계는 언제나 현재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감정의 흐름 위에 놓여 있다. 그래서 관계는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면서도,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도, 상처를 견디는 방식에도, 침묵을 선택하는 방식에도 살아온 시간이 스며 있다. 한 사람의 삶은 수많은 과거가 천천히 퇴적되어 만들어진 지층과도 같다. 그 지층은 어느 한순간 완성되지 않는다. 반복된 경험과 오래된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한 사람의 기질을 만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빚어낸다. 지나온 시간을 새롭게 이해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일이다.
어쩌면 사람은 과거를 두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과거가 된 채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삶은 지나온 시간을 떼어 내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의미로 품어낼 것인가를 배워 가는 과정이다. 어린 시절은 끝내 해석되지 못한 감정의 형태로 오래 남아 있다. 삶의 깊이는 상처의 유무가 아니라, 그 시간을 삶 속에 받아들이는 힘에서 비롯된다. 살아온 시간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외면하지 않는다. 과거는 우리를 붙잡기 위해 있지 않다. 오늘의 우리를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 백수연의 소설집은 인간이 결국 살아온 시간의 총합이며, 그 시간을 끌어안는 방식이 곧 한 사람의 삶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떤 맛은 혀끝보다 오래 기억된다. 어린 날의 레인보우 초콜릿 도넛 하나는 시간이 말로 남지 못한 감정을 대신 품고 있다. 어떤 사물은 기억을 간직하는 그릇이 되고, 어떤 기억은 한 사람의 삶을 오래 이끌어 간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지금의 삶에 어떤 모양으로 남아 있는지 돌아보고 싶은 사람, 반복되는 관계 속에서 비슷한 감정과 마주했던 사람이라면 이 소설집을 오래 곁에 두어도 좋겠다. 그리고 타인의 말과 행동보다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을 먼저 헤아려 보고 싶은 사람,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이 천천히 열리는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에게도 이 작품을 권하고 싶다. 백수연은 삶을 바꾸는 거대한 사건보다 오래도록 스며 있는 기억 하나가 사람을 얼마나 깊게 빚어 가는지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려 낸다.
✏️도서출판 그늘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