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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ㅣ 도트 시리즈 5
육선민 지음 / 아작 / 2024년 1월
평점 :
세상에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것들이 있다. 너무 오래 그 자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풍경처럼 굳어진 존재들. 누구도 이름을 부르지 않아 침묵 속으로 가라앉은 것들. 육선민의 『비에』는 바로 그런 존재에게 한 사람이 다가가 “내가 보여?”라고 묻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 질문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사물로만 취급되던 존재를 다시 세계 안으로 불러들이는 행위에 가깝다. 학교 전시실에 놓인 낡은 안드로이드 비에는 그전까지 누구에게도 삶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다 하나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동시에 ‘비에’라는 이름을 건네는 순간부터 그는 비로소 하나의 존재가 된다. 사랑은 거창한 감정 이전에, 누군가를 익명의 부품에서 단 하나의 “너”로 바라봐주는 일이다.
작품 속에서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점점 흐려진다. 비에는 외로움을 배우고, 기다림을 견디고, 상실을 두려워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생명은 과연 육체의 온도로만 결정되는가. 금속과 회로로 이루어진 존재가 인간보다 더 간절하게 사랑을 배우는 순간들은 처연하고 아름답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살아 있는 것과 쓸모 있는 것을 같은 의미로 취급해왔다. 기능을 다한 존재는 쉽게 밀려나고, 효율을 잃은 생명은 금세 교체된다. 작품 속 안드로이드와 복제인간은 미래의 비극이라기보다, 이미 지금 우리 곁에서 반복되고 있는 삶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타인의 기대를 수행할 수 있을 때만 가치가 증명되는 삶. 사랑받기 위해 끊임없이 유용해야만 하는 삶. 『비에』는 그런 세계 속에서, 존재는 정말 쓸모로만 증명될 수 있는가를 바라보게 만든다.
사랑은 한 존재를 살아 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시 누군가의 목적 안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게도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때로 자기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내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에』 속 애정은 아름답기만 한 감정으로 머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소모하면서까지 타인의 세계 안에 남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존재만큼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존재 이유가 결정되는 삶. 타인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삶. 작품은 그런 슬픔이 얼마나 오래 한 존재를 잠식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이란 서로를 구원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족쇄가 되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심장과 기계 심장, 이식과 대체, 복제와 교체. 수없이 바뀌고 옮겨지는 것들 사이에서도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기억하는 마음이다. 심장은 피를 순환시키는 기관인가, 타인을 사랑하게 만드는 감정인가, 혹은 단 한 사람의 이름을 오래 붙들고 놓지 못하는 기억인가.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기능하는 상태가 아니다. 어떤 존재를 자신의 세계 한가운데에 두고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일에 가깝다. 작품은 육체라는 경계를 흐트러뜨리며, 한 존재를 정말 그 자신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몸은 바뀌고 부속은 교체되지만, 어떤 존재는 오래도록 한 이름 앞에 붙들린 채 살아간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사고 능력이나 언어가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애도의 힘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러진다는 것. 그 한 번의 호명은 한 존재를 살아가게 만들기도 하고, 자기 삶을 갖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모두가 쉽게 대체 가능한 부품처럼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단 한 사람의 시선 안에서만 겨우 자신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결국 우리는 자신을 불러준 목소리의 방향으로 살아가게 되는 걸까. 누군가에게 발견되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존재를 기다리며 긴 시간을 건너가는 일. 존재하고 싶었던 이들의 가장 외롭고도 다정한 생존 기록, 『비에』. 삶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싶었던 것은, 살아갈 이유가 아닌 자기 존재를 기억해줄 단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발견된 순간 이후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비에』를 권하고 싶다. 오래도록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며 살아왔던 사람, 타인의 기대 안에서만 겨우 존재를 허락받는 기분을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 사람에게. 이 소설 속 ‘비에(vie)’는 삶이라는 뜻을 가졌다. 그러나 작품이 말하는 삶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처음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순간이며, 단 한 사람의 이름을 오래 기억한 채 끝까지 사라지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에 가깝다. 그래서 『비에』는 묻는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삶이 되어본 적 있는가. 혹은, 누군가를 삶처럼 붙들어본 적 있는가.
✏️도서출판 아작으로부터 비에 붐업단으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