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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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모든 것을 데려간다고 믿지만, 어떤 여름은 끝내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달력 위의 계절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굳어버린 시간에 가깝다. 한때 함께였다는 사실, 그 함께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순간들.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지워지지 않는 시간에 대해 말한다. 오래된 기억은 흐릿해지지만, 그때의 감정은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남는다. 이미 지나간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순간과 분리되지 않은 채 이어진다. 지나간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남아 지금을 조금씩 바꿔놓는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겹쳐지는 것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은 현재를 살면서도 동시에 과거를 통과한다. 어떤 관계는 끝난 뒤에도 끝났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기억한다는 일은 단순히 정보를 보존하는 일이 아니다. 함께 있던 순간이 이후의 삶 속에 남아 작용하는 방식에 더 가깝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 하나가 선택을 바꾸고, 감정을 바꾸고, 때로는 삶의 방향까지 바꾼다. 누군가와 나란히 서 있었던 경험은 보이지 않는 기준이 되어 이후를 이끈다. 판단의 순간마다 이유 없이 기울어지는 마음, 설명되지 않는 익숙함 같은 것들이 그 흔적이다. 기억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현재의 결정을 미세하게 수정하며 계속 개입한다. 그래서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 자리로 물러나 있을 뿐,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과거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판단과 감정 속에는 이미 타인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겹쳐져 있다. 지금의 ‘나’라는 감각조차, 온전히 현재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이미 지나온 관계들의 흔적 위에 세워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시절에는 관계가 선택이 아닌 조건이 되기도 한다. 버티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던 순간들. 그때의 연결은 감정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다정함과 두려움이 같은 자리에 놓이고, 서로를 지탱하면서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 형태를 만든다.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고, 동시에 그 관계 안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기대는 순간 의존이 되고, 의존은 다시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묶는다. 그렇게 형성된 관계는 개인의 선택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하나의 조건처럼 남는다. 그런 경험을 지나온 사람에게 관계는 단순한 만남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후의 모든 연결이 그 시절을 기준으로 다시 측정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끝내 지워지지 않는가.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특별해서라기보다, 그 시절의 자신이 그 관계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은 동시에 그때의 자신을 불러오는 일과 다르지 않다. 기억은 대상 하나만을 남기지 않는다. 그때의 시선과 감정, 그리고 그 순간을 통과하던 존재까지 함께 끌어올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은 변하지만, 그때의 자신은 그 자리에 머문 채로 남아 있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여러 시점의 자신이 겹쳐진 상태에 가깝다. 과거의 관계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그때의 나‘ 때문이다. 잊는다는 것은 결국 그 일부를 스스로 놓아버리는 일과 닮아 있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겨진 시간은 현재를 조금씩 바꿔놓는다.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계절이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고, 한때의 관계는 지금의 선택과 감정 속에 조용히 개입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믿지만, 그 선택의 방향에는 이미 지나온 시간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인간은 단지 누군가를 사랑했던 존재가 아니라, 함께였던 시간을 통과하며 형성된 존재에 가깝다. 그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모습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 속에서 계속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라지지 않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과한 존재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특히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더 깊게 스며들 것이다. 이미 지나간 관계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 어떤 시절의 자신이 아직도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는 사람,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맺어졌던 관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 기억과 시간,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 이 책은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오래된 시간 하나를 천천히 우리 앞에 펼쳐 보이며, 지금의 우리가 무엇 위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소설로 남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이미 지나온 자신의 시간을 다시 마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도서출판 다산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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