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메아리처럼
앤절라 미영 허 지음, 임슬애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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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설화들을 떠올려보자. 그곳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여성들이 자주 사라진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몸을 내어주고,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자신의 생을 바친 뒤에야 비로소 이야기 속에 남는다. 에밀레종의 아이도, 심청도, 바리공주도 그러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을 막연히 슬픈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삶의 형식처럼 느껴진다. 여성의 고통은 자주 사랑이나 효심, 숭고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고, 그렇게 아름답게 꾸며진 희생은 의심 없이 다음 세대로 건너간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자기 삶의 문장을 새롭게 고쳐 쓸 수 있을까. 그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을 아주 깊고도 처연한 목소리로 풀어낸 작품, 『우리, 메아리처럼』.

엘사는 설화의 세계에서 달아나기 위해 과학자가 된다. 설명할 수 없는 저주와 기이한 기억 대신, 수식과 논리로 이루어진 세계를 택한 것이다. 세상의 가장 끝, 얼음과 침묵만 남은 남극은 마치 인간이 자신의 기원을 지우기 위해 도망쳐 도착한 마지막 좌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과거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 없다. 아무리 먼 곳으로 향해도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들은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은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다시 숨을 쉰다. 기억은 어쩌면 현재의 삶을 끊임없이 해석하게 만드는 힘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과거를 떠났다고 믿으면서도 결국 그것이 남긴 언어와 감정의 구조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앤절라 미영 허는 신화와 과학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는다. 보통 신화는 낡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과학은 진보와 이성의 상징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둘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본다. 인간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 거대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신화는 상징과 이야기로, 과학은 관측과 계산으로 그것을 설명하려 했다. 결국 둘 모두 세계를 이해하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몸짓이었던 셈이다. 엘사가 연구하는 중성미자 또한 의미심장하다. 거의 모든 것을 통과하면서도 좀처럼 붙잡히지 않는 입자. 형태 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그 존재는 마치 디아스포라의 삶과도 닮아 있다.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자신의 뿌리와 언어를 품고 떠도는 사람들처럼.

오래된 신화 속 희생은 형태만 바뀐 채 지금의 삶 속에서도 반복된다. 누군가는 여전히 침묵을 배워야 하고, 누군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접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여성들은 오랫동안 ‘견디는 존재’로 길러져 왔다. 더 두려운 것은 그것이 억압으로만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복된 이야기는 어느 순간 삶의 윤리가 되고,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을 사랑이라 믿기 시작한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소모하는 일이 선함으로 여겨지고, 끝내 고통마저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 오래된 설화들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을 기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어떤 삶이 여성에게 어울리는가를 은밀히 학습시킨다. 그래서 작가는 설화 속 여성들에게 다시 목소리를 돌려준다. 타인의 서사 속 조연이 아닌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존재로 다시 세우는 일. 그것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오랫동안 빼앗겨 온 해석의 권리를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메아리처럼』은 운명을 거부하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운명을 이해하려는 이야기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보다 오래된 이야기들 속에서 태어난다. 가족의 기억, 시대의 상처, 오래된 가치관과 침묵들 속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완전히 새로운 삶을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반복을 그대로 물려주지 않고,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이어가는 일이다. 엘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쓰기 위해 되돌아간 것처럼. 메아리는 원래 누군가의 목소리를 반복하는 현상이지만, 이 소설은 그 반복 속에서도 아주 미세하게 달라지는 울림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완전히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는 없어도, 물려받은 슬픔의 음색을 조금씩 바꾸어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일. 그렇게 오래된 비극의 방향을 아주 천천히 바꾸어가는 일.

『우리, 메아리처럼』은 오래된 신화 속 여성들의 침묵이 왜 세대를 건너 오늘의 삶까지 이어지는지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건넨다. 특히 여성 서사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 가족과 혈통이 남긴 기억의 구조를 탐구해 보고 싶은 이들, 디아스포라와 정체성 문제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갈 작품이다. 또한 신화와 과학을 서로 다른 언어가 아닌, 인간 존재를 해석하려는 두 개의 사유 체계로 바라보는 독자라면 엘사에게 오래 시선을 머물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삶의 문장을 의심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메아리는 단순한 반향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먼 시간을 돌아온 목소리처럼 읽힐 것이다. 과거를 완전히 끊어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다만 우리에게 도착한 슬픔의 방향만큼은 조금씩 바꾸어볼 수 있지 않을까.

✏️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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