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 걸
하비에르 카스티요 지음, 박설영 옮김 / 반타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은 그저 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인파 속에서 손을 놓치는 순간, 그 짧은 틈. 그러나 <스노우 걸>은 그 찰나를 사건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후에 길게 이어지는 시간을 응시한다. 사라진 것은 아이 한 명이지만, 정작 멈춰버린 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이다. 삶은 계속 흘러가야 하는데, 마음은 한 지점에 고정된 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하비에르 카스티요는 우리에게 ’이후의 시간‘이라는 가장 잔인한 풍경을 펼쳐 보인다. 그 시간은 흐르지 않는 강처럼, 겉으로는 잔잔하지만 안쪽에서는 모든 것을 조금씩 침식시킨다. 하루하루가 쌓일수록 상실은 옅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사라진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 자리를 계속해서 바라보게 된다는 사실이 사람을 붙잡는다.

기다림은 처음엔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미한 가능성. 그러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다림은 방향을 잃는다.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흐릿해진 채 그저 버티는 행위로 변해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감정은 형태를 바꾼다. 희망은 불안으로, 불안은 공포로. 기다림이란 결국, 끝이 보이지 않을 때 가장 깊은 어둠으로 가라앉는 감정이다. 이때의 기다림은 더 이상 미래를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를 붙잡은 채 현재를 잠식한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사는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순간을 끝없이 되돌려보는 일. 그래서 기다림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그 무게는 말없이 사람을 짓누른다.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상태 앞에서 사람은 오래 서성인다.

그 어둠 속으로, 뒤늦게 도착한 하나의 증거가 던져진다. 살아 있다는 가능성,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신호라기보다는, 오히려 끝나지 않는 고통을 다시 불러오는 계기가 된다. 이미 잃어버렸다고 받아들이려 했던 시간을 다시 끌어올리는 순간, 멈췄던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붙잡을 수 있을 듯 보이지만 끝내 닿지 않는 거리 앞에서 사람은 더 깊이 가라앉는다. 이 소설이 그리는 희망은 따뜻하지 않다. 그것은 차갑고, 날카롭고, 오래도록 사람을 붙잡아 둔다. 테이프가 가져다준 가능성은 출구가 아니라 빠져나올 수 없는 원, 하나의 궤도를 만든다. 벗어나려 할수록,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보이지 않는 반복. 그래서 사람은 안도하지 못한 채, 끝내 닿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 오래 머문다. 그 머무름은 멈춰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계속해서 흔들리는 시간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일지라도, 한 번 어긋난 감각은 이전의 형태로 쉬이 돌아가지 않는다. 되찾았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그 사이를 지나온 시간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떤 것들은 다시 손에 쥐어지지만, 그 감촉은 이미 달라져 있다. 그래서 회복이라는 말은 언제나 조금 부족하게 들린다. 되돌아온다는 것은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변해버린 상태를 끌어안은 채 현재를 이어가는 일이다. 지워지지 않은 시간은 삶의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이후의 모든 순간에 은근하게 스며들기 마련이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다만 다른 형태로 머무른다. 그리고 사람은 그 결을 따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숨 쉬고, 바라보고, 살아간다.

기다림이 공포로 변해가는 동안, 끝내 도착한 진실은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계속해서 기다리고, 끝내 알고자 한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모순이자 동시에 버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스노우 걸>은 사건의 결말보다,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고 또 서 있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무너진 이후에도 멈추지 않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위에서 다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존재. 고통은 사라지지 않지만, 인간은 그 고통을 품은 채 다음 순간으로 건너간다.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한 걸음을 내딛는다. 아마도 인간은, 무너지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방식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다림은 끝을 향해 흐르지 않는다. 그저 제자리를 맴돌며, 사람을 조금씩 바꾸어 놓을 뿐이다. 그 시간 속에서 희망은 모양을 바꾸고, 확신은 흔들리며, 결국 남는 것은 끝내 닿을 수 없었던 순간들에 대한 감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계속해서 기다리고, 끝내 알고자 한다.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 이 이야기는 그런 시간을 지나온 사람에게 추천한다. 오래도록 무언가를 기다려본 적 있는 이들, 확실하지 않은 가능성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본 적 있는 이들, 상처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견뎌낸 이들에게. 그리고 사건의 끝이 아니라, 그 안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에게. 당신이 지나온 시간과 이 이야기가, 조용히 맞닿아 오래 남기를 바란다.

✏️도서출판 오팬하우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