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에게
김멜라 외 지음 / 곳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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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들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무너지거나, 불타거나, 끊어지는 방식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그저 스며들 듯 사라진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들, 그러나 완전히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남아 있는 것들. 그 빈자리를 마주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붙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집은 끝내 멈추지 않는다. 다섯 개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시작되지만, 모두 같은 자리로 흘러온다. 사라짐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려는 작고도 완강한 몸짓. 이 책은 거대한 재난을 고발하기보다, 그 재난 속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남기려는 마음의 형태를 집요하게 더듬는다.

이때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저장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된 것들을 다시 불러내는, 일종의 아주 미약한 반항이다. 물속에서 닳아가는 몸이 남기는 편지, 멸종 직전의 존재들이 서로를 이어 붙이며 건너는 시간, 문장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흩어지는 목소리들. 이 모든 장면은 하나의 사실을 반복한다. 세계는 쉽게 무너지고, 존재는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어떤 마음들은 끝내 사라지지 않으려 애쓴다. 그 애씀은 이미 저항의 형태를 띤다. 사라진 것들을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태도. 비록 그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넘겨버리지 않겠다는 의지. 기억은 그렇게 결과가 아닌 자세로 남는다.

이러한 몸짓은 언제나 손에서 시작된다. 흙을 파내는 호미, 엽서를 뒤집어 적어 내려가는 느린 동작들, 고통 속에서도 앞으로 기어가기 위해 뻗는 지느러미. 이 저항은 언제나 작고 느리다. 그것들은 멸종을 막지도, 개발을 멈추게 하지도, 떠나는 이를 붙잡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은 계속된다. 기억하려는 시도는 결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어떤 선언이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을 그저 두고 보지 않겠다는, 아주 조용하지만 분명한 부정. 세상을 향해 외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조용히 버티는 방식에 가까운 것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는 힘. 한 번의 거대한 행동보다 수없이 반복되는 작은 행위들이 더 질기게 남는다. 다섯 명의 작가는 그 느린 반복을 통해 묻는다. 사라짐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윤리는 왜 이렇게까지 손이 많이 가는 방식이어야 하는가.

여기서 건네지는 모든 말은 어딘가를 향해 있다. 다만 그 ‘어딘가’는 불특정한 세계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한 지점을 향한다. 단 한 사람, 단 하나의 존재, 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리. 도착을 알 수 없는 편지를 쓰고, 닿을지조차 알 수 없는 감각을 건네며, 이미 떠나버린 자리를 향해 말을 남긴다. 도착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보내졌다는 사실이다. 응답을 전제로 하지 않는 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계속 흘려보내는 마음. 이 책이 품고 있는 연결은 단단하게 묶인 끈이 아니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느다란 실에 가깝다. 그 위태로운 선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시간을 접어 보낸다.

발터 벤야민은 한때, 잊힌 것들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과거를 구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썼다. 이미 사라진 것들은 되돌릴 수 없지만, 기억 속에서 다시 불려 나오는 순간 다른 의미로 살아난다. 기억하는 일은 사라짐에 대한 가장 조용한 저항이 된다. 그것은 거창하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으며, 때로는 무력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래 지속된다. 아무것도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끝내 기억하려는 마음. 그것은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 작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허물어져 가는 세계 위에서 끝까지 남는 것은 어쩌면 거대한 외침이 아니라, 이렇게 작고 집요한 기억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끝내 서로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은 사라진 것들을 쉽게 잊어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닿을 것이다. 지나간 계절의 냄새를 오래 붙들고 있는 이, 떠나간 이름을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 불러보는 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억을 혼자서 지켜내고 있는 이에게. 또한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버려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사람, 거대한 말 대신 작은 몸짓으로 세계와 관계 맺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이야기는 마음 깊이 스며들 것이다. 어쩌면 끝내 포기하지 않기 위해, 혹은 이미 놓쳐버린 것들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앉히기 위해, 누군가는 이 책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느린 읽기의 끝에서, 사라짐 앞에 서는 자신의 태도를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

✏️그린피스 서울사무소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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