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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마지막 획 ㅣ 사이림 sailim
청예 지음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3월
평점 :
어떤 삶은 끝내 한 편의 이야기로 자신을 설명하려 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길어질수록, 인간은 흩어지는 감각을 견디기보다 하나의 줄기로 엮어내려 한다. 그렇게 엮인 서사는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상처에 방향을 부여한다. 그러나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복잡하게 숨 쉬던 타인은 점점 기능을 부여받은 존재로 축소되고, 관계는 살아 있는 접촉이 아니라 배치된 장면으로 굳어진다. 사랑은 그때부터 미묘하게 변질된다. 이해하려는 몸짓 대신 해석하려는 시선이 앞선다. 타인을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 가능한 틀 안에 가두는 일. 그 정리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실은 가장 조용한 폭력에 가깝다.
예술은 그 과정을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정당화한다. 무너지는 감정과 뒤엉킨 욕망을 하나의 형식으로 끌어올리는 힘, 그것이 예술의 얼굴이다. 그래서 예술은 종종 구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구원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태워 완성되는 균형에 가깝다. 어떤 이는 그 불꽃 덕분에 끝까지 견디고, 또 다른 이는 그 불꽃에 오래 노출된 끝에 자신의 형태를 잃어버린다. 아름다움에 가까워질수록 불필요한 것들은 제거되고,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은 침묵 속으로 밀려난다. 그 결과 남겨진 장면은 더욱 또렷해지지만, 그 또렷함은 많은 것을 지워낸 뒤에야 가능해진 선명함이다. 인간은 때때로 진실을 견디기 위해 환영을 필요로 한다. 예술은 그 환영을 가장 집요하게 지속시키는 방식이다.
관계 역시 그 형식에서 자유롭지 않다. 서로를 향해 있던 시선은 어느 순간부터 동일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전혀 다른 의미를 붙이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어긋남이 쌓인다. 그 어긋남은 크지 않다. 오히려 너무 미세해서 오래 방치된다. 그러나 바로 그 미세함이 관계를 더 깊이 파고든다. 언어로 포착되지 못한 감정은 서서히 굳어지고, 결국에는 한 사람의 존재를 규정하는 감각으로 변한다. 이해받지 못했다는 느낌, 끝내 선택되지 않았다는 확신. 그것은 사건보다 오래 남고, 논리보다 집요하게 작동한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 시선이 어긋나는 순간, 존재의 균형은 미묘하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소리 없이 깊어지고,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거리로 변한다.
이야기는 그 틈에서 자라난다.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체험된 감각이 더 강한 힘을 얻는 자리에서. 기억은 단순한 저장이 아닌 선택이며, 인간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닌 해석된 경험 위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기억은 언제나 일정한 방향을 갖는다. 감정에 의해 기울어지고, 의미에 의해 재배열된다. 장면은 필요한 만큼만 남고, 나머지는 조용히 탈락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결핍으로 남지 않는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정리된다. 그렇게 완성된 이야기는 빈틈을 감추는 대신 하나의 완결된 형식을 갖는다. 그 안에서 인간은 고통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바꾼다. 그러나 이해는 언제나 대가를 요구한다. 어떤 진실은 설명되는 순간, 더 이상 원래의 모습으로 남지 않는다. 결국 진실은 하나로 존재하지 않고, 각자의 내부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굳어진다.
마지막에 이르러, 한 사람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 앞에 선다. 그는 한 줄의 획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거리를 재고, 시선을 조정한다. 그가 남기려 하는 것은 단순한 흔적이 아닌 하나의 완결된 형식이다. 그 장면은 자연스럽게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오래된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서로를 비추며 가장 강렬한 색을 끌어냈던 두 화가가 끝내 함께 머물지 못했던 시간. 그들의 거리와 단절은 단순한 불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가 끝내 하나로 겹쳐질 수 없었던 결과였다. 마지막 획은 단순한 선이 아니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자, 스스로를 하나의 이야기로 봉인하는 행위에 가깝다. 삶의 마지막 장면이 하나의 구도로 완성되는 순간. 어쩌면 인간은 무너지는 존재가 아니라, 끝까지 어떤 형태로 남고자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흩어지기보다는 하나의 선으로 응축되기를, 설명되지 않은 채 사라지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읽힐 수 있는 장면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
이 이야기는 자신을 하나의 의미로 설명하고 싶어졌던 적이 있는 사람에게 오래 남을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 앞에서, 그것을 견디기보다 해석하려 했던 시간들을 지나온 이들에게. 또한 타인을 온전히 바라보기보다, 이해 가능한 형태로 정리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조용히 되돌아올 것이다. 관계 속에서 미세한 어긋남을 느끼면서도 끝내 그것을 말로 붙잡지 못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끝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하려 했던 사람에게. 이 소설은 그 장면이 얼마나 잔혹한 선택이었는지를 오래도록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 잔혹함이 끝내 어떤 의미로도 온전히 감당될 수 없는 것임을,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그 선택 앞에서 멈춰 서야 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러준다.
✏️도서출판 열림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