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곡미풍 -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위화 지음, 백도라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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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묘한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가난과 상실이 얼마나 오래 사람을 잠식하는지를 누구보다 냉정하게 바라보는 작가인데도, 그의 문장 곁에는 이상할 만큼 잔잔한 숨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비참함을 충분히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에 가깝다. 고통을 모르는 낙관은 대개 공허한 수사로 끝나지만, 위화의 문장은 인간 존재의 허기를 끝까지 바라본 뒤에도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은 감동보다 더 느린 방식으로 인간 내부에 침잠한다. 『산곡미풍』 역시 그런 책이었다. 골짜기를 스쳐 지나는 바람처럼 조용한데도, 어느 순간 굳어 있던 마음 한켠이 조금씩 풀려버리는 책.

이번 산문집에는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위화가 지나온 반평생의 시간이 담겨 있다. 어린 시절의 풍경과 가족의 기억, 글쓰기를 시작하던 젊은 날의 순간들, 세월을 건너며 달라진 감각들이 흘러간다. 그러나 이 책은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가난했던 시절은 낭만으로 변하지 않고, 외로웠던 시간은 비극적인 언어로 과장되지 않는다. 위화는 지나온 삶을 담담히 바라볼 뿐이다. 우리는 흔히 고통을 견뎌낸 끝에 더 단단해졌다는 이야기로 상처를 정리하려 한다. 그러나 위화는 삶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가는 일, 그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다정함은 누군가의 아픔을 빠르게 지워주는 방식이 아니라, 그 아픔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인간의 기억 깊은 곳을 흔든다. 위화에게 산곡의 미풍은 오래 잠들어 있던 시간을 깨우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인간이 무엇으로 삶을 견뎌내는지를 드러낸다.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거대한 신념이나 대단한 결심이 아니다. 어린 시절 골목에 남아 있던 냄새 하나, 오래전 들었던 목소리, 무심히 스쳐 지나간 계절의 감각 같은 것들. 인간의 기억은 논리보다 감각을 통해 저장되고, 삶은 바로 그런 희미한 감각들에 의해 지탱된다. 책을 읽는 동안 문득 바람이 불어오면 잠시 손을 멈추게 되었다. 이유 없이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공기의 결을 가만히 느끼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할 수 있는 상태. 위화는 그 연약하고도 섬세한 감각을 문장으로 복원해낸다.

위화가 오랫동안 인간의 비참함을 써온 작가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은 때로 잔인하고, 삶은 자주 불공평하며, 시간은 무심하게 많은 것을 앗아간다. 그런데도 그의 문장에는 사람에 대한 혐오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오래 고통을 통과해온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은 연민이 자리한다. 타인의 상처를 쉽게 판단하지 않는 시선, 삶의 실패를 함부로 단죄하지 않는 태도. 그것은 인간을 낙관해서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쉽게 해석하거나 소비하지 않으려는 윤리에 가깝다. 고통 앞에서 함부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예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산곡미풍』의 문장들은 화려한 위로처럼 즉각적인 위안을 주지 않는다. 대신 아주 느린 속도로 독자의 내면에 스며들어, 오래 침잠해 있던 감정들을 조금씩 흔들어놓는다.

살다 보면 인간은 자꾸 단단해져야 한다고 배운다. 무너지지 않는 방법,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위화의 산문은 그 반대편을 바라본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견고함보다도, 오래된 슬픔 앞에서 여전히 흔들릴 수 있는 감각이다. 바람 한 줄기에 지난 시절이 떠오르고, 오래전 기억 하나에 마음이 젖어드는 연약함 같은 것들. 그리고 문학은 그런 감각을 잃지 않게 붙들어주는 역할이 된다. 무뎌진 감각을 다시 깨우고, 사라진 줄 알았던 시간을 현재로 불러오는 일. 인간은 결국 자신이 기억하는 것으로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한한 생물이기에,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잃는 일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일부가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산곡미풍』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독자 곁에 머물며, 인간 안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어떤 감각들을 흔들어 깨운다.

세상은 자꾸만 인간에게 단단해지는 법을 요구한다. 상처를 오래 붙들고 있지 말 것, 지나간 시간을 빠르게 정리할 것, 슬픔마저 효율적으로 극복할 것. 그러나 『산곡미풍』은 그런 시대의 속도에서 조금 비켜선 채, 골짜기 사이를 천천히 흘러가는 바람처럼 인간 내부에 남아 있는 오래된 감각들을 흔들어 깨운다. 그래서 이 책은 삶을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견뎌내느라 자기 안의 감각을 오래 방치해온 사람들에게 특히 깊게 닿을 것이다. 오래전 기억에 아직도 마음이 붙들리는 사람, 인간 존재를 이루는 것이 결국 이성과 논리만은 아니라고 믿는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위화는 기억과 슬픔을 감상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무엇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지를 조용하고 집요하게 바라본다.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더 강해지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슬픔과 기억을 끝내 삭제하지 않는 일에 더 가깝다. 이 책은 바람이 지나간 자리처럼 인간 내부의 감각들을 천천히 환기시킨다.

✏️도서출판 푸른숲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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