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시절
양솽쯔 지음, 문현선 옮김 / 마티스블루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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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라는 시간을 떠올리면 한국인에게는 대개 선명한 방향의 감정이 먼저 떠오른다. 빼앗긴 역사와 언어, 강제로 지워진 이름들. 그래서 양솽쯔의 『꽃 피는 시절』을 펼쳤을 때에도 어쩌면 비슷한 정서를 예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이 보여주는 타이완의 풍경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흐릿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일본 제국을 단순히 증오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그리워하지도 못한다. 식민의 기억 위에 또 다른 폭력이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통치가 끝난 뒤 이어진 국민당 정권의 학살과 계엄은 타이완 사람들에게 또 다른 침묵을 강요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 속 시간은 끝난 과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직 해석되지 못한 채 현재 안에 가라앉아 있는 감정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타임슬립은 흔한 회귀 판타지와는 결이 다르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체험하는 일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에 가깝다. 식민지의 언어를 배우고, 낯선 이름으로 불리며, 시대가 정해놓은 역할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쉐쯔는 점점 깨닫게 된다. 인간은 시대를 완전히 벗어난 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지만, 무엇을 잃지 않을 것인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는 인간의 언어를 바꾸고, 식탁을 바꾸고, 사랑하는 방식을 바꾸며 존재의 형태까지 흔들어놓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감각이다. 시대는 인간의 삶을 규정할 수는 있어도,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감각까지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한다.

낯선 타이완 음식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름들을 읽는 것만으로 낯선 향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인간에게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기 위한 물질이 아닌 듯하다. 어떤 국물의 냄새는 어린 시절의 풍경을 불러오고, 한 입의 맛은 이미 사라진 사람을 다시 식탁 앞으로 데려온다. 식민지 시대처럼 모든 것이 흔들리던 순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밥을 짓고, 누군가를 위해 국을 끓이고, 계절의 맛을 기억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언어보다 먼저 맛으로 세계를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작품 속 음식들은 단순한 생활 묘사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으려는 삶의 흔적과도 같다. 역사가 한 나라의 이름을 바꾸려 할 때조차, 사람들은 혀끝에 남은 기억으로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거대한 이념보다도 반복되는 일상의 감각 속에서 더 오래 살아남는다. 이들은 혁명을 일으키지도, 시대를 뒤집지도 않는다. 대신 함께 밥을 먹고, 이름을 불러주고, 누군가의 슬픔을 조용히 받아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작고 사소한 행위들이야말로 무너지는 시대를 버티게 만드는 힘처럼 느껴진다. 역사책은 흔히 전쟁과 권력, 영웅의 이름을 기록하지만, 인간의 삶을 실제로 지탱해온 것은 어쩌면 이런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꽃은 가장 찬란한 순간에만 피어 있는 것이 아니다. 비를 견디고, 계절을 통과하고, 다시 피어나기까지의 모든 시간을 포함해 비로소 꽃이라 불린다. 이 소설의 여성들 역시 그렇다.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거창한 저항이 아니라, 끝까지 서로를 놓지 않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단순히 젊고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어쩌면 피고 지는 과정을 견뎌낸 시간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양솽쯔는 이 작품을 통해 타이완의 과거를 복원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을 현재로 끌고 온다. 인간은 폭력의 시대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사랑과 상처가 동시에 남아 있는 과거를 어떤 언어로 껴안을 수 있는가. 어쩌면 인간은 과거를 극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기억조차 삶의 일부로 품어안으며 앞으로 걸어가는 것. 완전히 봉합되지 않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은 채 인간 내부에 남아, 이후의 삶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어떤 시간을 지나 지금의 자신으로 피어나게 되었는가.

이 책은 과거를 명확히 정리해주는 소설이라기보다, 정리되지 못한 감정의 내부를 오래 헤매게 만드는 소설에 가깝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낯선 타이완의 역사 이야기로 읽히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이미 오래전 자신의 안에 침전되어 있던 상실과 그리움을 건드리는 기록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인간은 살아가며 수많은 시간을 지나치지만, 어떤 시대는 사라지지 않은 채 이후의 삶 전체를 흔들어놓는다. 『꽃 피는 시절』은 바로 그런 기억의 잔향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꽃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나기까지의 시간을 모두 견뎌낸 끝에 비로소 한 송이의 꽃이 된다. 지금 자신의 삶 또한 어떤 계절을 지나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돌아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오래 마음에 남을 것이다.

✏️도서출판 마티스블루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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