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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
이희영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6월
평점 :
품절
인간은 악의보다 선의를 더 쉽게 믿는다. 해를 끼치려는 의도는 경계하면서도, 사랑해서 내린 선택은 끝내 옳았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진심을 감추고, 누군가는 거리를 두며, 누군가는 침묵을 택한다. 상대를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어렵게 지켜낸 가족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모두가 조금씩 자신을 접어 넣는다. 선한 의도는 그렇게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그러나 삶은 의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선의는 때로 가장 늦게 터지는 폭탄이 되어,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비극을 남긴다.
작품에는 분명한 악인이 없다. 누구 하나 타인을 파괴하려고 사랑하지 않았고, 누구 하나 불행을 바라며 선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모든 선택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부모의 행복을 지키려는 마음, 가족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는 마음. 문제는 사랑이 아닌, 사랑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사랑은 본래 선과 악으로 재단할 수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한 사람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도 바꾸어 놓는다. 진심을 억누르는 일이 희생이라 믿었던 순간, 진실은 말할 곳을 잃고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형태를 바꾸기 시작한다. 감추어진 감정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 외면당한 진심은 더 깊은 침묵을 배우고, 이름 붙이지 못한 진실은 삶의 다른 얼굴이 되어 돌아온다.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은 채 출구를 잃는다. 길을 잃은 내면은 결국 가장 소중한 관계를 향해 되돌아온다.
『낙하』가 보여주는 추락은 사랑이 만들어 낸 비극이 아니다. 어쩌면 사랑을 보호하려던 선택들이 서로를 밀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다정했던 선택들이 가장 잔인한 결과를 만든다. 상처를 막으려던 침묵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기고, 관계를 지키려던 거짓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선의를 품었다는 사실만으로 선택의 무게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의도는 생각 속에서 완성되지만, 책임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아무리 선한 선택이라도 그 결과만큼은 혼자 품을 수 없다. 삶은 언제나 선택이 남긴 결과를 함께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을 떨어뜨리는 것은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사랑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방식이다. 낙하는 어느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다. 추락은 발을 헛디디는 순간보다 더 오래전에 시작된다. 매번 자신보다 타인을 앞세웠던 선택들이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질 때, 삶은 이미 아래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선의를 믿었던 선택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 낸 시간의 궤적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사랑보다 인간을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인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존재다. 하지만 그 희생이 언제나 타인을 살리는 것은 아니다. 관계는 사랑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향해 내린 선택들이 쌓이며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래서 한 사람의 침묵은 결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은 언제나 자신의 몫으로만 남지 않는다. 누군가를 위한 결심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또 다른 삶을 흔들기도 한다. 악은 특별한 괴물에게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평범한 선택 속에서도 악은 충분히 자라날 수 있다. 『낙하』는 그 말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비춘다. 비극 또한 악의가 아니라 평범한 선의 속에서 자랄 수 있다고. 선의를 의심하지 못하는 관계일수록 그 비극은 더욱 늦게 발견된다. 모두가 옳다고 믿었던 선택은 누구도 쉽게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누군가를 해치려는 마음보다, 옳다고 믿으며 끝까지 놓지 못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사람을 가장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감정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끝내 서로를 구하지 못한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지키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남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선의에도 책임이 있다는 씁쓸한 진실이다.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는 진실을 감당할 용기까지 사랑의 몫이 된다. 서로를 위해 흘린 침묵들이 결국 모두를 추락시켰다. 인간은 사랑 때문에 망가지지 않는다. 가장 선한 마음을 의심하지 못할 때, 비로소 가장 깊은 추락이 시작된다.
사랑은 언제나 누군가를 구원하는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때로는 서로를 지키려던 다정함이 가장 깊은 상처를 만들고, 선한 의도가 가장 오래 남는 슬픔을 낳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사랑의 결말보다 사랑을 지키는 방식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에게 깊게 스며들 것이다. 선의가 왜 비극이 되는지 오래 생각해 본 사람, 인간의 심리와 관계의 아이러니를 들여다보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도 권하고 싶다. 사랑을 한순간의 감정이 아닌 삶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읽고 싶다면, 이 작품이 품고 있는 고요한 추락을 오래 따라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 흔들리는 것은 악의를 품었던 순간보다, 옳다고 믿었던 선택들이 빚어낸 시간들이다. 우리는 낙하를 한순간의 사건으로 기억하지만, 삶은 언제나 천천히 기울어진다. 『낙하』는 그 기울어짐의 시간을 끝까지 응시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도서출판 밀리의서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