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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공약 - 표와 피의 잔혹사
김주석 지음 / 9월의햇살 / 2026년 5월
평점 :
선거철이 되면 거리에는 늘 미래를 약속하는 문장들이 내걸린다. 더 안전한 도시,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내일. 사람들은 그 문장들 앞에서 잠시 희망을 믿는다. 김주석 작가는 그 희망의 언어 아래에 얼마나 많은 욕망이 숨어 있는지를 들춰낸다. 이 소설 속 공약들은 더 이상 공동체를 위한 약속이 아니다. 누군가의 지지율이 되고, 누군가의 생존이 되며, 누군가의 탐욕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 된다. 피를 흘리는 것은 결국 사람이지만, 그 피 냄새 뒤에는 언제나 “더 나은 미래”라는 말이 붙어 있다. 살인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언어의 위선을 다루는 소설. 가장 잔혹한 욕망은 대개 가장 정의로운 문장 속에 숨어 들어간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을 오래 견디기 위해, 그것에 언제나 명분을 덧씌운다. 그래서 정치의 언어는 때때로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진실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민주주의는 이상으로 유지되지만 현실은 종종 가장 원초적인 욕망 위에서 굴러간다. 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표한다고 말하지만, 그 안에는 늘 자신의 삶을 지키고 싶은 두려움과 이익을 잃지 않고 싶은 계산이 섞여 있다. 정의를 좇던 발걸음이 서서히 욕망의 편으로 기울어가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인간은 신념을 따라 살아간다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신념의 형태로 이해하며 살아간다. 더 두려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스스로를 악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잔혹해서 타락하기보다, 자신에게만은 예외가 허용된다고 믿는 순간 조금씩 무너진다. 정치가 위험한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거대한 이념은 언제나 개인의 욕망을 숨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숭고한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이 소설 속 선거는 축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미래를 이야기하는 민주주의의 장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욕망이 충돌하는 거대한 전쟁터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움직이고, 누군가는 부를 얻기 위해 움직이며, 누군가는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 상대를 파괴하려 한다. 표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공포와 탐욕, 분노와 생존 본능이 함께 들어 있다. 선거철마다 사회 전체가 예민해지고 서로를 향한 혐오가 짙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공존을 전제로 유지되지만, 선거의 순간마다 사람들은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제거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투표는 이상을 선택하는 행위라기보다, 때로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악을 고르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악’이라는 단어가 반복될수록 민주주의는 조금씩 냉소의 언어를 닮아간다. 모두가 더 나은 세계를 말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파멸을 늦출 수 있는 방향을 택하기 위해 투표소로 향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명분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리고 그 명분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더 나은 지역 발전, 시민의 삶, 정의로운 정치, 공정한 사회. 하지만 그 문장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결국 그 안에는 개인의 욕망과 두려움이 얽혀 있다. 노골적인 악은 쉽게 경계할 수 있지만, 선의를 닮은 욕망은 오래도록 사람을 속인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선한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하곤 한다. 그래서 혐오는 언제나 정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누군가는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타인을 밀어내고, 누군가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살인 공약』은 바로 그 순간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 사회는 늘 선과 악이 충돌하며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자신만의 선을 주장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잔혹해지곤 한다.
2026 지방 선거일인 오늘, 투표 현황 뉴스가 쉼 없이 울려퍼지고 있다. 더 나은 내일을 말하는 목소리들, 서로를 비난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덜 불안한 삶을 붙잡으려는 마음들. 민주주의란 완벽한 인간들이 세운 이상이 아니다. 서로 다른 욕망과 공포를 지닌 사람들이, 서로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합의해온 생존의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김주석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정치의 추악함이 아니다. 욕망과 공포, 생존과 신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의 얼굴이다. 선거는 미래를 선택하는 일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때로 투표소 앞에 선 인간은 미래보다 먼저, 자신의 불안을 처리할 방법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거철 뉴스만 틀어도 피로감이 밀려오는 사람, 서로를 향한 혐오와 확신이 점점 짙어지는 풍경 속에서 정치가 과연 인간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 궁금했던 사람이라면 『살인 공약』을 오래도록 찾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권력의 추악함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의와 신념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욕망의 얼굴,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한다고 믿으면서도 사실은 자신의 불안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는 인간의 본성을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그래서 현실 정치의 냉소와 피로를 문학적으로 마주하고 싶은 사람에게 특히 와닿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선거철이 돌아올 때마다, 거리마다 희망의 문장들이 내걸릴 때마다 이 책은 다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더 나은 세계를 말하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인간은 왜 매번 ‘최선’보다 ‘차악’을 고르며 살아가는지 문득 생각하게 되는 순간마다.
✏️도서출판 9월의햇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